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日本) 도쿄[동경(東京)]도(都) 다이토[대동(台東)]구(區)의 센소지[천초사(淺草寺)]에 소장(所藏)되어 있는 이 작품(作品)은 고려 후기(高麗 後期)에 비단(緋緞)에 채색(彩色)하여 그린 142.0㎝ × 61.5㎝ 크기의 불화(佛畵)로서 불법(佛法)을 구(求)하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여러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다가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는다는 내용(內容)을 그렸음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란 이름은 달이 높이 떠올라 휘영청 밝은 가운데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물가 벼랑 위에 앉아서 선재동자(善財童子)에게 법(法)을 설(說)한다고 붙은 것이지만, 은은(隱隱)한 녹색(綠色)의 커다란 물방울 모양(模樣)인 신광(身光) 속에 서 있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을 그린 작품(作品)이라고 하여 일명(一名) ‘물방울 관음(觀音)’으로도 불리고 있으며, 또한 보살(菩薩) 오른손에 버들가지, 곧 양류(楊柳)를 들었다고 하여 일본(日本)에서는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라고도 부르고 있음
대부분(大部分)의 작품(作品)이 작가 미상(作家 未詳)으로 알려져 있는 가운데, 이 그림만큼은 비록 연대(年代)는 없으나 화면(畵面) 오른쪽에 ‘해동치납혜허필(海東癡衲慧虛筆 : ‘해동 승려(海東 僧侶) 혜허(慧虛 : ?∼?)가 그렸다’는 의미(意味)임)’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어 분명(分明)한 한국 작품(韓國 作品)임을 알 수 있고, 승려 화가(海東 僧侶)인 혜허(慧虛)가 그렸다는 사실(事實)도 알 수 있는 고려불화(高麗佛畵)의 기준작(基準作)임
또한 기존 불화(旣存 佛畵)들의 화기(畵記)에서 ‘필(筆)’의 의미(意味)가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意味)인지 혹(或)은 단순(單純)히 ‘화기(畵記)를 기록(記錄)했다’는 의미(意味)인지 다소(多少) 불분명(不分明)한 상황(狀況)에서 이 그림의 화기(畵記)는 기존(旣存)의 의문(疑問)을 분명(分明)하게 판가름해 줄 정도(程度)는 아니지만, ‘필(筆)’이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意味)로 사용(使用)된 것을 보여주는 분명(分明)한 사례(事例)로 평가(評價)받고 있음
국사 교과서(國史 敎科書)에 고려문화(高麗文化)를 대표(代表)하는 불화(佛畵)로 소개(紹介)된 이 작품(作品)은 교과서(敎科書) 등에서 고려불화(高麗佛畵)를 소개(紹介)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言及)되는 명품(名品) 중(中)의 명품(名品)이자 일본 현지(日本 現地)에서도 한 번(番)도 공개(公開)하지 않아 일본 학자(日本 學者)들조차 보기 어려운 희귀 작품(稀貴 作品)으로서 고려불화(高麗佛畵)의 백미(白眉)로 대접(待接)받고 있음
일본(日本)에 고려불화(高麗佛畵)가 많이 있다는 사실(事實)은 1967년(年) 구마가이 노부오[웅곡선부(熊谷宣夫)]가「조선불화징(朝鮮佛畵徵)」에서 그동안 막연(漠然)히 송(宋)나라 불화(佛畵)라고 알려진 70여 점(餘 點)의 불화(佛畵)가 고려불화(高麗佛畵)와 조선 초기 불화(朝鮮 初期 佛畵)라는 사실(事實)을 고증(考證)하고부터이지만 혜허(慧虛) 스님이 그린 이 작품(作品)만은 일찍부터 고려불화(高麗佛畵)의 명작(名作)으로 대접(待接)받아 왔음
하지만 이 작품(作品)이 세상(世上)에 공개(公開)된 적은 없었는데, 1978년(年) 일본(日本) 나라[내량(奈良)]현(縣) 근교(近郊)에 위치(位置)한 야마토분카칸[대화문화관(大和文華館)]에서 ‘고려불화(高麗佛畵) - 일본(日本)에 청래(請來)된 이웃나라의 금(金)빛 부처님들’이란 이름의 특별전(特別展)에 52점(點)이 선보일 때도 이 물방울 관음(觀音)은 출품(出品)되지 않았으며, 1981년(年) 아사히[조일(朝日)]신문사(新聞社)에서 발간(發刊)한『고려불화(高麗佛畵)』라는 초호화판 화집(超豪華版 畵集)에서도 이 물방울 관음(觀音)은 촬영(撮影)조차 허락(許諾)받지 못했음
2010년(年)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에서 개최(開催)한 ‘고려불화대전(高麗佛畵大展) - 700년(年)만의 해후(邂逅)’에서도 센소지[천초사(淺草寺)] 측(側)은 처음에는 출품(出品)을 거부(拒否)했다가 유물(遺物)의 존재 여부(存在 與否)만이라도 확인(確認)시켜 달라는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측(側)의 요청(要請)에 간신(艱辛)히 응(應)했는데, 이 불화(佛畵)를 꺼내 왔을 때 국립중앙박물관장(國立中央博物館長)과 학예원(學藝員)이 그림을 향(向)해 큰 절을 올리는 것을 보고 감복(感服)하여 전시회(展示會)에 참여(參與)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는 일화(逸話)가 전(傳)해오고 있음
일반적(一般的)인「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암좌(巖座)에 반가좌(半跏坐)한 모습을 보이는 것과 달리, 이 작품(作品)은 물방울 형태(形態)의 광배(光背) 안에 서 있는 자세(姿勢)로 표현(表現)되어 있는데, 1310년(年)에 제작(製作)된 일본(日本) 규슈[구주(九州)] 가가미진자[경신사(鏡神社)] 소장(所藏)의「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를 비롯하여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의 화사(畫師)인 서구방(徐九方 : ?∼?)이 1323년(年)에 그린 작품(作品)으로 일본(日本) 교토[경도(京都)] 센오쿠하쿠코칸[천옥박고관(泉屋博古館)] 소장(所藏)의「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일본(日本) 교토[경도(京都)]에 위치(位置)한 다이토쿠지[대덕사(大德寺)] 소장(所藏) 2점(點)의「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등 대부분(大部分)의 고려시대(高麗時代)「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이런 형식(形式)을 따르고 있음
온 세상(世上) 중생(衆生)의 고난(苦難)을 보살핀다는 자비(慈悲)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비단 화폭(緋緞 畵幅) 속에서 고고(孤高)한 자태(姿態)로 빛나고 있는데, 슬픈 듯 우수(憂愁)에 젖은 눈빛, 팔에 걸쳐진 채 발 아래까지 투명(透明)한 베일(Veil), 버드나무 가지를 잡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은 물론이고,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물 위를 스치는 옷자락 끝까지 흐르는 선(線)의 아름다움, 차분(差分)하면서도 단계적(段階的)인 농담(濃淡)으로 효과(效果)를 준 색채감(色彩感)은 환상미(幻想美)의 극치(極致)를 이루고 있음
특(特)히 이 불화(佛畵)는 금니(金泥)를 머리카락 한 올 짜리 붓으로 찍어 그렸으리라 추정(推定)될 정도(程度)로 그 섬세(纖細)함이 극(極)에 달(達)하는데, 그리하여 육안(肉眼)으로는 확인(確認)할 수 없고 현미경(顯微鏡)으로 확대(擴大)해야만 볼 수 있음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딛고 선 연화좌(蓮華坐)는 물 속에서 솟아나 있고, 물결무늬는 먹선(線)으로 구불구불하게 그어 잔잔하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결의 움직임을 나타내며, 발치 앞에는 꽃묶음이 솟아올라 있고, 그 앞에는 법(法)을 구(求)하기 위(爲)하여 찾아온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관음보살(觀音菩薩)을 향(向)해 손을 모으고 있음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양(兩)손을 가슴 앞까지 올려 한 손에는 정병(淨甁)을, 한 손에는 버드나무 가지를 잡고 있는 자세(姿勢)는 일본(日本) 아이치[애지(愛知)]현(縣)에 위치(位置)한 게간지[계암사(桂岩寺)]와 교토[경도(京都)]의 조쿄지[정교사(淨敎寺)] 및 도쿠가와[덕천(德川)]미술관(美術館) 소장(所藏)의「아미타팔대보살도(阿彌陀八大菩薩圖)」의 관음보살(觀音菩薩)에서 볼 수 있는 자세(姿勢)이지만, 필선(筆線)이 매우 가늘고 섬세(纖細)하며 채색(彩色)을 강(强)하게 하기보다는 차분(差分)하면서도 단계적(段階的)인 하이라이트 효과(High Light 效果)를 주려고 노력(努力)하는 점(點) 등 표현상(表現上)으로는 상당(相當)히 큰 차이(差異)를 보임
시대(時代)가 내려갈수록 표현 기법(表現 技法)과 형태(形態)가 단순(單純)․경직(硬直)․공예화(工藝化)되는 경향(傾向)을 보인다는 점(點)을 참고(參考)한다면 필선(筆線)이 세밀(細密)하고 존상(尊像)의 형태(形態)가 늘씬하고 부드러우며 색채(色彩)의 단계적(段階的)인 변화(變化)를 살린 이 작품(作品)의 제작 시기(製作 時期)는 여타(餘他)의 작품(作品)들보다 상당(相當)히 올려 볼 수 있음
참고(參考)로 관음보살(觀音菩薩)이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이유(理由)에 대(對)해서는 여러 가지 설(說)이 제기(提起)되고 있는데, 첫 번째 설(說)은 5세기(世紀) 때 중국 기록(中國 記錄)을 보면 버드나무[껍질]를 치료제(治療劑)로 썼다는 기록(記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중생(衆生)의 고통(苦痛)을 없애준다는 뜻에서 버들가지를 표현(表現)했을 것이라는 주장(主張)이고, 두 번째는 자비심(慈悲心)이 많아 병고(病苦)를 덜어주는 보살(菩薩)인 양류관음(楊柳觀音)의 중생 소원(衆生 所願)을 들어줌이 마치 버드나무가 바람에 나부낌과 같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라는 설명(說明)도 있음
하지만 가장 설득력(說得力)있는 주장(主張)이 중국(中國) 육조시대 이래(六朝時代 以來), 특(特)히 당대(唐代)에 성행(盛行)한 ‘절양류(折楊柳)’ 풍습(風習)과 관계(關係)가 있다는 설(說)인데, ‘절양류(折楊柳)’는 이별(離別)하는 사람에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주는 풍속(風俗)으로서 당(唐)나라 때 시편(詩篇)들을 보면 이런 습속(習俗)이 무수(無數)하게 발견(發見)되고 있으며, 따라서 선재동자(善財童子)에게 가르침을 준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이별(離別)의 의미(意味), 더 나아가 이별(離別)하고 다시 만나자는 의미(意味)를 담아 버드나무 가지를 그에게 꺾어준 것이라는 주장(主張)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