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오지랖 (隨筆)
지온 김인희
딸과 함께 궁남지로 산책을 나섰다. 온종일 책을 끼고 지내는 어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딸이 심심하다면서 조르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따라나섰다. 내심 어미를 위한 그 녀석의 깊은 마음을 엿보면서 염화시중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궁남지를 산책할 때마다 이구동성으로 궁남지가 우리 소유의 정원이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까르르하고 도토리처럼 웃는다. 백제의 궁성에 살면서 왕궁지를 산책하는 우리가 백제 여인의 표상이라고 고집하고 있다. 딸은 친구들에게 자신이 궁세권(?)에 산다고 자랑하고 있다.
블로그를 통하여 글쓰기를 과시하고 있는 딸은 블로그에 들어오는 애독자가 날마다 많아진다고 호들갑이다. 최근에는 숙박 관계자가 무료로 숙박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하면서 글을 요청해왔다고 한다. 그 녀석에게 ‘말이 네 안에 있을 때는 네 것이었지만 입을 통해 뱉어내거나 글로 표현해서 밖으로 표출된 후에는 상대의 것이 된다. 글을 쓸 때 특히 주의해야 한다. 사자성어나 어려운 표현은 반드시 사전을 찾아 확인하고 독자에게 긍정의 메시지를 줄 수 있는 글을 쓰면 좋겠다. 블로그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 하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거야. 너 자신을 잘 지켜나가도록 해라. 작은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자존심을 지켜나가도록 노력해라.’ 하고 돌다리를 두드리는 잔소리를 잊지 않았다. 내가 일상의 스치는 에피소드를 포착하여 詩를 쓰고 隨筆을 쓰는 것을 보고 엄마를 롤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요즘은 글을 쓰면서 표현의 한계를 느낀다고 푸념하면서 엄마가 끊임없이 독서를 하는 이유를 알겠다고 한다. 자신도 지속하여 독서를 하면서 더 노력해야겠다고 한다. 황송한 일이다!
우리는 궁남지 외곽으로 걷다가 벼 이삭이 나온 논을 발견했다. 나는 논두렁에서 한참 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주저 없이 유년 시절로 가는 타임머신에 올랐다. 봄에 모내기를 마치고 뜨거운 여름 내내 성큼 자란 벼는 바람이 차갑게 변하는 계절이오면 가슴에 품고 있었던 이삭을 꽃처럼 토해냈다. 이때쯤 불청객 태풍이 휩쓸고 간 논에서는 벼들이 사정없이 쓰러졌다. 그 논바닥에서 벼를 일으켜 세우는 아버지는 가끔 굽은 허리 펴시고 하늘을 우러렀다. 내가 아버지 옆에서 참새처럼 태풍을 원망할 때 ‘하늘이 하는 것이란다. 이렇게 네 묶음씩 세워서 묶으면 넘어지지 않는단다. 가을볕에 탐스럽게 영글어 갈 게다.’하고 아버지께서는 넉넉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폭우가 논두렁을 무너뜨렸을 때도 말뚝을 박고 단단하게 다지면서 껄껄껄 웃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하늘이었고 산이었다. 자녀가 성인이 되고 지천명을 넘긴 지금도 아버지는 여전히 눈물방울에 맺히는 그리움이다.
아버지의 오지랖은 어찌 넓었던지 가히 국제적이라 할 수 있었다. 유년 시절 작은 산골 마을에 엿장수 아저씨가 오면 넓은 우리 마당에서 오래 머물렀다. 마을 어른들은 점심때가 되어 들에서 돌아오고 그 시간을 엿장수 아저씨는 묵묵히 기다렸다. 아버지께서는 들에서 귀가해서 점심식사를 하려고 숟가락을 들었다가 대문 밖에 있는 엿장수 아저씨를 살짝 불러들인다. 엄마께서는 급하게 다시 점심상을 차리고 엿장수 아저씨께서는 민망해하면서도 고봉밥을 마파람 게 눈 감추듯 비우셨다. 다음 날 아침 부엌에서는 어김없이 엄마의 푸념이 음악처럼 들렸다. ‘당신은 차린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더 올리면 된다고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들에서 일하다가 부랴부랴 와서 밖의 손님 밥상을 차려내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더구나 시골에서 변변한 반찬 없이 내놓는 밥상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른다. 앞으로는 제발 그렇게 사람 불러들이지 마라.’ 등등 엄마의 잔소리는 끝없다. ‘미안하지만 타지에 와서 때를 거르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나. 그것을 어찌 보고만 있어. 우리가 선을 쌓으면 우리 애들 앞날이 잘 될지 누가 아는가.’하고 그 순간만큼은 떵떵거리던 아버지 목소리는 고요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우리 마을에 오는 엿장수 아저씨와 보따리 생선장수 아주머니와 뻥튀기 아저씨 밥상을 차려내는 일은 다반사였다. 언젠가는 집에 밥이 없어서 할머니 댁에 달려가서 얻어온 적도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엄마의 푸념에 할머니의 푸념을 얹어 배로 들어야 했다.
그런 아버지의 오지랖이 국제적으로 된 에피소드가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이른 봄이었다. 보리밭에서 겨울을 이겨낸 아기 보리싹들이 봄바람에 파르르 떨고 있었다. 등굣길에 눈에 들어오는 산비탈에 있는 진달래나무에 맺힌 작은 꽃봉오리를 볼 수 있었다. 논두렁에서 고개 내밀던 쑥들이 날마다 숫자가 늘어가고 있었다. 내가 툭툭 차 버린 돌이 노란 민들레 꽃을 때릴 뻔했던 아직은 손등에 와 부딪히는 바람이 차가웠다. 겨울이 마지막 미련을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했던 초봄이었다. 학교에서 오후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행기 굉음이 들리고 동시에 학교건물이 흔들리고 몇 개의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났다. 방과 후 우리 마을에 미군 헬리콥터가 추락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른들께서는 마을을 비켜 야산에 추락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그날부터 아기 보리싹들이 파릇파릇하게 춤을 추던 보리밭은 헬리콥터가 내려앉고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소가 되었다. 헬리콥터가 추락한 야산 둘레로 금줄이 쳐지고 일정한 간격으로 총을 들고 미군이 서 있었다. 그들은 헬리콥터가 추락한 야산을 수색해서 사고의 잔해를 찾아 모으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밤마다 미군이 있는 텐트로 장작을 지게로 날랐다. 마을 어른들께서는 덩치 큰 코쟁이라고 하면서 거리를 두고 흑인 미군을 슬슬 피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께는 그들은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가여운 사람들이었다. 주위의 만류를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장작을 날랐다. 어느 날 밤에 미군 아저씨 두 명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엄마께서는 소리 없이 장독대로 피하셨고 미군 아저씨들이 아버지께 봉투를 내놓았다. 아버지께서 몸짓 언어로 급구 사양하여 돌려보낼 때 나는 그 봉투 안에 돈이 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다음날 우리 집 대청에 가득 쌓여있는 종이상자를 보았다. 미군 아저씨들이 봉투를 거절한 아버지께 준 선물이었다. 우리는 날마다 선물상자를 열어서 초콜릿과 과자를 먹고 아버지께서는 커피를 드셨다. 그때부터 커피는 아버지의 기호식품 1호가 되었다. 이른 봄에 산비탈에서 작은 꽃봉오리를 간직했던 진달래가 함지박 미소를 지을 때 미군 아저씨들은 사고 수습을 마치고 우리 마을을 떠났다.
어쩌면 아버지께서는 맹자를 추종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께서 어렸을 때 서당에 다니셨다고 했다. 아버지 침대 옆에는 늘 표지가 닳아서 얇아진 한문책이 몇 권 놓여 있었다. 마을 애경사가 있을 때 봉투를 써달라고 부탁해 오는 아주머니들께 한문으로 봉투를 써 주시던 아버지를 기억한다. 우리 남매를 향하여 항상 정직하고 선하게 살라고 당부하셨다. 절대로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아버지께서는 선을 지향하면서 철저하게 이타적인 삶을 살았다. 아버지께서 맹자를 추종했겠다는 추측은 틀림없겠다는 사실로 굳어진다. 아버지의 삶 자체가 효와 인성의 교과서라고 깨닫는다.
갑자기 딸아이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재촉한다. ‘엄마, 벼 이삭 나온 것이 그렇게 신기해요? 아, 맞다. 엄마는 농부의 딸이었지. 그래서 감수성에 풍덩 빠졌지요? 아마도 백 프로 외할아버지를 생각했겠네요.’ 산책로에서 만난 벼 이삭에 절절한 사부곡(思父曲)을 읊조렸다. 오늘은 딸아이와 밤이 깊도록 아버지의 오지랖 에피소드를 가지고 이야기꽃을 피울 것이다.
첫댓글 부녀간의 인연이 소중한 글제가 되었군요
오지랍이 인성의 표본임을 다시 깨닫게 해 주시네요
넉넉함이 묻어나는 아버지의 오지랍!
추석명절 의 사부곡이군요
고맙습니다.
멈출 수 없는 노래.
思父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