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의 딜레마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통치제도인 왕정의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말이 아니라 두 세대에 걸쳐 왕을 세운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사무엘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진 인물은 사울과 다윗이다.
흔히 사울은 사람에 의해 선택된 왕이고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왕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사울은 실패한 왕이고 다윗은 성공한 왕으로 소개된다.
그만큼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멘토인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무엘은 어떤 인물일까?
사무엘의 고향은 에브라임 산지의 “라마다임소빔”이다.(삼상1:1)
간단하게 라마로 부르기도 한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각 지역을 순회하며 백성들을 지도한다.
그 순회지역 가운데 하나가 곧 라마이다.(삼상7:17)
라마 외에도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에서 백성들을 다스렸다.(삼상7:16)
라마는 신약시대에 아리마대로 불리게 된다.
아리마대는 예수님의 시신을 새로 판 무덤에 안장했던 아리마대 요셉의 고향이기도 하다.(마27:57)
라마와 아리마대, 그리고 사무엘과 요셉은 시대를 넘어 다윗 가문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던 사무엘과
다윗의 자손으로 영원한 왕 되신 예수님을 장사지낸 요셉이 같은 고향 사람인 셈이다.
사무엘의 출생에 대해 알아보자.
그의 부친은 엘가나였다.
그런데 엘가나에겐 브닌나와 한나라는 두 아내가 있었다.
브닌나에겐 자녀가 있었지만 한나에겐 자녀가 없었다.
비록 엘가나의 사랑은 극진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한나의 허허로움은 더해만 간다.
엘가나는 레위인이었기에 매년제를 성막이 있는 실로로 올라가 행하였다.
그럴 때마다 엘가나는 가족 모두를 대동하고 올라갔다.
그런데 가족들에게 나눠준 제물의 양을 보면 엘가나가 한나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곧 한나에게는 두 몫을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엘가나의 행동이 브닌나로 하여금 분통을 터트리게 한다.
남편에게 직접적으로 화살을 쏘아댈 수는 없는 터이므로 모든 비난은 결국 한나에게 쏟아진다.
한나는 브닌나가 격동하게 한 그 사실 때문에 더욱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엘가나는 한나에게 자신이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며 위로한다.
엘가나의 이런 편향적 아내사랑이 브닌나를 힘들게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하나 숨겨져 있다.
브닌나는 무엇 때문에 한나를 그토록 괴롭혔을까?
그리고 브닌나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한나가 대들지 아니하고 그저 운 까닭은 무엇일까?
그런데 브닌나의 격동과 한나의 울을 속에 사사시대가 지닌 어두운 일면이 감추어져 있음을 알고 있는가?
브닌나의 격동은 그저 시샘으로 치부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브닌나는 하나님의 법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음에 대한 저항이었다.
물론 그 화살은 남편인 엘가나에게로 향해야 옳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렇다면 당연히 그 화살은 고스란히 한나에게로 쏟아질 것이다.
문제는 브닌나의 처사에 대한 한나의 행동이다.
한나는 그저 우는 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아니 그 울음을 통해 브닌나가 자신을 괴롭혔다는 사실과 자신이 힘들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결과적으로 남편의 사랑고백을 다시금 받아내며 아내의 위치를 공고히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한나의 반응이 정당하냐는 것이다.
한나는 브닌나의 완강한 처사에 반발하지 못한 채 우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더구나 그러한 브닌나의 행동에 대해 남편인 엘가나조차 속수무책으로 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러한가?
이 이야기 속에 숨겨져 있는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기억할 것은 브닌나가 첩이 아니라 한나와 마찬가지로 정실부인이란 것이다.
비록 남편의 사랑은 한나에게로 쏟아지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브닌나에겐 자녀가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매년제를 드리기 위해 가족을 대동하고 실로로 올라가면서
한나에게 두 몫의 제물을 나눠준다는 점이다.
브닌나의 격동은 여기에 있다.
왜 한나에게 두 몫의 제물을 주느냐고 항거하는 것이다.
그 두 몫의 제물은 사실은 자신의 것인데 왜 자신의 것을 한나에게 주느냐는 것이다.
브닌나의 저항은 정당한 것이다.
비록 미워하는 아내가 낳은 아들일지라도 그가 장남이면 그에게 장남의 몫을 주어야 함이 율법의 선언이다.
장자권은 사랑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없는 하나님의 질서라는 명백한 선언인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위인인 엘가나가 그 하나님의 율법을 외면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따로 세우신 지파가 레위지파인데 그 레위지파의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비록 사사시대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가 서질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브닌나의 그 정당한 저항은 언제나 한나에 대한 남편의 지극사랑으로 덮여지곤 하였다.
브닌나의 그 정당한 발언에 비록 남편이라도 함부로 할 수는 없기에
그저 한나를 위로하는 것으로 대신할 따름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나에게 있다.
한나가 정말로 믿음이 신실한 여인이었다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두 몫의 제물을 주는 남편의 사랑은 받아야 되겠지만
그 제물은 받을 수 없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을 수 있어야 한다.
자녀가 없다는 사실이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면서까지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한나의 믿음은 반듯한 믿음이 아니라 그 시대의 보통 여인들과 동일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몫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눈물로 슬쩍 넘어가는 부정직의 마음까지 보이고 있다.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하게 한 그 상황은 정당한 것이었다.(신21:15-17)
따라서 한나의 올바른 행동은 두 몫의 제물을 돌려주고 질서를 바로 잡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나는 모든 여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무기인 눈물을 통해 이 모든 사실을 감추고 만 것이다.
따라서 사실은 적어도 그 사건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질서의 파괴에 있다.
아무리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사사시대라고는 하지만
레위인이라면 그 무너진 법질서를 바로 잡아야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브닌나는 어둠의 시대에 하나님의 법질서를 바로 적용할 것을 온몸으로 요구했던 그 시대의 불꽃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대세는 브닌나가 아닌 한나에게로 기운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브닌나가 낳은 아들의 몫인 그 제물로 드려진 한나의 기도,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들으신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한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반응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실 “때가 찼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사기와 룻기, 그리고 사무엘서는 모두가 사사시대를 반영한다.
사사기를 통해 사사시대의 전체적 줄거리와 주제가 무엇인지 확인하게 된다.
룻기를 통해서는 그 시대에 통용된 고엘의 제도에 대해 보여준다.
고엘제도가 이스라엘의 확고한 상속제도라면 그 만큼 양자제도에 의한 부분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독특한 상속제도의 보완점이다.
과연 사무엘은 어떤 사람인가?
한나의 서원과 그 이행을 통해 어려서부터 성막에서 자란다.
더구나 한나는 사무엘의 키가 자람에 따라 새로운 옷을 지어다 입힌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지어 입힌 옷이 에봇이란 사실이다.
에봇이란 제사장이 하나님의 집에서 사역할 때에 입는 옷인데 그 축소판을 사무엘에게 입힌 것이다.
사무엘이 비록 실로 성막의 엘리 제사장 수하로 보내졌을지라도 그의 자녀는 아니다.
더구나 양자도 아니다.
그저 사무엘은 성막에서 키우는 아이일 뿐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에봇을 입고 있다.
이스라엘의 상황은 양자제도가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사무엘은 부모의 서원에 의해 강제된 나실인으로 성막에서 자란 것이다.
물론 사무엘이 나실인의 일반적 규례를 지켰는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의 양자가 아닌 상황에서
성막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오직 한 가지 가능성은 나실인일 것이다.
침묵은 무언의 승인이 되고 왜곡된 질서를 만든다.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부정과 불의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그런데 엘리의 이러한 소극적 교육은 사무엘에게도 적용되었을 것이다.
어린 사무엘이 에봇을 입고 있어도 지적하지 아니한다.
자연스레 사무엘은 에봇을 입은 꼬마 제사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로 성막으로 제사하러 온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을 것이다.
그렇게 사무엘은 꼬마 제사장에서 제사장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제사장일 수 없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레위지파여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사장은 물론 레위지파의 사람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아론의 직계 후손들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론의 아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가문에 속해 있어야만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사무엘은 결코 엘르아살이나 이다말의 가문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양자제도가 엄격하게 제한된 이스라엘의 상속제도 아래에서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의 양자로 입적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조건으로도 사무엘은 제사장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은 어떤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인가?
첫댓글 물음표로 끝내셨는데요.., 담에 답을 주실 건가요, 아님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나요? --- 마지막 사사로 보아야 겠죠!
늘 고민이 되는 대목이지요. 마지막 사사로 보기보다는 새로운 시대를 연 선지자로 봄이 어떨까 합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것을 보면 특별한 선지자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더 고민을 하고 뒷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경우 오해된 부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상식처럼 통하는 내용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허....
허, 감탄사요 아님 맥 빠지는 소리요. 정체를 밝히셔야지요.
생각이 많았어요~ 근데 사무엘은 가장 유명한 제사장들 가운데 하나인데...그의 핏줄부터 제사장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요? 분명 하나님께서 들어쓰신 건 맞는데...흠...율법보다 앞선 하나님의 의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구약 시대에 목숨보다 중요했던(물론 지금도 중요하지만요) 율법이 깨진다고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데요...
사무엘이 그만큼 중요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에 대한 증거인가요? 아님 아예 "제사장은 아론의 후손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명제가 율법에 속한 것이 아닌가요? 흠....너무 어렵고, 또한 제 성경적 지식이 부족해서 어느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업네요...사무엘의 딜레마2를 기대하겠습니다~ㅋㅋㅋ
그래도 방가웠던 것은, 한나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 우리 즐거운 교회가 회기역전에 있었을 당시 목사님께서 한나라는 이름이 많이 쓰이지만 그렇게 좋은 이름은 아니다. 라고 말씀 하신게 기억납니다~ 그때 말씀하셨던 이유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런 이유에서였군요~ㅎㅎ
즐거운 교회의 초창기 시절에 지나가듯 말한 것인데 기억하고 있군요. 그래요. 정말로 한나가 한나가 되기 위해선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자기훈련이 필요하지요. 아마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