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이해는 왕도가 없으며
성경 이해의 높은 퀼리티는 학자의 혀와 귀를 그 갖는 학문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성서는
인류 역사에 남은 가장 위대한 지식과 지혜의 보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그가 어떤 신분이든 무지랭이의 결정판일 것입니다.
더욱 성경을 코메디로 이해하는 설교는
저급한 설교 문화의 대중화를 이루었습니다.
학문의 길에서 만나는 성서의 이해는
태초의 깊이와 종말의 길이를 가진 역사의 우주공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주적 세계관을 갖게 하였습니다.
성서의 인물과 그 저자의 영감적 통찰은 하나님과 소통하며 그 뜻을 공유하는 영적 경험의 충만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경이로운 탄성을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이해는
그 받은 은혜의 역량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프리즘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 대한 믿음과 불신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요,
태초에서 종말의 간극입니다.
진리의 말씀과 그 성령으로 자유하는 경지는
포도나무의 가지, 그 열매를 맺는 제자요, 주의 친구요, 주의 택한 백성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증거, 그 포도나무의 역설은
이사야서의 그 모든 말씀을 완전히 성취하신 메시야, 그 실상의 모습입니다.
성경 이해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는
그 아는 것과 그 믿는 것과 그 순종하는 것과 그 증거하는 삶, 그 자체입니다.
복음의 증거를 들고 끝없는 질주를 하였던 사도 바울의 자취는
성경에 대한 태초와 종말의 이해로 완전하였습니다.
성경에 대한 다양한 이해의 한 측면 가운데
성서지대의 타산지석과 반면교사는 낮은 단계의 이해에 불과할 것입니다.
타산지석은 다른 산의 하찮은 돌이라도 좋은 본보기를 삼는 것이요,
반면교사는 나쁜 본보기에 대한 잘못과 실패를 거울 삼는다는 경계의 교훈입니다.
성경의 말씀에 대한 속담과 격언, 그리고 한자성어의 이해는
잠언보다 격이 떨어지는 옅은 이해일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국가관과 안보관과 가치에 대한 이해도 극우에서 극좌의 등급이 있습니다,
좀비와 개, 돼지뿐만 아니라 반역과 그 여적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격을 소위 인민재판과 중우정치의 야만국으로 떨어뜨렸으며
진실과 거짓이 융합된 혼란과 혼동을 겪고 있습니다.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공부가 전혀 안된 사람은
환란의 비바람이 몰아칠 때 그 바람에 날려가는 티끌과 검불이 될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날조와 왜곡된 잘못된 사관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민중사관과 주체사관과 반려사관 등 거짓의 뿌리를 가졌습니다.
우리 나라의 근현대사에 대한 올바른 공부가 되지 않는 사람은
탄핵 정국을 맞으면서 좀비와 개, 돼지 뿐만 아니라 반역과 여적에 가담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건국일을 임시정부 수립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독립 운동의 역사에 좌익을 포함한 좌파적 민중사관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건국일을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은
국부 이승만 박사에 대한 건국 이념에 꺠어 있는 자유 대한의 초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 자유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수립에 대한 이해는
우파와 좌파를 구별하는 그 단초입니다.
작금의 촛볼 난동 세력의 정권은
건국일을 부정하는 좌파 정부로 민중사관이라는 날조와 왜곡된 역사관을 가졌습니다.
얼마전 참께 방송의 전화 인터뷰에서
어느 애국 시민은 주사파로 가득찬 청와대를 한탄하며 타산지석으로 삼아
정신 차려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 떄 참깨 방송의 김종환 대표는 곧바로 타산지석이 아니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수정해 주었습니다.
주사파로 가득한 청와대에 대한 이해는 타산지석이 아니라 반면교사라는 김종환 대표는
애국에 깨어있는 저성의 리더로 자유롭고 정의로운 저널리스트입니다.
참깨 방송의 김종환 대표는
"버럭"이라는 애국의 분노를 아이콘으로 가졌습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의 전화 인터뷰를 하다가 애국의 라인에서 살짝 어긋나도
"버럭"하며 애국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이제는 시청자들이 먼저 알고 애국의 라인에서 벗어난 전화는
김종환 대표의 표정을 읽으면서 댓글에서는 5초 4초 ....1초....버럭의 카운트를 시작할 정도입니다.
태극신공, 그 애국 전선의 라인업은
자유 대한의 건아, 그 민초의 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애국의 라인에 깨어있는 정신은
예민하게 분탕을 구별하고 애국의 버럭으로 곧바로 때려잡습니다.
전화 인터뷰의 그 모든 전권은
유튜브 방송의 대표에게 있기 때문에 애국의 주권을 행사합니다.
참꺠 방송의 김종환 대표는
땅굴의 진실과 5.18의진실과 탄핵의 진실에 깨어 있는 유튜브 방송의 애국 전사입니다.
일상의 삶, 그 현장에서 애국의 타산지석과 반면교사를 구별하는 그 한 수는
애국의 퀼리티를 결정하는 지계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애국의 진실에서 다시 성경의 진실로 돌아가서
성서지대의 타산지석과 반면교사는 낮은 단계의 성서 이해이지만 믿음의 길로 가는 긍정의 이해입니다.
타산지석은 좋은 것의 본을 받는 것이요,
반면교사는 나쁜 것을 본받지 않는 한자성어의 교훈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성경 저자의 침묵, 곧 중립적인 서술이 많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포도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고 누운지라는 말씀은 술 취한 노아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아닙니다.
노아의 포도주는 일상의 삶, 그 현장에 대한 서술이요,
함의 고자질과 함의 아들 가나안에 대한 저주는 성경 저자의 영감적 통찰입니다.
포도 농사를 짓고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든 노아의 모습은
성서 독자의 이해로 타산지석이 아닌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셈과 함과 야벳에 대한 축복은
타산지석의 경지를 뛰어넘는 노아의 영감적 통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과 그 저자의 영감적 통찰은
타산지석의 경지를 뛰어넘는 놀라운 경지여서 그것에 대한 아전인수는
곧 이단과 사이비의 사슬이 될 것입니다.
여리고성의 물건을 도적하여 아이성의 패배를 촉발시킨 아간에 대한 교훈은
반면교사로 삼아 바친 물건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과 그 도적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지대의 사건과 인물에 대한 타산지석과 반면 교사의 교훈은
오늘날 종교적 아전인수와 융합하여 저급한 설교가 되었고 사이비의 사슬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진실에 대한 수준 높은 이해는
성경의 고수를 만나 삼고초려의 과정을 거쳐 소위 절대 신공의 기연을 만나듯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읽고 듣고 행하는 일에 깨어 있는 성도는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행하는 진리의 말씀, 곧 성령의 검을 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