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초순.그날 따라 함박눈이 포근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계절은 봄을 재촉하고 있었지만, 겨울의 한 자락에 둘러싸인 탓인지 추위는 여전했습니다.
가락시장에서 석화(굴) 다섯 포대를 마련하여 아내와 함께 시골집으로 내려 갔습니다. 시골집을 신축하기 전 추억이 서린 이 집에 추억을 뿌리내린 가족들이 지나온 세월을 덕담으로 얘기꽃을 피워 볼까 해서입니다.
동네로 접어들면서 쪽다리에서 보니 시골집 울타리 주변으로 다섯 대의 차량이 줄을 맞춰 서 있습니다. 이미 동생(화자, 웅섭, 미자. 민자. 태섭)가족들이 도착하여 굴 파티를 준비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미 영아아빠는 굴 파티준비를 위해 불을 지피느라 눈가엔 눈물이 어려있고,이마에는 땀이 송올 송올 맺혀있는 상태로 손 인사를 합니다.
차가 도착하자 자동차 키를 넘겨 받더니 영아아빠가 뒤 트렁크를 열고 동생들을 불러 이리저리 주문을 합니다. 화자동생은 광주에서 준비해온 갓김치와 묵은 김치를 먹음직스럽게 듬성듬성 잘라 벌겋게 달궈진 자동차 휠로 만든 화덕주위에 진열합니다. 이어 제수씨들이 얼음이 둥둥 뜬 동치미국, 마늘,양파,고추장,된장 그리고 기름종지, 면장갑. 식칼, 그릇들을 화덕 언저리에 늘여놓으니 함박눈 밥상 위에 잔칫상이 마련된 셈입니다.
준비가 끝나 갈 무렵, 밤디 큰고모, 아저씨와 대희동생이 정희동생 가족이 들어옵니다. 낮선 사람을 의식한 깜순이(라이코스의 엄마)가 귀를 쫑긋 치켜세우고 꿍얼거리며 짖을 표정을 보입니다. 태섭동생이 쓰다듬으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안정시키자 조용해집니다. 이어서 소고지, 광주, 역골 고모와 아저씨가 각기 아들들(강식,용순,해종)과 함께 속속 도착합니다. 이제는 라이코스도 눈치를 챈 듯 조용히 앉아 냄새만을 의식한 듯 코만 벌렁 벌렁거립니다. 고즈넉하다 못해 냉냉하던 시골집에 갑자기 따스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화덕주위는 함박눈이 소복히 쌓이지만 훈훈한 열기에 물럿거라 신세가 되고 맙니다. 두툼한 파카, 외투, 잠바, 개똥모자와 고스가이모자에 함박눈이 소리없이 쌓일 뿐 동장군은 파고들어 올 자리도 없는가 봅니다. 안채 처마에 맞대어 눈과 비를 피하기 위해 아버지 생전에 마련된 함석차양은 오늘의 특별석이 되었습니다.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도 그곳은 당연히 고모님들의 자리였습니다. 석화가 하나 둘 석쇠 위로 던져집니다. 미자동생이 쐬주(?)와 잔을 내오고 프라스틱 앉은뱅이 의자에 눈사람들이 엉덩이를 털썩 내려 놓습니다.
뜨거운 화덕 위에서 익어버린 석화는 빼꼼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자연산이 분명해 보입니다. 힘을 들이지만 속내를 보이지 않으려 합니다. 뜨거움에 질린 듯 거품만을 쏟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입을 열지 않는 석화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끌, 꼬챙이 또는 식칼을 비좁은 조개 틈에 고정시키고 돌이나 손으로 두드리는 사람도 있고, 마음이 급한 사람은 함박눈 콘크리트 바닥에 패대기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적하던 집안이 그야말로 야단법석입니다. 결국에는 뜨거움과 애주가들의 열띤 공격을 견디지 못해 석화는 입을 벌리고 그들의 속살을 드러내 버립니다.
고모아저씨들에게 영아아빠가 술을 권해 드립니다. 피는 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편한 밤디 고모님과 소고리,광주,역골 고모님들 곁에는 현숙엄마와 영아엄마가 이미 포진해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마당 한복판에는 머리에 눈을 소복하게 쌓인 채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얘기하는 아름다운 모습들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영아아빠가 큰 소리로 외칩니다. 시끌하던 좌중이 눈소리가 들릴정도로 조용해 집니다. ‘시골집에 대한 우리 큰 고모부님의 역사적인 말씀을 듣기로 합시다' 하면서 밤디 고모아저씨께 눈을 돌립니다. 굵직하면서도 정이 많은 목소리가 함박눈 사이로 프리즘처럼 다가 옵니다.
"내가 장가들러 온 19살엔 큰 사랑채. 그리고 이 안채 자리에 초가 삼칸이 있었지.이 안채는 이 동네 김씨네 대가 부자집을 사서 그대로 재목과 댓돌 등을 옮겨 지은 것이지, 그러니까 영섭이가 아마 여닐곱살 쯤 되었을 거여. 처갓집이 잘 되어 새집 짓는다고 해서 고모와 같이 와서 나도 거들었으니까. 대가집 헐어내는 선두는 음성에 사시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장순아저씨가, 용구쇠를 말아올리자 그 다음으로 거부미, 고작골 숙부님들, 영섭아버지, 거부미, 고작골 당숙들이 낫과 쇠스렁을 들고 지붕 위에서 왔다갔다 하며 초가지붕을 일사분란하게 걷어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구만. 이 집을 헐고 다음달이면 여기다 새집을 짓는다고 하니 많이 세월이 흐른거지. 할아버지 삼형제의 우애는 정말 대단했어. 옛날에는 이양기(모심는 기계)가 없던 시절이어서 논에 모를 심으려면 모를 손으로 쪄서 그걸 지프라기로 묶고, 논으로 운반해 못줄에 달라붙은 눈에 간격을 맞춰 모를 심는 때였지. 일꾼을 많이 앗으면 앗을수록 일이 빨라지는 거지. 난 시간 난지도 얼마 되지 않아 얻은 일꾼 서너명하고 일할 때였어, 일꾼이 모자라니 모를 쪄 주신다고 장인(영섭이 할아버지)이 오신 거지. 이 일을 하면 이십대인 나도 엄지와 검지 그리고 약지가 그 중에서도 약지 손마디가 모두 부어져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화끈거려 끙끙거릴 정도였으니까. 그 이튿날 조반을 드시자 바로 작은 동생댁으로 가신다고 서두르시더구만, 소를 끌고 쉰일을 해 주시러 가시는 거지. 모를 심으려면 지금의 트랙터가 없는 세월이니까 소와 써래로 논을 가즈런히 평평하게 다듬어 놓는 일을 하는 것이지. 그 쉰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노련한 농사꾼이 하는 최고 기술이라고 할까.품을 2명을 앗는 일이었거든. 그 때는 쉰일꾼이 없으면 모를 심을 수 없었으니까. 할아버지 삼형제가 서로 오가며 농사일을 도왔을 만큼 우애가 대단하셨지. 조카들 덕분에 나도 이 밤중 함박눈에 여기 왔지만,모두가 할아버지 삼형재의 우애를 본받은 게 아니겠나 싶어. 자~ 다 같이 한잔 하자구, “새로 지을 집과 모든 가족들의 건강을 위하여,건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포동포동한 조개살이 무더기를 지어 차례를 고모아저씨와 아줌마들 앞에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뜨거운 맛살이지만 잘들 자시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이 간절해 집니다. 고모아저씨들은 조카들이 챙기고, 조카딸들과 조카며느리들이 고모아줌마들을 시중들고 있군요. 그 뿐이 아닙니다. 밤디 큰고모아저씨도 스리슬쩍 큰 고모님께 잘 익은 조개속살을 갖다 주시다 내 눈과 마주치자 검연적은 듯 싱그레 웃어 보입니다.
아저씨들이 조카에게 고모들이 조카에게 그리고 형제들끼리, 자연스레 잔이 돌아가면서 취기가 슬슬 오릅니다. 6살쩍 밤디 고모 등에 업혀 대가집 헐어내는 장면을 보던 일,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는 소에 질마를 씌우고 연자방아를 돌려 벼를 찧어 쌀을 만드는 증조할아버지를 이랴이랴하면서 따라다니던 나, 소를 따라 움직이는 육중한 연자방아 아래 움푹파진곳에서 한손으로는 벼를 집어넣고 다른 손으로는 쌀을 재치있게 골라내는 힌수건과 광목치마저고리를 입은 할머니, 연자방아 반만한 둥근 돌덩이를 밧줄에 묶어 열두서너 명이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면서 성서리를 메기며 집터를 다지던 일, 수수갱이를 십자모양으로 엮어 재목사이에 넣어 벽줄기를 만들고 그 사이사이에 왯째 야산에서 달구지로 날아온 진흙을 굳혀 벽을 세우던 일, 하얀 석회를 물에 풀어 그 안에 멱줄기(응고제)같은 것을 섞어 진흙벽 위를 희게 칠하던 일, 집을 다 짓고 나서 집을 진 날짜와 건물주인을 기록한 대들보 상량 올릴 때 아무 뜻도 모르고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넘죽 절하던 일,새로 지은 집에서 처음으로 군대간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와 겸상하여 어머니가 정성껏 차려준 밥을 먹던 일, 새집에서 살게 된 것을 축하해 준다고 개구장이 친구들이 개구리뒷다리를 구어 주던 일. 두부만드는 사랑부엌 가마솥뚜껑위에 소고리고모에 포대기로 엎여있다 빠져버려 손에 화상을 입은 화자동생을 엎고 진가리의원에게로 달려가던 소고리고모, 갱토학교 갔다고 건너방에서 아버지한테 싸리가지 회초리 종아리 맞던 일, 나중엔 할머니가 들어오셔서 횟초리를 빼앗아 버렸지만 마루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안쓰러운 모습으로 훌쩍거리던 엄마, 엄초시하의 핳머니에게 순종하시면서도 자기 의견을 밝히시던 어머니의 현명한 붙임성,방학 후 시골집내려오면 놀래줄려고 사랑채와 외양간사이의 틈담벼락위로 얼굴만을 내밀고 요상한 표정과 소리로 들릴가 말가하게 신호하던 일, 그럴 때마다 제일 먼저 알아차리고 집안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면서 달려들던 웅섭동생, 서울올라 갈 때 마다 용 돈을 태워주려고 팔개노인집과 항그네노인댁을 드나드시던 어머니,아들에게 줄 것이 삶은 토종달걀과 오리알 뿐인 엄마의 정성스런 모습, 화자동생과 웅섭동생이 싸우면 형이랍시고 웅섭이를 쌀독이 즐비하게 쌓인 광에 가두어 두던 일,새로 시집온 서울며느리(재엽엄마) 불편해 할까봐 난방과 화장실을 현대식으로 바꾸시던 아버지, 이 과정에서 공사하던 사람이 도망가벼려 영아아빠와 내가 아버지와 함께 일하다 벌어진 에피소드들,우리집으로 장가들러 온 소고리 고모아저씨가 전통혼례를 안마당에서 마친 후 아줌마를 트럭(옛날은 트럭을 타고 시집으로 신랑과 같이 감)에 싣고 가버려 너무 서운한 나머지 이 고구마밭 집가리 뒤편에 숨어서 역골고모와 숨어서 울던 일, 채표(노름)가 성행할 때 영복이 아저씨가 사랑채 뒷간에서 한자 한자 하면서 야경꾼방망이를 손에 잡고 때리고 소고리 고모아줌마는 손으로 빌면서 그 날의 운을 기원하던 일, 큰 손자 잘되게 해달라고 장독대 옆에 고이 모신 토속신령께 물그릇 한 사발 떠놓고 비는 모습을 달빛서린 창호지유리문을 통해 보던 일, 아버지가 고단한 농사일을 하면서도 호롱불 아래서 고모아줌마들 줄려고 털실로 도코리(털세타) 뜨던 일,퇴직 후 잠시라도 엄마와 살아야 후회되지 않을 것 같아 안사람을 억지로 데려와 장사하는 동안 건너방에 우리가족이 살면서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한 일, 그렇게 효도를 잘 하면서도 바른 소리로 어머니를 대하는 미자동생의 강팍한 언행으로 아파하는 어머니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던 일, 큰 아들가족이 시골에 오고부터 무엇이나 동네 사람들에게 당당해진 어머니를 보며 마음 뿌듯하던 일, 이웃에 놀러 온 서씨 시앗에 의해 자동차사고를 당해 병원에 계신 동안 야간에 들러 간호한답시고 소일했던 일, 등등, 서리서리 활동사진이 어렴풋한 취중마음속을 헤집고 지나간다. 그 때 영일아저씨가 내게 술 권하는 쩌렁쩌렁 한 목소리가 비몽사몽에 있는 내 꿈을 앗아가 버렸다. 소주잔이 몇 순배 돌아갈 즈음, 머리와 두툼한 옷 위에 무게가 느껴졌지만,추위는 잊혀지고 정감만 살아 숨쉬고 있는 이곳에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위를 돌아 보았다. 모두가 눈사람이 되어버렸다. 함박눈 탓으로 돌아갈 길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 5월 주님께 드리는 나의 간절한(?) 기도를 뒤로 하고 우리육남매의 추억이 서리서리 남아있던 ㄱ자형의 안채와 일자형의 사랑채와 헛간채가 내 마음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포클레인에 의해 성냥갑처럼 힘없이 무너지는 사랑채.헛간, 안채(대들보,건너방,뒷방,안방,마루,부엌 순서)를 바라보며 숨죽이고 있는 내 마음을 보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 침묵속에서도 고향의 소리를 풍기는 다딤이돌과 여러 사람들 앞에서 우리새집을 은근히 자랑하느라 넙죽 넙죽 절하던 상량들보가 유난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