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두번째 시간 입니다. 신재훈 목사님께서 본격적으로 막스베버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공부를 이끌어 주셨어요.
막스 베버(Max Weber, 1864년 4월 21일 ~ 1920년 6월 14일)는 독일 사람으로 사회학 성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며 그의 논문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를 연결한 프로테스탄스 윤리로 유명합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1904년에서 1905년에 걸쳐 잡지 《사회과학과 사회정책학》에 연재되었다가 1920년에 책으로 간행되었습니다.
베버가 이 책을 쓸 당시는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며, 자본주의가 어떻게 성립하였고 어떻게 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게 되었는지 질문을 합니다. 베버가 본 자본주의는 합리성을 추구하는 근대정신의 산물이라고 보았습니다.
베버는 맑스의 자본에 대한 문제의식은 동의하면서도, 맑스가 생산관계라는 물질적 토대가 자본주의 정신과 문화를 만들었다고 설명하는 것과 달리, 자본주의 생성에 있어 영향을 준 중요한 정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개신교 윤리 가운데 베버가 이름한 '세속적 금욕주의'라는 것인데요.
베버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전적으로 종교신앙의 특정한 형태 속에서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근대자본주의가 그 주된 담당자인 산업적 중산자층에 의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금욕적 직업윤리의 형성에 대한 이른바 주관적 자극제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의 교리가 공헌한 비율을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본인의 가설을 입증하므로 자본주의 발달 초기에 영향을 주었던 정신의 회복을 통해서 물질만능화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나름의 처방을 내리려 했는데요. 자본주의를 인류 발전의 한 과정으로 보고 그 모순의 정점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로 바뀔 것을 전망하며 문제를 풀어가려했던 맑스와는 이 지점에서 차이가 있구나 싶었어요.
강의 때, 베버의 결론이 담긴 문장을 짚어주셨는데요.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은 베버나 맑스나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공부를 통해 근원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더 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강의 때 짚어준 글(제일 마지막 문장)이 등장하는 부분인데요. 함께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 가져와 봅니다.
과거 청교도들은 직업인이 되기를 바랐다. 반면 지금의 우리들은 직업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금욕주의는 수도원의 닫힌 벽을 걸어 나와 일상생활의 직업으로 옮겨 왔고 현세의 도덕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금욕주의는 기계제 생산의 기술적, 경제적 전제 조건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근대적 경제 질서라는 강력한 우주를 형성하는 데 그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 이 근대적 경제 질서는 엄청난 힘을 갖고 이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개인의 생활양식을 강제로 규제하고 있다. 이 질서는 영리 추구 활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포함하며 마지막 석탄이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그 규제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벡스터는 ‘재산에 대한 염려는 마치 언제든지 벗어 던질 수 있는 얇은 망토처럼 신도의 어깨 위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운명은 이 망토를 강철 같은 울타리로 만들었다. 금욕주의가 세상을 새롭게 형성하고 세속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자 이 세상의 외적인 재화들과 인간의 재산에 대한 욕망은 역사상 그 어느 때도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 나갔고 급기야 인간은 결코 이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종교적인 금욕주의 정신은 사라져 버렸다. 영원히 사라진 것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제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는 기계라는 기초 위에 서 있으므로 더 이상 정신의 지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정신의 유쾌한 후계자인 계몽주의의 장밋빛 분위기도 완전히 빛이 바랜 듯하고, ‘직업 의무’ 사상은 지나간 종교 신앙의 유령이 되어 우리 삶의 주변을 떠돌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직업 수행의 의미를 찾거나 직업 수행을 정당화 하지 않는다. 오늘날 직업 수행은 더 이상 최고의 정신적 문화 가치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직업 수행의 주관적 의미가 경제적인 이유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적, 윤리적 의미를 잃어버린 영리 추구는 순전히 세속적인 열정과 결합하는 경향이 있으며, 오늘날 이런 경향이 가장 발달해 있다고 하는 미국에서는 종종 스포츠처럼 열정적인 경쟁의 성격을 띠는 경우마저 있다.
미래에는 그 누가 이 울타리 안에 살게 될 것인지, 이 거대한 발전의 마지막에는 완전히 새로운 예언자들이 나타날지 아니면 과거의 사상과 이상이 강력히 부활할지 그 해답은 아무도 모른다. 이 둘 중에 어느 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병적인 자기 오만으로 장식된 기계에 의한 화석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러한 문화 발전에서의 ‘최후의 인간’에 대해서는 괴테의 다음과 같은 말이 진실이 될 것이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주의자, 이 공허한 인간들은 일찍이 인류가 도달하지 못했던 단계에 도달했다고 자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