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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창작수필문인회 원문보기 글쓴이: 엄지바우(이봉길)
실험수필의 시도
수필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실험수필에 대한 글에 독일 철학자이며 전통적인 서구의 종교와 도덕의 근본정신, 그 동기를 밝히려고 노력한 니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작가란 어떤 존재인가를 살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19세기를 살았던 독일 철학자로, “신은 죽었다”는 충격적인 말을 세상에 남긴다. 니체는 일방적 힘의 정치를 강력히 부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절대 권력의 부재로 인한 세상의 혼란도 우려했다.
이런 정신적 이중성을 보였던 것은 성장기에 루터의 경건주의(敬虔主義)와 맹신주의의 폐해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니체의 삶을 3기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제1기는 1844년 프로이센에서 출생한 니체는 조부가 프로테스탄트교(敎)를 옹호하는 저술가이고, 외조부도 그 계통의 목사였다. 종교적인 가정 분위기로 인해 그의 성장기는 현실에 순종함을 인간의 최고 덕으로 여겼던 때로 한정할 수 있다.
아버지는 니체가 6살 때 세상을 떠나 조모와 어머니, 누나 사이에서 성장하여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과 다른 정신세계의 존재에 관심을 갖지 못했다.
제2기는 관념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형이상학을 주장한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를 접하게 되고, 오페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를 만나면서, 바그너가 자기 음악에 그리스도교적 모티브를 많이 이용하고 국수주의(國粹主義)와 반(反)유대주의에 빠져 있음을 감지하고 자기 세계의 변화를 맞게 된다.
이때의 심적 동요는 첫 번째 저서인 <비극의 탄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니체는 그리스의 모든 비극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결합에서 나왔으며,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와 낙관주의가 그리스의 비극을 죽였다고 주장하곤 했다.
이때부터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던 세계가 무너짐에 따른 심적 충격에 건강까지 나빠져 그동안 해오던 강의도 일체 거부하고,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접촉하지 않는 칩거생활에 들어간다.
이때를 제3기로 규정할 수 있다.
1878년에 출간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과 그때까지 지향해왔던 기존에 대한 저항의지가 서려있는 <선악의 피안>, <바그너의 타락>, <우상의 황혼> 등을 발표하고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 길거리에서 쓰러진 뒤 일체의 능력과 의지를 상실하고 1900년에 영면한다.
필자의 니체에 대한 언급은 종교적 문제에 주목해서가 아니라 작가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에 앵글을 맞추어 살핀 결과인 만큼 곡해가 없어야 한다.
작가는 작품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 제시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롭기 위한 자기탁마를 계속하지 않으면 생존을 중지(中止)한 무용지물과 같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당대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직·간접적으로 신학자나 심리학자를 비롯하여 인문학이나 문학예술가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귀감의 대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계몽주의’라는 세속주의의 승리가 가져온 결과에 대해 깊이 반성하도록 깨우침을 준 철학자로 보기 때문이다.
‘니체’의 일생을 반추하며 절감하는 것은 모든 일엔 하나의 정답만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관념에 포획되어 입수한 통념의 벽에 감금된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기 길을 제대로 가는 경우가 되는 때도 있지만, 그 정지상황(停止狀況)이 정상적 흐름을 멈추게 하는 웅덩이가 되어 썩게 만드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작가는 일반의 경우와는 달리 누가 어떻다고 해서 그 무리 속에 끼어들어 헤매기보다 자기만의 길을 찾아 독특한 브랜드의 세계를 구축해야만 비로소 영주(領主)의 지위를 확보하여 영지(領地)를 다스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소임을 위탁받아 관리하는 하수인에 불과하다.
작가에게 있어 중요한 요건은 ‘초월(超越)’ - 정형화된 틀의 굴레에서 벗어나 쇄신을 꾀해야 한다. 니체가 사후(死後)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이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그가 확보된 결실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도전해서 보다 진실한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말은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때 비로소 모순의 실체가 보이고 파괴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수필가는 먼저 경험한 바를 그대로 기록하는 글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회상문 정도에 그치고 만다. 사실과 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갖가지 정체가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은 값진 세계는 누구에 의해서도 발견된 곳이 아닌 착상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는 것이다.
수필의 새로운 가능성은 여기서 찾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정서가 다르고 오감(五感)에서 우러난 향취 또한 다르므로 독특한 맛을 내야 하고, 이를 입증해야 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천편일률적인 내용을 가지고 억지 감동을 강요하는 것은 썩은 물의 악취를 억지로 신선한 향기로 알라고 강요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작가에겐 무엇보다 진실에 도전하는 용기와 이를 발전시켜나가는 적극적 추진 의지가 필요하다.
니체와 그 외 유명한 예술가, 철학자가 자신이 살던 시대에 순응하지 않아 보편적인 호응을 못 받았지만, 후대에 그 이름들은 예술과 철학의 흐름을 바꾸었다. 저항의 흐름 없이 새로운 물결은 생성되지 않는다.
- 수필가 윤재천
산 속에서의 스트리킹의 추억
마 광 수
문득 내 대학원 재학 시절의 추억 한 토막이 떠오른다. 그때는 초미니스커트의 전성시대였고 히피들이 설쳐대던 시절이었다. 그대 미국에서는 ‘스트리킹’이라는 게 유행했는데, 스트리킹이란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서 벌거벗고 유유히 걸어가거나 뛰어가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히피풍 자연 복귀 운동의 하나로서, 누디즘을 데몬스트레이션으로 즐기는 풍습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스트리킹을 시도 대학생이 한두명 있었는데, 대낮에 당당하게 발가벗고 뛴 게 아니라 밤중에 술을 마시고 그 술기운의 힘을 빌려 외진 골목길을 뛰어가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경찰서로 끌려가 처벌을 당했다.
나도 그때 스트리킹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서울의 대로변이 아니라 내설악 백담산장(百潭山莊) 부근의 계곡에서였지만, 그래도 스트리킹은 스트리킹이었다. 나 혼자만 발가벗고 있었고 같이 갔던 친구들은 다 옷을 입고 있는 사태였으며, 더욱이 그들 가운데는 여자도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남자 세 명과 여자 세 명이 함께 어울려 설악산에 갔다. 그리고 백담산장에 머물면서 설악산의 이 계곡 저 계곡을 찾아다니며 놀았는데, 그 당시만 해도 내설악에는 등산객이 별로 없어 아주 한적한 곳이 많았었다. 백담산장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날 우리 일행은 가야동 계곡까지 올라가 버너로 점심을 해 먹으며 하루 종일 계곡물에 발을 담그거나 수영을 하며 놀았다. 여자애들도 수영복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멱을 감고 놀았고 남자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었다. 그런데 나는 워낙 수영을 못하는 데다가, 갈비뼈만 기타 줄처럼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내 빈약한 몸뚱어리를 노출하기 싫어하는 성미였기 때문에, 수영복을 준비해 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남들이 다 신나게 물장난을 치며 노는 것을 보자 나에게도 갑자기 괴상한 오기가 발동하여 용감하게 윗도리를 벗어부치고 헐렁한 팬티 하나만을 입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팬티라는 것이 여간 촌스러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팬티라는 게 고작 성기 부분만 조금 감추는 역할을 해주는 것뿐인데, 그것이 차지하는 면적을 보면 사실 옷을 안 입은거나 마찬가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만 해도 나에게는 낭만적 열정이 있었고 패기가 있었고 당당한 광기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갑자기 이상한 충동을 느껴 졸지에 팬티를 벗어서 내팽개쳐버리고 물속에 들어가 멱을 감기 시작했다. 그 해괴한 광경을 본 남녀 친구들이 아연실색해 했을 것은 뻔한 일. 그런데 그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어색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자 나는 오히려 점점 더 재미가 났다. 그래서 아예 내 썩은 장작개비 같은 알몸뚱이를 물 밖으로 끄집어내어 그들 앞에 적나라하게 공개하고 말았다. 처음엔 여자애들이 질겁을 하며 고개를 돌리고 남자 친구들은 나를 뜯어말리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내가 태연하게 발가벗은 채로 여기저기를 왔다갔다 하면서, 뭘 이까짓 것 가지고 그렇게들 호들갑을 떨어대느냐, 여기는 설악산 깊숙한 골짜기고 우리들만의 세상이 아닌가, 그리고 나는 맹세코 하루 종일 순수한 자연아(自然兒)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자 차츰 그들도 내 지랄발광에 동감을 표시해 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하루 종일 계곡에서 밥을 지을 때나 밥을 먹을 때, 또는 우리가 둘러앉아 트럼프 놀이를 할 때에도 계속 발가벗고 지냈고, 다음날도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남자 친구들은 자기네가 나처럼 훌훌 벗어젖힐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탄하기까지 해댔고, 여자애들은 나를 무슨 천재적 기인이라도 되는 양 우러러보며 찬탄과 존경의 눈빛을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의 탁한 공기 속에서가 아니라 맑고 신선한 대자연의 품속에서 아주아주 유쾌하게 마음껏 스트리킹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다시는 돌이키기 어려운 건강한 치기(稚氣)의 세월이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그런 식의 스트리킹을 시도해 본 것이 내가 처음은 아니다. 변영로가 쓴 <명정(酩酊) 40년>이라는 책을 보면 <백주(白晝)에 소를 타고>라는 수필이 들어 있다. 그 글에는 1920년대에 변영로와 염상섭 그리고 오상순 등이 모여 성북동 산골짜기에서 소주를 마시며 야유(野遊)를 즐기다가, 세 사람이 몽땅 발가벗고 광가난무(狂歌亂舞)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술기운을 빌어 골짜기에 매어져 있는 소를 잡아타고 혜화동 로터리까지 진출하려고 기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벌인 스트리킹은 남자들끼리만의 스트리킹이었다. 비록 설악산 깊은 계곡에서였을망정, 나는 여자들 앞에서, 그것도 술기운의 힘을 빌지 않고 맨정신으로 태연하게 벗고 설쳐댔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나중에 서울에 돌아온 뒤에 남자 친구들이 내게 솔직히 고백한 말이 있다. 자기네들도 나처럼 발가벗고 있고 싶었지만, 수영복 입고 반라(半裸)의 몸으로 왔다갔다 하는 여자애들을 보니 페니스가 울뚝불뚝 발기해대는 통에 영 엄두가 안 나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어쩌면 그렇게 계속 벌거벗고 있었는데도 페니스가 한 번도 발기하지 않고 계속 축 늘어진 상태로만 있을 수 있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마치 여색을 초월한 도사를 우러러보는 듯하여 아주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나중에 조심스러운 어조로 덧붙이기를, 너 혹시 임포, 즉 다시 말해서 발기불능 아니냐, 하고 걱정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해왔기 때문에 난 기분이 잡쳐버렸었다.
글쎄… . 내가 그때 정말 발기불능이었을까. 아니다. 나는 멀쩡했었다. 지금도 난 발기불능만은 절대 아니다. 다만 좀 늙어서 발기에 더욱 까다로워졌을 뿐이다. 하지만 대학시절 20대 초반의 싱싱발랄한 청춘 시절에, 반라의 여자애들 앞에서 벌거벗고 설쳐대며 전혀 발기가 안됐다는 것은 상기해 보면 가히 불가사의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수주 아내의 항변
최 미 아
많은 분이 오셨구려. 문학제를 한다기에 와 보았소. 내가 누구냐구요?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의 마누라 양창희(梁昌姬)요. 내 가만 보니 부천에서 수주문학상도 만들고, 수주 책들을 다시 내기도 합디다. 그런데 모두 다 ‘수주 수주’지 함께 살면서 고생한 내 이야기는 아무도 안 하는 거여. ‘수주’하면 말술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술꾼 아니요? 그 술꾼 마누라로 살았던 내 이야기 좀 하려고 이리 왔소.
수주가 “이년아! 썩 내려와라!” 하면서 저쪽에서 달려올 것 같기도 하네요. 만취해 들어오면서 “이년아!” 하고 부르는 것이 나를 부르는 소리였으니까. 그 소리만 나면 밥상에 앉아 있다가도 이웃집으로 도망을 쳤지. 그러면 “거기 대가리 허옇게 희고 코 빨간 년 있거든 당장 내쫓아라. 세상에 둘도 없는 악독한 년이다.” 하면서 “문 열어주지 마라. 뉘네 집에 가서 어떤 놈하고 자빠졌나보다.” 하고 대문을 걸어버렸소.
나와 결혼할 때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오. ‘금주’라고 새긴 은패(銀牌) 하나를 목에 걸고 다녔답디다. 사람들은 “개가 똥을 끊지, 그자가 술을 끊다니 거짓말이다.” 하였다는데 6년간이나 금주를 했다니 믿기지가 않지요. 그러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다시 술을 마셨다가, 상처한 후에 술을 다시 끊었답니다. 그때는 신문에다 ‘금주를 단행한다’ 이런 글까지 써서 발표를 했대요. 나와 재혼하고 내가 첫아들을 낳자 득남 자축이란 명목 하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나는 “주정뱅이한테 시집 올 년이 없으니까 교묘한 수작으로 뻔뻔스럽게 신문에다 글까지 내고, 이게 사기 결혼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대들었소.
이런 사람하고 어떻게 결혼을 했냐구요? 그것도 자식 딸린 남자와? 내가 진주 일신여고에 있을 때였소. 김응집(金應集)씨와 구자옥(具滋玉)씨, 우리 사촌오빠까지 나서서 좋은 사람이 있으니 만나보라고 했소. 세 사람이 중매를 선 거지. 지금은 나라가 없어서 주정뱅이 시인이지만 나라만 있으면 정승감이라나 뭐라나 하면서, 시인의 아내 노릇을 충실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자꾸 나를 부추깁디다. 그래 한번 만나보자 하고 만났는데 내가 졸업한 대학의 교수님이지 뭡니까. 사제 간 결혼도 좋으냐고 묻길래 선생님 하실 탓이라고 했더니 약혼식이고 뭐고 번거로운 거 다 그만두고 3일 후에 결혼식을 하자는 거예요. 그렇게 쉽게 결혼을 해버렸소. 쓴맛 단맛 다 빠지고 음식으로 말하면 찬밥덩어리인데 눈에 뭐가 씌었어도 단단히 씌었던 거지.
나도 선보는 자리에서 얼굴 한번 못 들 정도로 요조숙녀였다오. 내가 음악과 출신 아니우. 가족들이 둘러앉아 있는 저녁 시간,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결혼 생활을 꿈꾸기도 했지. 그런데 남편은 쥐꼬리만한 글 좀 쓴다고 친구들과 돌아치면서 허구한 날 술에 취해 있었소. 식구는 남이 난 자식, 내가 난 자식, 떼거지처럼 많은데 가장이라는 작자가 아침 식전부터 술병을 들고 앉아 있다고 생각해보구려. 아침 반주하기 전 맑은 정신으로 있을 때 일장 연설로 분풀이를 하기도 했지. 한번은 칼을 들고 그토록 술에 취해 분간 못하고 살면 어린것들 먼저 죽이고 나도 죽는다고 했더니 앞으로 절대로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을 합디다만 며칠뿐이었소. “어디 나 없이 고생 좀 해봐라.” 하고 어린 것들을 데리고 교편 자리를 잡아 황해도 구석으로 숨어보기도 했소. 다음 해에 아이들 학교 때문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소. 그 뒤로도 애들이 불쌍해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면서 여러 번 집을 나가 보았지만 역시 똑 같았지.
취중에 일어난 황당한 일들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소. 송장을 칠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머리는 깨져서 만날 붕대로 싸매고 다니고, 사흘걸이로 이부자리에다 소변을 보았소. 햇빛 쪽을 따라다니면서 이부자리를 말리고 있으면 속 모르는 이웃들은 “댁의 어떤 애기가 날마다 오줌을 쌉니까?”하고 물어봐요. 집에서만 그러면 다행이게요. 남의 집 이부자리도 망쳐놓고는 했지. 집을 얻으러 다닐 때는 술 취한 남편 옮기기 쉽게 문전이 평지인 집을 찾아다니고는 했답니다.
막내딸이 아홉 살 되던 해 초하룻날 아침이었어요. “인숙아, 너를 위해서 아버지는 오늘부터 술을 안 먹겠다.”하는 거예요. 어리둥절했지요. 그날부터 집안은 화창한 봄날이요, 다른 세계였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유는 다른 데 있었소. 자식 놈들이 부전자전으로 술이 고래인데 밤마다 술을 마시고 와서 나더러 술값을 안 준다고 살림을 때려 부수고, 택시비 달라고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 지르고 하니까, 부자가 이러다가는 붙어살 동네가 없겠다 싶어서 술을 끊었대요.
수주가 죽은 지 50년이 지났소. 수주문학상이니 수주문학제니 해서 이렇게 활발하게 수주에 관한 일들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소. 중앙공원에 시비도 있고, 오정대로에 동상도 세워져 있습디다. 수주 묘에서 해마다 백일장도 열리고, 참배객도 늘어납디다. 수주를 일컬어 천재 시인, 일제하에서 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시인, 조국 잃은 마음을 달래느라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던 시인, 여러 말들을 합디다. 허나 나는 천재고 뭐고 다 싫었소. 지금 시대라면 어느 여자가 같이 살았겠소. 일 년도 못 버티고 도망가든지 이혼을 하든지 했을 것이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세월을 어떻게 건너왔나 싶네요.
하지만 어찌 살면서 밉기만 했겠소. 책을 한 번 붙잡으면 혼자서 방에 들어가 밥도 먹지 않고 다 읽을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오. 나는 그럴 때의 수주가 든든하니 좋았소.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아첨은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지. 그런 반면에 공연히 남을 깎아내리는 법도 없었소. 다정다감한 면도 있었다오. 만취해 오면서도 어린 것의 우유만큼은 잊지 않고 꼭 사 들고 왔어요. 또 전처가 죽은 지 20년이 되던 해, 살아있다면 환갑이었답니다. 그래서 가족끼리 절에 가서 그날을 기념한 일이 있었어요. 그 일을 두고 사람들은 나더러 서운하지 않으냐고 했지만 나는 괜찮았소. 자식을 다섯이나 낳아준 사람인데 그렇게라도 해주어야지. 내가 죽더라도 잊지 않고 생각해 주겠구나 싶었지. 수주가 ‘서울시문화상’을 받았을 때는 내조를 잘한 덕이라고 나를 치켜세워줘서 우쭐해지기도 합디다.
좋은 자리에 와서 수주 흉을 실컷 보아버렸소. 소갈머리 없는 아낙네의 한바탕 한풀이라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이해해 주구려. 이런 큰 잔치를 해주는 걸 보니까 고향이 좋기는 좋소. 수주가 선견지명이 있어서 고려 때 부천의 지명인 ‘수주’를 호로 썼나보오. 이제 나도 저기쯤에서 내 꼴을 지켜보고 있는 수주와 함께 산소에 가서 편히 누우려오. 이렇게 좋은 일 하는 여러분들 복 많이 받을 거구만.
* 변영로(1897. 5. 9~1961. 3. 14) : 일제강점기 <코스모스>, <꿈많은 나에게>, 등을 저술한 시인, 영문학자, 아호는 수주, 서울 출신. 미국 캘리포니아주립 산호세대학에서 수학, 영어교사로 지내기도 하였으며, 1919년에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일도 있다. 1920년대 ‘폐허(廢墟)’, ‘장미촌(薔薇村)’ 동인을 참가하였다. 동아일보 기자 <신가정(新家庭)> 주간을 지내다 광복 후 성균관대학교 교수,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직하였다. 그의 시작품은 가락이 부드럽고 말씨가 정서적이어서 시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작품 기저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도 깔려 있었다. 저서로 수필집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 수주시문선(樹州詩文選)> 등이 있다.
** 작가의 말-시인의 아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관련 책들을 참고하여 엮어보았습니다.
수주 선생을 폄훼하려는 뜻은 없었습니다만 조금이라도 누가 되었다면 깊이 사죄
드리겠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남꽃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 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변영로의 시 <논개>
첫댓글 인생은 모두 실험의 연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