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의 궁전 외 4편
사공경현
화사한 미소 속에 숨은
꽃의 눈물을 보지 못하거나
꽃을 보고 아프지 않은 사람은 환자다
나르키소스가 죽어 수선화가 되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죽어 상사화가 되었다
애타는 그리움이 멍들어 동백꽃이 되고
애달픈 한이 맺혀 능소화가 되었다
고운 이 죽어 꽃이 되고
아기가 죽어 영롱한 별이 되고
엄마가 죽어 하늘이 되었다
꽃은 천사들의 궁전이다
외로움이 죽고 행복이 죽고
환희가 죽고 희망이 죽어
저마다 꽃이 되었다
꽃은 외로움의 무덤이다
머나먼 별을 지나
하늘을 넘어
꽃으로 다가온 그리움
새벽마다 반짝이는 초롱한 은방울
수수만년 맺힌 눈물이므로
꽃을 보고 아프지 않은 사람은 환자다
일
백과사전에서 일의 과학적 정의를 보면, 물체에 힘을 주어 물체가 힘의 방향으로 이동한 경우를 일이라고 한다 가령 항문에 힘을 주어 X가 아래 방향으로 이동하였을 경우 일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은유적 표현으로 볼일을 봤다고 한다
꼴 보기 싫은 이의 얼굴 방향으로 힘을 가하여 주먹을 빠르게 이동하였을 때도 일을 했다고 한다 이를 다르게 쓰면 손을 봐주었다고 지칭하기도 한다 직장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내 속의 힘을 외부의 물체로만 이동시켰을 경우 큰일을 했다고 하는데, 이 같은 일을 다른 말로 욕봤다고도 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추상적인 힘을 가하여 상대의 마음이 움직였을 때도 일을 했다고 한다 특별히 이것을 일러 작업을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힘과 힘이 부딪치는 걸 전쟁이라 하고 힘과 힘이 융화된 상태를 평화라고 한다
오늘의 평화를 위하여 나는 오늘 밤 내 안의 것들이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디오니소스의 힘을 빌려 힘의 주관자들을 다독이고 싶다
( )의 속성
사냥꾼이다
겉보기에는 빈둥빈둥 어리숙해 보이지만
세상 만물을 허투루 보는 법이 없다
예민한 더듬이 촉수를 세우고
시퍼런 눈을 희번덕거리며
인간사회 이곳저곳을 어슬렁어슬렁
먹잇감 찾기에 몰두하는 야수들이다
능구렁이다
그들은 딱 부러지게 말하는 법이 없다
속내를 숨기고 변죽을 울리고 에둘러대다가
마치 자기만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
낯가죽 두껍게 이것이 진짜다 억지를 부린다
긴 듯 아닌 듯 연막을 치고
감언이설로 어르고 달래고 종국에는
말이 그렇지 뜻이 그렇냐면서
믿어달라고 떼를 쓰는
겉 다르고 속 다른 부류들이다
협잡꾼이다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집착하여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편집증이 있어
별것도 아닌 것을 과대 포장하고
쉬운 말 놔두고 구태여 알아듣기 힘든
외계어 같은 전문어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선량한 사람들을 미혹시키지 못해 안달이다
1+1=2라고 말하는 법이 없고
이로 볼 수도 있지만, 벼룩도 될 수도 있다고
너스레를 떨다가 먹혀들지 않을 것 같으면
니 맘대로 생각하세요
사람들에게 답을 떠넘기는 교활한 영장류다
냉혈한이다
그들은 사실의 진위보다는
세상과 인간의 허점과 아픈 곳을 물어뜯는데
혈안이 된 흡혈귀와 같다
일단 사냥감이 포착되면
그 편견과 독선으로 가득 찬 송곳니로 급소를 물어뜯고
현란한 독설로 아픈 곳을 인정사정없이 찔러댄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사람들의 항복을 받아내고는 희열을 느끼는
고독한 족속들이다
혀
충청도에는
사람의 기분을 달구는 '혀!'라는 말이 있지
그 말은 사람 속에 살고 있어
하루에도 수만 리 장성을 쌓는
그들은 동굴 안에 살면서
안과 바깥세상을 조율하지
동굴 입구에 사는 이 말은
다소 경망스럽고 이기적이지
동네방네 드러내길 좋아하는지라
말로는 주인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성급한 예단으로 비수를 들이대기 일쑤지
드물게는 인정 넘치는 사려 깊은 말이 되어
천금을 불러올 때도 있지만
동굴 깊숙이 사는 말은
있는 듯 마는 듯 헌신적이지
음지에서 묵묵히 쿵쿵 심장을 여닫지
알아주든 몰라주든 한결같이
24시간 365일 한순간도 쉬지 않고
죽는 날까지 주인을 받들지
당장이라도 세상이 끝날 것처럼
비밀의 동굴에 사는 '혀!'라는 말은
알 듯 말 듯 신비에 싸여 있지
은밀한 물밑거래를 즐기며
무장무장 주인을 지키기도 하지
수줍음 많아 숨어 있길 좋아하지만
흥분도 잘하는 다혈질 인사
세상을 닫고 신천지를 여는
행복한 우체국장님
구내에서는 분명 기관장으로서 방귀깨나 뀌는데 밖에 나가면 도무지 어깨에 힘이 빠진다 지역 내에서 이런저런 행사도 있고 기관장 회의도 더러 있건만 별로 내키지 않는다 그것은 야생의 서열 매김이라는 의전에서 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좌석이나 순서는 언제나 맨 끝자리에 뭔가 구색용으로 전락한 마네킹 같다 유창한 언변이 있으나 발언 기회도 없을 뿐더러 가물에 콩 나듯 말할 기회가 주어져도 이미 딴전을 피는 참석자들로 인해 혼자만의 염불에 맥이 빠지기 일쑤다
회식 자리에서도 문간 쪽 귀퉁이에 앉아 있으려면 벌써 어슬어슬 한기가 돈다 면장님, 지서장님의 술잔은 비우기가 무섭게 잔이 채워지는 데 반해 내 잔은 가뭄에 바닥 갈라진 논바닥 같다 그렇다고 제 손으로 술을 따라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부익부 빈익빈 술배를 골아야 하는 형편이다 그래도 어쩌다 자기 말에 동조해달라는 듯 고개를 한번 내 쪽으로 돌려주는 게 고마워서 ‘그렇지요 그렇고 말고요’ 환한 표정으로 화답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습니다’ 맞장구를 쳐 주거나 재미 한 푼어치 없는 아재 개그에도 배를 잡고 웃어야 하는 처지다
다른 기관장들은 그새 취했는지 횡설수설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의 대뇌피질은 점점 청빈해진다 아무래도 집에 가서 혼자 한 잔 더해야 할까보다 비틀비틀 사라지는 영감님과 굳은 악수를 하고 돌아서는 발길이 먹먹하다 터덜터덜 가로등이 서럽게 비추는 골목길에 들어서면 앞서가는 그림자가 오늘따라 느자구없이 더 길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속에 섞여 살면서 늘 구석 자리에 앉아 반 박자 빠르게 술을 따라주고 한 박자 느리게 잔을 비우면서 웃어주고 손뼉 쳐주는 나는 행복한 고독에 몸서리치는 시골 우체국장님
<당선 소감>
환갑 진갑 다 지난 시골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뜻밖에도 비행기를 탄 기분이다.
테이크 오프 (take off)
원래 약골에다 비실비실 삶이 버거운 소년,
몰라서 늦되고 모자라서 더딘 거북이 행군이 다시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때 군(郡) 사생대회에서 입상한 후 화가의 꿈을 가졌으나
제때 진학하지 못하고
29세 늦은 나이에 미대에 입학하여 수묵화를 전공하였다.
먹고 사는 게 급해서 직장을 잡느라 화가가 되지 못했고
업무의 과정에서 작은 글쓰기 재능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명예퇴직 후 화갑 기념으로 수필집을 한 권 내었다.
그래도 무언가 허허롭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문학의 진수라는 시를 본격적으로 써 보면 어떨까.
나이 듦의 허전함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 사이에서
시라는 무궁무진한 신세계에 불시착하게 되었다.
과연 쟁쟁한 고수들의 무림,
언감생심 먼 별나라의 일이라 치부하며 등단에 엄두를 내지 못하던 중
어느 백마 탄 초인이 있어 내 이름을 불러주었으므로
비로소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미숙한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아주셔서 큰 용기와 희망을 안겨준 ‘애지’의 관계자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오랜 인연으로 멘토가 되어준 강희안 교수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한 홀로 설 수 없는 외로운 여행길에 함께한 주위의 많은 분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시중의 격언이 틀리지 않았다는 이유를 시연해 보고 싶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덕담을 실천해 보겠다고 말씀드린다.
제 솔직한 소감을 아래와 같은 희망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아직 살아 움직이고 싶은 것은
미래의 명분을 새기는 거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은
살아갈 이유가 있다는 거다
아직 온정이 남아 있다는 것은
늙어감이 용서된다는 말이다
나이 듦이 빚이 되지 않도록
살아 있음이 미안하지 않기를
성명: 사공경현(司空京鉉)
1957년 경북 군위 출생
배재대학교 미술교육과 졸업
배재대학교 직원(홍보과장, 교무과장)
교육부 장관 표창
수필집 ‘무임 하차’ 발간(2017)
<이메일 주소>
v404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