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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진짜 정관이지요] “덕산 마을이 옛날부터 면 소재지였어요. 어원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는데 옛날에는 덕산을 면사, 면사걸이라고 했어요. 아마 면 소재지가 있어서 그렇지 싶은데, 면사라고 해 가지고 저는 면사 살았으니까 힘이 좀 약해도 면사 바깥 마을 아이들은 우리를 겁을 냈습니다. 제가 덩치가 이래 작아도 면 소재지에서 홈그라운드 이점 살려 가지고 큰소리치고 다녔지요. 하여튼 덕산이 면 소재지로서 아름다운 곳이었고 중심이었습니다. 군에는 군수가 제일 높고 면에는 면장이 제일 높죠. 면장이 면 소재지 마을에 사니까 면장님 집에도 한 번씩 놀러도 가고 하니까 우리는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꿀릴 이유가 없었지요. 그리고 그 당시에는 정관에서 나는 거는 뭐 전부 다 덕산으로 모였지요. 행정이니, 상업이니, 사람이니, 여러 가지가 다 모였습니다. 면사소무소가 거기 있을 때까지는 그런 식이었지요. 1990년대 후반까지는 그랬다는 생각이 듭니다.” 옆에 앉아 있던 C씨가 말을 거든다. “면사무소 앞 여기가 옛날에는 제일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버스 정거장 이름도 여기가 정관인 겁니다. 진짜 정관이 여기지요. 옛날에는 정관에 들어오거나 정관을 나가려면 모두 이 길 아니면 못 지나갔습니다.” 아직도 덕산 마을은 이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정관의 중심, 진짜 정관으로 남아 있었다.
“1988년도인가 1989년도 사이에 정관이 양산에 속해 있을 때 34만 평[1.12㎢]이 도시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어요. 정관에 34만 평만 그때 도시 계획을 하다가, 1990년대 초인가 부산으로 편입되었어요. 편입되면서 그 도시 계획이 중지가 돼 버리더라고요. 그것만 그대로 됐으면 토지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상당히 괜찮았지요. 그래 됐으면 어마어마했지요. 우리는 그러길 바랐는데. 근데 우리가 그걸 생각을 안 하고 그때 우리가 교육 문제가 상당히 어려웠어요. 우리가 부산으로 학교를 못 갔어요. 중학교에 가려면 주소를 옮겨 가지고 전학을 시켰지요. 중학교를 못 가니까 교육이 문제라서 부산시로 편입돼야 교육을 잘 받는다 해서 부산으로 편입하는 걸 찬성을 했었지요. 그때 투표를 했어요. 비밀 투표로 육십 몇 프론가 칠십 몇 프론가 나와서 우리가 부산시로 편입되었지요.” 양산군에 속할 당시, 정관에 학교라고는 초등학교 1개교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가려면 주소지를 옮기고 전학을 가야 하는 불편함을 겪었는데, 이것이 정관 사람들이 부산으로 편입되기를 원했던 중요한 이유였다. “그때 부산으로 편입될 때도 도시 계획 지역으로 흡수됐어요. 요즘은 도시 계획으로 묶어 놓고 개발을 안 하면 2년이면 2년에 폐지되고 다시 재수립되는데, 그땐 그런 게 없었어요. 그때는 우리가 말을 듣기로 10년이란 말을 들었는데 10년 동안 변화가 없었어요. 근데 부산시가 어느 날 갑자기 정관에 신도시를 만든다는 말이 들리더라고요. 처음엔 안 된다 반대를 많이 했지요. 정부에서 강제로 추진시켰는데 그때 당시에 도시 계획을 안 할 거라 했지요. 우리나라 경제가 나빠져 가지고 IMF가 오고 그러니까, 또 도시 개발 계획이 자꾸 미뤄지니까 우리가 어렵다 아닙니까? 도시 계획을 계획만 해 놓고 안 하니까 사유 재산을 팔려고 해도 누가 사지도 않고.그게 상당한 기간이 지났어요. 10년 넘게 지났을 거예요.” 부산으로 편입되면서 그대로 도시 계획 지역으로 흡수되었지만 당시 주민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도시 계획 지역으로 묶여 있으면서 오랫동안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자 매매도 끊긴 데다 IMF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과 맞물려 이중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땅을 팔려고 해도 안 팔리고 살림도 어렵고 그러다 보니까 가계 빚이 상당히 많을 거 아닙니까. 그래 가지고 당시 국회 의원 김○○ 씨하고 정관 유지들이 만나서 사석에서 중론을 모아 가지고 우리 빨리 개발해 달라고 하자, 이렇게 된 거지요. 그래 가지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해서 우리가 도시 계획 해 달라고 데모하러 부산시에 두세 번 갔다 아닙니까.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지정받은 게 1997년이니까 그때가 아마 1995~1996년도쯤 될 겁니다. 우리가 신도시 빨리 해달라고 데모하러 갔어요. 우리가 우리 무덤을 팠지 사실은.” 농사를 짓느라고 빌린 돈을 갚지 못하고 이자율만 높아 살림이 어려워지자 정관 주민들이 도시 개발을 해 달라고 부산시에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 D씨의 얼굴 한 구석에 아쉬움의 그림자가 잠깐 스친다. “그때는 빚이 많은 사람은 상당히 많았어요. 또 어째 보면 도시 계획을 안 했다면, 보상을 안 받았다면 논밭 날린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그러다 IMF가 돼 가지고 이자율이 보통 11% 하다가 12%, 13% 넘어서 15%로 올라갈 시기에 보상을 받았거든요. 그래 가지고 보상 받아서 빚을 다들 많이 갚았다 아닙니까. 보상이 작게 나와도 안 받을 수가 없는 거지요. 일단은 이자는 늘어나고 그걸 해결해야 하니까.” 신도시 개발을 자청했던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후회를 보이다가 곧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논밭을 잃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라며,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D씨의 모습에서 그간 얼마나 스스로를 달래어 왔는지 희미하게나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보상이 작게 나와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 속에서 아직까지도 만족스럽지 못한 보상에 대한 섭섭함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