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00. 낙양에서 - 北魏와 용문석굴 ②
중생 염원 담은 아미타불 가장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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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미타불 용문석굴엔 아미타부처님이 가장 많이 조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은 화려한 연꽃과 수많은 화불의 호위를 받고 있는 용문석굴 아미타불. |
‘석굴(石窟)’ 혹은 ‘석굴사원(石窟寺院)’은 말 그대로 바위를 뚫어 만든 사원이다. 사원 자체가 암석이고, 암석 위에 조각하고 그림도 그렸다. 일반사원에 비해 모습이 장려하고, 영구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석굴사원이기에 수백 년 동안 비바람을 맞고도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한 채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
석굴사원은 주지하다시피 불교발상지 인도에서 시작됐다. 칸헤리, 베드사, 바쟈, 엘로라, 아잔타 석굴 등 인도에는 지금도 수많은 석굴사원이 남아있다. 이것이 불교전파 경로인 인도서북부 지역을 통해 중앙아시아로 전해졌다. 그곳에 간 불교(문화)는 간다라지방(파키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바미얀에 거대한 유적을 남겼다. 2000년 3월말 탈레반에 의해 부처님이 훼손된 바미얀 석굴이 그것인데, 바미얀은 대불(大佛)을 동쪽으로 전파한 기착지이기도 하다.
석굴사원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예배하는 장소인 ‘차이티야’와 수행자들이 거주하는 ‘비하라’가 그것. 인도 석굴의 차이티야는 장방형으로 길고 안쪽 끝이 둥근 말발굽 형태며, 내부 깊숙한 곳에 탑이 봉안돼 있다. 불상을 모시기 이전 초기불교시대 예배대상은 탑이었기에, 석굴 안 조용한 곳에 탑이 조성됐다. 반면 비하라는 중앙의 넓은 홀을 중심으로 각 면에 작은 방들이 만들어진, 주거용 석굴을 말한다. 중앙의 큰 홀은 강의나 집회 장소로 이용됐고, 주변의 작은 방들은 침실이나 식당으로 사용됐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차이티야와 비하라가 결합됐다. 비하라에 불당(佛堂)을 마련하고 불상을 모셔, 승방, 강당, 불상이 함께 구비된 하나의 가람이 만들어졌다. 결국 하나의 굴이 하나의 사원으로 변모됐다. 이러한 석굴이 실크로드를 따라 불교와 함께 점차 동진(東進)해 중국에 들어왔다. 바미얀에서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을 거쳐 중국에 들어온 불교(문화)는 곳곳에 석굴사원을 만들도록 했다.
쿠차의 키질, 쿰트라 석굴, 투르판의 베제크릭 석굴, 돈황의 막고굴, 난주 병령사 석굴, 천수 맥적산 석굴, 경양 북석굴사, 낙양의 용문석굴, 대동의 운강석굴 등이 실크로드 도상(途上)에 조성된 대표적 예다.
중국에 현존하는 수많은 석굴 가운데 낙양 용문석굴, 돈황 막고굴, 대동 운강석굴을 흔히 ‘중국 3대 석굴’로 꼽는다. 세 석굴 모두 위진남북조 시대(220~589)부터 개착됐다. 당시 일기 시작한 석굴 개착 열풍은 수, 당나라 때에도 계속됐다. 그러다 당나라 중엽 ‘안사의 난’(755~763) 이후 쇠퇴했다. 석굴이 조영되려면 ‘평화와 재부(財富)’가 필요한데, 안사의 난 이후 송나라 말까지 근 400년 동안 회수 이북 북방에선 전쟁이 그칠 날이 거의 없었다. 반면 이 시기(755~1279) 사천성 지방은 전쟁의 피해가 없었기에, 석굴 조영 사업은 계속될 수 있었다. 광원, 파중, 낙산, 안악, 대족석굴 등 당나라 후반기, 이후를 대표하는 석굴사원이 사천성 일대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막고굴, 운강석굴과 함께 중국 3대석굴에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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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수많은 불상과 석굴로 이루어진 용문석굴 전경. |
특이하게도 중국의 석굴은 주로 북방에 있다. 황하를 따라 곳곳에 석굴이 있다면, 양자강과 황해에 연한 연해지방엔 자연 암벽에 부처님을 새긴 마애불이 많다. 그래서 흔히 북방의 것은 ‘석굴’로, 남방의 것은 ‘마애(磨崖)’로 표현한다. 북방에 석굴이 많은 이유에 대해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한제 교수는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사계절출판사)에서 “남방인들이 인간 사회를 초월하려는 철학적 자세를 갖고 있었던 데 비해, 북방인들은 현세의 이익과 사후(死後)의 안락을 기진(寄進)으로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2002년 10월8일 오전 8시30분. 이수(伊水)에 낀 자욱한 안개를 바라보며 용문석굴에 들어갔다. 낙양시 남쪽 13km 지점, 북쪽으로 흐르는 이수를 사이에 두고 서쪽의 용문산과 동쪽의 향산 암벽 위, 1km 거리에 걸쳐 조성된 용문석굴은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용문석굴은 북위 효문제(471~499)가 낙양으로 천도한 493년 이후부터 개착되지 시작해 선무제 때 본격적으로 조영됐다. 이후 동위, 서위, 북제, 수, 당, 송 등 여러 왕조를 거치며 끊임없이 개착됐다. 자료에 의하면 현존하는 굴감(窟龕)이 2,345개, 비각제기(碑刻題記)가 2,800여 편, 불탑이 40여 기, 조상(彫像)이 14만여 위(位)나 된다. 14만여 위의 조상(彫像) 가운데 북위 시대의 것이 30%, 수, 당대의 것이 60%, 기타가 10%를 각각 차지한다.
북위 시대(386~543) 불교는 어느 시대보다 고락(苦樂)을 거듭했다. ‘3무1종’의 법난으로 불려지는 중국 4대 법난 가운데 첫 번째가 북위 때 일어났다. 북위 무제(재위 424~451) 재위 시절 일어난 법난으로 불교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무제를 이어 문성제(재위 452~465)가 즉위하자 자유로운 불교신앙을 허용하는 조칙이 내려져, 불교는 기사회생하게 됐다. 이후 불교는 어느 왕조보다는 좋은 최상의 대우를 북위로부터 받았다. “중국의 정사 24사 가운데 유일하게 도교와 함께 불교에 대한 전란(專欄)인 〈석노지〉가 마련될 정도”(박한제 교수)로 불교는 북위 왕조로부터 대접을 받았다. 불교가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본격적으로 장악한 것도 북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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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용문석굴에 있는 다양한 표정의 부처님들. |
상념을 접고 석굴 안으로 들어갔다.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정면엔 거대한 부처님이 계셨다. 굴마다 인사드리기 힘들다는 생각에 첫 번째 굴에 계신 부처님께 대표 인사를 드리기로 정하고, 삼배를 올렸다. 차갑고 단단한 돌에 무릎을 꿇고 예배했다. 일어나 찬찬히 상호(相好)를 보니 과연 정교했다. 주위에서 부처님을 협시하고 있는 보살들의 상호도 뛰어났다. 천정에 핀 연화문 역시 정교했고, 부처님 좌우에 그려진 여러 문양들도 아름다웠다. 마치 극락(極樂)에 온 듯 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옆 동굴로 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예배드리기는 그것이 더 좋았다. 굴 마다 참배하고, 안에 계신 부처님을 카메라에 담았다. 여러 굴들을 보고 용문석굴을 대표하는 봉선사동에 올랐다. 거대한 노사나불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들도 붐볐다. ‘노사나’는 “밝은 빛이 태양처럼 널리 세계를 비춘다”는 광명보조(光明普照)라는 뜻. 속설에 따르면 노사나불은 당나라의 실력자 측천무후(624~705)를 모델로 조성됐다고 한다.
노사나불 좌우엔 평생 부처님을 시봉한 아난존자(부처님 오른쪽)와 가섭존자(왼쪽), 아난존자와 가섭존자 옆엔 보살들이 서서 노사나불을 협시하고 있다. 그 옆엔 두 천왕(天王)과 두 역사(力士)가 위엄스런 표정과 몸짓을 한 채 부처님을 옹위하고 있었다. 당나라 때 조성된 부처님과 보살님, 신장들이 천년이 지난 지금도 자태를 흐트리지 않고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는 사실에 감동됐다.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모두 9분. 이들로 구성된 봉선사동의 구존대불(九尊大佛)은 당나라 시절의 군주, 궁비의 가사를 입고 있는 듯하다.
“봉선사洞 노사나불 모델은 측천무후”
2시간에 걸쳐 용문석굴을 일별(一瞥)하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어떤 불상’이 가장 많을까가 궁금했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고 마음이지만, 아직은 상(相)에 집착하는 우매한 중생인지라 ‘무슨 부처님이 가장 많이 조성됐는지’가 궁금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 조상기가 남아있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분석한 자료 - 아미타불이 가장 많았다. 〈도표 참조〉. 다음으로 관세음보살, 석가모니 부처님, 미륵부처님 순이었다. 서방정토에 계시는 아미타불이 가장 많이 조성됐다는 것은 “현세의 고통을 극복하고, 내세에서 즐거운 인생을 희구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 아닐까. 관세음보살도 많이 조성됐다는 것에서 “현실의 괴로움마저 부처님 힘에 의지해 극복하고픈 중생들의 작은 마음도 많았다”고 읽는다면 지나친 것일까.
지금도 그렇지만 북위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현재와 미래의 안녕(安寧)이었으리라. 왕족과 귀족은 그들 나름대로 현세의 즐거움이 내세에도 이어지길 기대했고,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현실은 비록 힘들지만 내세엔 보다 편안한 삶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의 마음은 용문석굴에 그대로 투영돼,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가장 많이 조성하는 것으로 귀결됐으리라. 사바세계는 항상 허망하고 집착하는 세계지만, 그곳에서 한 걸음만 벗어나면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고대 중국인들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여전히 탐욕과 집착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반드시 다시 한번 더 용문석굴에 오겠다”고 다짐하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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