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고 선배님들과의 흐뭇한 추억들
이두백
울산 현대중공업에서의 20년 직장생활, 광주광역시 봉선동에서 생활하면서 한라중공업/현대삼호중공업 다니며 16년 직장생활, 서울 광진구/중구 및 경기도 용인에서 14년 생활하면서, 새삼 광주고 대 선배님들과의 즐거운 추억들이 살아 오른다.
설 명절을 지내면서, 346세대로 이뤄진 산양마을푸르지오 아파트 단지에서, 같이 생활하시는 91세(1933년생) 광주고 1회 대선배님을 모시고 점심식사를 하면서 옛 추억들을 많이 소환했기 때문이다.
이 대선배님은 허순(許淳)이시고 고향도 나와 같이 영광이셨다. 98세로 미국에서 의사생활하시다가 별세하신 형님께서, 의대에 합격하신 해에 본인께서는 광주서중에 합격하시어, 영광에서 부친 위상이 많이 올라가셨다고 했다. 직장도 한전이었고 40대 초반부터 발전소 소장을 하셨기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젊은 혈기를 즐겁게 많이 발산하셨다고 했다.
그러나 큰아버지께서 영광읍 읍장을 하고 계실 때 인민군들에게 영광이 점령되어 5형제가 희생되는 아픔도 겪었다면서 젊은이들에게 공산치하의 아픈 한계성과 비인간성을 지속 말해주고 싶다고 하셨다.
우리 아파트단지의 공동체활성화단체인 노인회에 가입하여 활동 하고 계시기에 노인회 회장, 감사 분 등 10여명을 같이 초대하여 보리굴비정식을 들면서 영광굴비의 유래, 보리굴비의 장점 등을 얘기하면서 점심과 환담을 즐겼더니 매우 기뻐하셨다. 부인께서는 수 년 전에 별세하시고 작년에는 미국에 있는 첫째 딸이 와서 같이 지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하셨다. 둘째딸이 가까운 아파트단지에 살면서 매 주일 두 번씩 방문하여 반찬 등을 도와주신다고 하는데 혼자 기거하신다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가지고 간 책 몇 권을 드렸고 또 한 번 더 모시겠다고 했다.
광주고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개학식 며칠 전에는 종친이신 15회 이계삼 선배를 만나 시민회관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안 마가렛이 주연인 뮤지컬영화 <멋대로 놀아라.>를 감상했는데 노래와 춤이 곁들인 화려한 젊음의 발산이 시원시원하고 멋졌었다.
울산에서 직장생활 할 때는 8회 양희열 선배님이 든든한 후원자이셨다. 울산지방법원 판사를 마치고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셨는데 늘 온화하신 모습으로 현대중공업 및 현대자동차 후배들 모임을 후원하셨다. 현대중공업에서 근무하는 선후배들 모임을 만들면서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었다. 몇 번 모임을 가지면서 13회 선배님이시란 분이 참석하시어 회장님으로 모시려고 했었다. 그런데 광주고 출신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더니 이후 나오시질 않으셨다. 무슨 목적과 용기로 다른 학교 졸업생 행세를 하려고 했는가가 궁금했다.
청학이란 호를 가지고 부산에서 생활하시면서 무궁화 그림을 전문으로 그리신 8회 혹은 9회 선배님도 즐겁게 생각난다. 한지에 무궁화 그림을 그린 연하장을 선물로 많이 가져오셨기에 자연풍경을 담은 동양화를 그리시도록 권유했다. 그리고 대형화물선을 건조 완료해 선주사에 인도할 때 선장방과 기관장방에 한국의 정취를 담은 동양화 한 점씩을 선물로 걸어주었다. 동양화로 국위선양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90년대 초에 현대중공업 사장으로 4회 최수일 선배님께서 부임하셨을 때는 자랑스러웠다. 회사 식당에서 점심을 들고 나오시다가 뵈면 사장실로 가자고 하시곤 했다. 차 한 잔 드시면서 완도에서 학교 다니시던 얘기, 광주.전남 발전이 더디어 수준급 현대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던 얘기 등을 즐겁게 말씀해 주셨다.
95년~ 2003년 경엔 광주광역시 상무지구에 사시는 3회 이승덕(34년생) 선배님, 아니 선생님을 찾아뵙곤 했다. 영광중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맡으셔서 제자들이 광주고에 11명이나 합격토록 많은 지도와 격려를 해주셨기 때문이다.
33회 후배가 같은 직장후배로 들어왔을 때 세월의 흐름에 깜짝 놀랐었다. 그리고 대선배 분들께서 까마득한 후배인 나에게 따뜻이 또 친절히 대해주시던 것들을 생각하면서 나도 대선배님들을 본받으려고 노력하곤 했다. 지금은 고교 졸업 후 55년도 더 지났으니 70회 넘는 후배들도 만날 수 있겠다. 어떻게 세월의 흐름과 간격을 좁혀갈 수 있을지 더 연구하고 노력해봐야겠다.
첫댓글 광고17회를 대표하는 孝後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