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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는 중산(中山)의 줄기에서 내려온 꾀꼬리봉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평전산(平田山)이, 서쪽으로는 다원동산이 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남으로는 넓은 들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마을 앞으로 북천(北川)이 흘렀으나 지금은 다원들 건너편으로 흐른다.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조건을 갖춘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꾀꼬리봉의 아래쪽에 다원 1구.2구가 위치하고 있고, 평전산 기슭에 죽남동(竹南洞)이 있다. 다원들 가운데에 율전동(栗田洞)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 앞으로 국도 24호선이 동.서로 통과하고 있어서 교통도 편리한 곳이며, 남쪽으로 트여 있는 마을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죽동(竹東), 죽서(竹西), 죽남(竹南), 율전(栗田) 등을 병합하여 다원리(茶院里)라는 법정리를 이루었다. 일제 시대 말기에 죽남(竹南)과 율전(栗田)이 죽동(竹東)에서 분동이 되었다. 1965년에 행정리를 조정하면서 다원 1구.2구, 죽남(竹南), 율전(栗田) 등으로 나누어졌다. 자연 부락도 다원 1구.2구, 죽남동, 율전동 등 4개동으로 이루어졌다. 또 산외면사무소와 경찰지서 등이 있어서 산외면(山外面)의 행정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금곡리(金谷里), 서쪽으로는 남기리(南沂里), 금천리(琴川里)와 인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꾀꼬리봉을 경계로 하여 엄광리(嚴光里), 금곡리(金谷里)와 인접해 있다.남쪽으로는 단장천을 사이에 두고 단장면(丹場面)과 면계를 이룬다. 유적지로는 다죽리(茶竹里) 지석묘(支石墓)군과 고분군(古墳群), 모당천(毛唐泉), 혜산서원(惠山書院), 죽원재사(竹院齋舍) 등이 있다.
(1)다원 1구(茶院 1구, 죽원(竹院), 다원(茶院), 죽서(竹西))
꾀꼬리봉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서 옛 이름은 죽원(竹院)이며, 일명 다원(茶院)이라고도 한다. 죽원(竹院)이라고 한 것은 이 마을의 동쪽에 있는 평전산(平田山) 기슭에 죽림(竹林)이 무성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또 다원(茶院)이라고 한 것은 다(茶)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이 차(茶)나무는 보두(步斗)라는 중이 중국에서 갖고 와서 엄광사의 주변에 재배하였다고 하는데, 이 마을까지 번식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 지는 알 수 없다. 다원들 가운데 있었던 지석묘군과 평전산 기슭에 있는 고분군 등이 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문헌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잘 알 수가 없다. 조선 시대에는 죽원(竹院)이라고 했는데, 흔히 다원(茶院)이라고 불리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 죽원(竹院)이 죽동리(竹東里)와 죽서리(竹西里)로 방리가 나누어졌다. 지금은 산외면사무소(山外面事務所)를 중심으로 해서 동쪽은 죽동(竹東), 서쪽은 죽서(竹西)로 나누고 있는데, 다원(茶院) 1구는 죽서(竹西)에 해당된다.
이 마을에 있는 모당천(毛唐泉)의 사적으로 보아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이미 모씨(毛氏)와 당씨(唐氏)가 입촌(入村)하여 살았다고 전하나 그 사적은 알 수가 없다. 또 밀성박씨(密城朴氏) 일파(一派)가 입촌(入村)하여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조선조 중기에 진사(進士) 손호(孫顥)가 이 마을에 입촌한 후 일직손씨(一直孫氏)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재사(齋舍)로는 영모재(永慕齋) 손호(孫顥)가 이 마을에 입촌한 후 후진(後進)의 계도(啓導)를 위한 강습소(講習所)로 정우헌(淨友軒)을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753년에 창건한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를 봉안(奉安)한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있었는데, 1868년 조령(朝令)으로 훼철된 후 서산고택(西山古宅) 또는 철운재(徹雲齋)로 편액하였다. 1971년에 구원(舊院)의 경역(境域)을 확장 정비하고 각지에 분산분산(分散分散) 봉안(奉安)되었던 일직손씨(一直孫氏) 명현(名賢)의 다섯 서원(書院)을 후손(後孫)들의 세거지(世居地)인 이 곳으로 옮겨 복원(復元)하고 혜산서원(惠山書院)으로 중건하여 보존하고 있다. 또 서원(書院)의 경내에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 신도비각(神道碑閣), 다원서당(茶院書堂), 이이정(怡怡亭) 등이 있다. 또 손응룡소구정사(孫應龍所構亭舍)인 경선재(敬先齋), 문암(門巖) 손석관(孫碩寬)의 강학소(講學所)인 문암초려(門巖草廬), 양진당(養眞堂) 손순룡(孫舜龍)의 은거서식소(隱居棲息所)였던 양진당(養眞堂), 손기옥(孫基玉)의 추모재사(追慕齋舍)인 동산정(東山亭) 등이 각각 보존되고 있다.
■ 새터
절터골 앞에 있는 마을이다. 새로 생겼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사안대(謝安臺)
죽서(竹西) 마을 북쪽 새터 앞에 흙으로 높직하게 쌓아 올린 대(臺)를 말한다. 옛날 이 마을 어른들이 이 곳에 대(臺)를 쌓아 이 마을의 학도(學徒)들로 하여금 여기에 올라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고, 중국(中國) 동진(東晋) 때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한 재상(宰相)으로 인품이 뛰어난 사안(謝安)과 같은 인품을 닦으라는 뜻에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 동산(東山, 사안동산(謝安東山), 다원동산(茶院東山), 연주산(連珠山))
죽서(竹西) 마을의 입구에 있는 산이다. 사안동산(謝安東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사안대(謝安臺)의 부근에 있는 산이라고 하여 붙인 지명이라고 한다. 다원동산이라고 한 것은 다원 마을 앞에 있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며, 연주산(連珠山)이라고 한 것은 이 산의 3개 봉우리가 구슬을 이어 놓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인 지명이다. 또 이 산의 아래쪽에 조대(釣臺)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 곳에 있는 행랑소에서 낚시를 했다고 한다.
■ 행랑소(行廊沼)
죽서(竹西) 마을 입구에 있었던 沼이다. 옛날에 동천(東川)이 이 마을 앞으로 흐를 때 마을 입구에 있는 다원동산 아래쪽에 깊은 沼가 있었는데, 마을과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행랑에 가는 거리 쯤 된다는 의미에서 붙은 지명이다.
■ 터짐이
다원 1구 마을 앞 도로변 밑에 있는 모퉁이 둑으로 행랑소의 아래쪽에 있었다. 이 곳에서 단장천까지 도랑이 있었다. 다원 뒷산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의 양이 많아서 장마가 지면, 이 모퉁이 둑이 잘 터진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앵무배미
행랑소의 아래쪽 둑을 따라 남서 방향에 있던 논이다. 옛날 살내에서 다원으로 시집온 신부가 앵과 무라는 몸종을 데리고 왔는데,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재산으로 산 논이라고 하여 몸종의 이름을 따서 앵무배미라고 했다고 한다.
■ 송곳방우
꾀꼬리봉(앵봉(鶯峰)) 밑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의 모양이 송곳같이 뾰쪽하게 생겼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 벼락방우
송곳방우 밑에 있는 바위이다. 벼락을 맞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 양덕골(陽德谷)
죽서(竹西) 마을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남기리(南沂里) 양덕(陽德) 마을로 넘어 가는 양덕고개가 있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무시묵골
양덕골과 절터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 절터골
새터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무시묵골과 서나무골 사이에 있는데, 옛날부터 절터가 있었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지금도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옛날 이 곳에 西山古宅이 있었다고 하며, 또 이곳에 부치샘이 있는데 물맛이 좋다고 한다.
■ 서나무골
절터골과 갓골짝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곳에 서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붉은방우
서나무골 중턱 산기슭에 있는 바위이다. 이 바위에 붉은 이끼가 많아서 붉게 보인다고 해서 붙인 지명이다,
■ 서늘방우(시원한 바우, 시원은바우)
붉은방우의 위쪽에 있는 바위이다. 이 곳에 앉으면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라도 시원하다고 해서 시원한 바우 혹은 시원은바우라고 한다.
■ 마당방우
서늘방우의 위쪽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가 마당같이 넙적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인 지명이다.
■ 갓골짝
서나무골과 제사등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주변의 산세가 갓(冠)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무등(武嶝)
서나무골과 갓골짝 사이에 있는 산등성이다. 산세가 마치 묘(墓)를 닮았다고 해서 붙인 지명이다.
■ 감태방우
갓골짝의 위쪽 산기슭에 있는 바위이다.
■ 앞내길
다원 행랑소를 출발하여 다원들, 신기동으로 해서 범머리 나루터를 건너, 살내 마을 앞으로 해서 살내다리를 통해서 영남루 기슭으로 가는 길이다.
■ 뒷내길
다원에서 외우를 지나 정문(貞門), 긴늪, 범북, 교동(校洞)으로 해서 밀양시내(密陽市內)로 가는 길이다.
■ 석전놀이(石戰놀이)
매년 정월 보름날이 되면 죽동(竹東), 죽서(竹西) 마을 사람들이 편을 갈라 달맞이를 하며 행했던 돌팔매질 놀이를 말한다. 이 날 오후가 되면 죽동(竹東) 마을 사람들은 다원(茶院)들 가운데에서, 죽서(竹西) 사람들은 행랑소 앞 터짐이 둑 앞에서 각각 달집을 짓고 농악(農樂)을 울리며 돌팔매질 놀이를 했는데, 석전(石戰)이 오래 계속되면 마을 어른들이 중간에 들어서서 화해를 시키고 다친 사람들이 있으면 서로 위문하면서 일년 내내 마을의 평안을 빌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 놀이도 사라진 지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2) 다원 2구(茶院 2구, 죽원(竹院), 다원(茶院), 죽동(竹東))
평전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옛 이름은 죽원(竹院)인데, 흔히 죽서(竹西)와 함께 다원(茶院)으로 불리워졌다. 조선조 후기에 죽동(竹東), 죽서(竹西)로 방리(坊里)가 분동(分洞)이 되었다. 행정리동명은 茶院 2구이다.
이 마을에 조선조 초기에 생원(生員) 손겸제(孫兼濟)가 입촌(入村)한 후 밀성손씨(密城孫氏)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재사(齋舍)로는 오한(오漢) 손기양(孫起陽)을 향사(享祀)하는 별묘(別廟)의 치재소(致齋所)인 죽원재사(竹院齋舍)와 죽포(竹圃) 손사익(孫思翼)의 강학소(講學所)인 죽포정사(竹圃精舍)가 각각 보존되고 있다.
■ 모당천(毛唐泉, 모당샘)
죽동(竹東)의 죽원재사(竹院齋舍) 바로 밑에 있는 고정(古井)이다. 중국(中國) 원(元)나라 말기에 병란을 피해 이 곳까지 온 모씨(毛氏)와 당씨(唐氏)가 거주하며, 그들의 食水를 위해 팠던 샘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당(毛唐)샘 혹은 모당천(毛唐泉)이라고 한다. 지금도 샘 가에 있는 돌에 모당천(毛唐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리 나라에 살고 있는 당씨(唐氏)들 중에 밀양(密陽)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사람들은 이 때 이 마을에 온 사람들의 후손들이라고 전한다.
■ 영산들. 예안들
죽동(竹東) 마을 앞 넓은 들 가운데에 부분적으로 붙여진 들 이름인데, 지금 산외면사무소(山外面事務所) 앞에 있는 들을 예안들, 그 아래 남쪽에 있는 들을 영산들이라고 한다. 영산들, 예안들이라고 한 것은 옛날에 이 마을로 시집온 신부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재산으로 산 논이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즉 영산에서 시집온 신부가 산 논을 영산들, 예안에서 시집온 신부가 산 논을 예안들이라고 불렀다.
■ 영산다리
죽동(竹東) 마을에서 영산들로 가는 곳에 봇도랑이 있었고, 이를 건너기 위해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영산들에 있었기 때문에 영산들다리라고 한다. 이 말이 줄여져서 영산다리라고 불렀는데, 길고 큰 두 개의 돌로 만들었다고 한다.
■ 딸개방우산(달개바우산)
죽동(竹東) 마을의 동쪽 평전산(平田山)의 남록(南麓) 끝 부분에 있는 산이다. 이 산 위에 여러 개의 바위가 있는데, 그 중에서 달개비를 닮은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날끝다리
딸개방우산의 아래쪽에 있었던 다리이다. 옛날 이곳으로 북천수(北川水)가 흐를 때는 나루터였다고 한다. 딸개방우산의 끝 부분이 보습의 날과 같이 뾰쪽하게 생겼다고 하여 날끝이라고 부르고, 이 곳에 있었던 다리라고 해서 날끝다리라고 한다. 또 죽동에서 이 곳을 통과하여 죽남으로 가는 모롱이도 날끝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경지정리 사업으로 다 매몰되었다고 한다.
■ 돌배기논
다원들 가운데에 띄엄띄엄 여러 개의 넙적한 바위가 논에 박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바위가 넙적해서 5-6명 이상 앉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지정리 때문에 다 매몰되었다. 또 이 논에 있는 바위를 농띠방우라고도 하는데, 마치 농(籠)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 장군석방우
돌빼기논에 여러 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두 개의 바위를 손대장군(孫大將軍)방우, 박대장군(朴大將軍)방우라고 부른다. 옛날에 두 장군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면서 이 바위를 던졌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이는 지석묘로 추정되며, 지금은 경지정리 때문에 모두 다 매몰되었다고 한다.
■ 칠리탄(七里灘)
재약산(載藥山)의 영정(靈井)물, 호거산(虎距山)의 구연(臼淵)물, 단장면(丹場面) 고사산(姑射山)의 용연(龍淵)물이 각각 흘러 내려와 경주산(競珠山)의 아래쪽에서 합류(合流)하여 칠리(七里) 쯤에 있는 등연(燈淵)까지 여울져 흐른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라고 한다. 또 일곱실(七谷)에서부터 칠탄정(七灘亭)의 위에까지 약 7리를 여울져 흐른다고 하여 칠리탄(七里灘)이라 불렀다고 한다. 산동(山東) 지방의 7개소의 냇물, 즉 梨川(배내), 九川(귀내), 국전천(菊田川), 안법천(安法川), 구만천(九萬川)(산내면(山內面) 봉의리(鳳儀里)), 구연수(臼淵水), 발례천(發禮川)(산내면(山內面) 임고리(臨皐里)) 등의 냇물이 모여 흐르는 곳이라고 하여 칠탄(七灘)이라고 한다.
■ 등잔소(燈淵)
칠탄정(七灘亭)의 아래쪽에 있는 약 100m 지점을 가리킨다. 이 곳에 큰 바위가 있고, 그 아래쪽에 소(沼)가 있었는데, 낚시하는 사람들이 밤이 되는 줄도 모르고 계속하다가 등불을 켜고 밤늦도록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다 매몰되었다고 한다.
■ 물방우골
죽원재사(竹院齋舍)의 뒤에 있는 골짜기로서, 이 곳에 고래장터가 있었다고 하며 토기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 당산껄
죽원재사(竹院齋舍) 뒤에 큰 노송(老松)나무가 있는 일대를 말한다. 이 나무가 당산(堂山)나무로 매년 정월 초닷세날에 이 노송(老松)에 당산제(堂山祭)를 지내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 징이갓(징갓)
죽원재사(竹院齋舍) 뒤 재사등(齋舍嶝)의 아래쪽에 있다. 옛날 죽동(竹東) 마을에 질 좋은 징이 있었는데, 그 소리가 유난히 아름답고 멀리까지 울려서 이를 탐내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징을 도둑맞을 것에 대비해서 은밀한 곳에 묻어 두기로 했는데, 그 곳을 징이갓이라고 한다. 뒷날 이 곳에 묻어 두었던 징은 강바위라는 자가 훔쳐갔다고 전한다.
■ 솔찜이밭
뭉개방천 앞에 있는 들이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옛날 애장(兒葬)터가 있었던 곳이다.
■ 뭉개방천
솔찜이밭의 위쪽에 있었던 방천(防川)이다. 장마 때마다 동천(東川)이 넘쳐 방천이 잘 무너진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 중국인이 이 곳에 살면서 제방을 쌓은 뒤로 잘 견디었다고 한다. 1959년 태풍 때 다시 무너졌다고 한다.
■ 이망쟁이밤밭
뭉개방천 아래쪽 방천 넘어 하천 안쪽에 있었던 밤밭이다. 밤밭 주인이 대머리였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라고 한다.
■ 잇따리목
단장면(丹場面) 미촌리 쪽에 있는 우수비알의 아래쪽 하천가에 징검다리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이 다리는 다죽리(茶竹里) 사람들이 우수비알에 소를 방목(放牧)하기 위해서 다니기도 했으며, 단장면(丹場面) 구미, 사촌리 사람들이 밀양장으로 다닐 때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 계법보(桂法洑)
금곡교(金谷橋)에서 단장면 미촌리로 돌아가는 산 모롱이에서 단장천에 걸쳐 있는 보(洑)이다. 보(洑)머리는 금곡(金谷)들 쪽에 있다. 이 보는 단장천에서 흐르는 물을 막아 다원들에 물을 댄다.
■ 신청천터(申靑泉基)
죽원재(竹院齋)와 딸개방우산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골짜기에 있는 샘이다. 옛날 신청천(申靑泉)의 어머니가 청천(靑泉)을 임신한 후부터 샘물이 말랐다가 열 달이 지나 그가 출생하자마자 샘물이 다시 솟아 나왔다고 한다. 이를 연유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청천(靑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 샘을 신청천이라고 한다. 밀주지(密州誌)에 신청천(申靑泉)의 아버지인 신일성(申日省)의 기록이 있으며, 그 후 이들은 합천(陜川)으로 이거(移居)하였다고 한다.
■ 재사등(齋舍嶝)
갓골짝의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이 곳에 죽원재사(竹院齋舍)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 등(嶝)의 아래쪽에 징이갓이 있다.
■ 당산나무껄
죽동(竹東) 마을에서 율전(栗田)으로 가는 한 중간 들 복판에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이 곳을 당산(堂山)나무껄이라고 한다. 즉 돌빼기논 밑쪽이 된다.
■ 고래들(古來坪)
당산나무껄에서 밤밭쪽으로 걸쳐 있는 들이다. 이 곳에는 물이 많이 괴어 있었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감말리논
고래들과 솔찜이밭 사이에 있는 논이다. 가뭄을 많이 타기 때문에 붙인 지명이다.
(3) 죽남동(竹南洞)
다원(茶院) 2구의 동쪽 평전산(平田山)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죽남(竹南)이라고 한 것은 다죽리(茶竹里)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인 지명이다. 일제 시대에 죽동 사람들이 이 곳에 농막(農幕)을 짓고, 영농 관리를 하면서 한 두 집이 입주하여 정착한 후에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원래는 죽동(竹東)에 소속된 마을이었는데 일제 말기에 율전(栗田)과 함께 분동(分洞)이 되었다. 행정상으로는 죽남동(竹南洞)이라고 한다. 지금은 윗각단, 아래각단 등 두 땀으로 나누어져 있다.
■ 죽남다리(竹南橋)
죽남(竹南) 마을에서 괘법보로 가는 길목에 큰 봇도랑이 있는데, 이 곳에 놓인 돌다리이다.
■ 탑골보(塔谷洑)
죽남(竹南) 마을 앞 다리 밑에 있는 보(洑)이다. 금곡리의 여러 산골짜기에서 물이 내려 오는데, 이 물을 받아서 죽남 앞들에 관개하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 탑골들
죽남(竹南) 마을 앞 들이다. 탑골보의 물을 받아 농사를 짓기 때문에 붙은 지명이다.
(4) 율전(栗田)
다원(茶院)들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다. 다원밤밭 혹은 밤밭이라고 부른다. 이 곳에는 옛날부터 밤밭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 곳에서 생산된 밤을 관청에서 사용했기 때문에 관율수(官栗藪)라고 한다. 이 마을의 서남쪽을 아래밤밭이라고 했는데, 이 곳에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1959년 태풍 때 모두 떠내려 가고,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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