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예언 1 (창49:1-7)
(요약)
아들들을 향한 야곱의 축복은 그들의 행위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감당의 중요성을 느낀다. 루우벤을 통해서 능력 감당법을 배운다. 성도는 루우벤처럼 모든 능력과 권세를 받은 사람이다. 잘 감당하려면 믿음과 기도로 그것을 누리고 누릴 때 결코 교만하거나 육신의 탐욕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시므온과 레위를 통해서 사랑의 은사 감당법을 배운다. 누이를 향한 이들의 사랑이 세겜 성민들을 살인케 했듯 우리가 아가페의 참 사랑을 소유하지 않으면 사랑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 흩음을 받을 것이다
(강해)
본문은 야곱이 임종하기 직전 자기 아들들을 모아놓고 한 축복입니다. 여러분께서도 항상 가장과 교회와 이웃과 나라와 세계를 축복하시는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참고적으로 이 야곱의 축복의 특징이 몇 가지가 있는데 먼저는 나이순이 아니라 모계에 따라서 축복이 발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소속이 아주 중요해요. 같은 야곱의 아들이지만 어느 어머니에게 속했느냐 했듯이 예수 믿어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어느 교회에 속했느냐도 결코 무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교회가 되어 오는 사람들마다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다음의 특징은 아들들의 행위에 따라 각기 저주와 축복이 발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상급은 충성함으로 받는다는 말이 맞습니다. 게으른 종과 충성된 종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다음 특징은 이 축복이 운율을 가진 시 형식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축복 받느냐 저주 받느냐는 하나님의 기쁨이냐 슬픔이냐를 가름할 만큼 중요한 일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드리는 것도 좋지만 먼저 영의 아버지께 은혜 많이 받는 것이 최고의 효도입니다.
그리고 이 축복은 야곱의 감정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 속에서 예언적으로 발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대로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름다운 믿음 갖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 축복은 언약 백성들에게 한 축복이기 때문에 결코 한 개인이나 가문에 그치지 않고 예수 안에서 전 인류를 향한 축복이라는 점입니다. 즉 야곱의 12아들들은 조만간 12지파로 발전하고 이는 신약시대의 12사도로 이어지며 마침내는 하나님 나라의 12기초석 개념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야곱의 12아들들의 수는 결국 구원 받을 영적 이스라엘의 완전한 수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44,000은 구약의 12지파 곱하기 신약의 12사도 곱하기 충만수 1,000을 곱한 수로서 신구약의 모든 구원 받은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즉 이 예언은 우리와도 관계가 있는 귀한 예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은 아들들의 행위에 기초하여 발해졌다는 점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럼 어떤 은혜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1. 르우벤을 통해서 능력 감당법을 배웁니다.
3-4절에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했습니다.
루우벤은 장자로서 대단히 좋은 기회의 행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야곱의 장자로서 가장의 승계는 물론 영적 정신적 특권과 함께 형제들보다 두 배에 달하는 기업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창27:29, 신21:17). 더구나 그에게는 위광이 초등하고 즉 격조와 품위가 높고 능력이 탁월한 면이 넘쳐흘렀습니다. 그러므로 잘만 감당한다면 상상할 수 없는 복을 누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성격과 행동이 대단히 감정적이고 충동적이며 특히 호색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앞에서 나왔듯 르우벤은 서모 빌하를 범한 오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즉 범해서는 안 될 일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장자에게 주어지는 갖가지의 특권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어머니를 범한 사람을 어찌 아들 같은 아들이라고 더구나 장자의 특권까지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권리가 유다와 요셉에게로 이전 되고 말지요(대상5:1-2).
이처럼 우리가 예수 안에서 영적권세와 능력을 받았는데 잘 감당해야 합니다. 감당하는 법은 먼저 늘 기도하여 능력으로 더욱 충만하는 일입니다. 우선 받는 것이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교만하지 않고 물욕이니 기타 세상 욕망에 조심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4절에 언급된 르우벤의 행동처럼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면 그만 우쭐해져서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한계선을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잘하고 남들이 존경해주니까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양 교만해져 육신의 욕망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사탄이 바로 그런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천사장을 삼으시고 온갖 기름으로 영화롭게 하시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장관의 특권을 주셨을 때 넘어서는 안 될 한계를 넘어서고 말았습니다. 사14:12-15의 이사야의 예언대로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높이고 비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온전히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경고하셨지요? 마7:22-23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귀한 직분과 능력 잘 감당해야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그것은 이것들이 다 우리 인간들의 약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것 주시면 100이면 100 다 교만해지게 되어 있어요. 다만 철저히 자기를 치고 말씀으로 싸워 나가며 이기느냐 그 차이일 뿐이지 그렇지 않으면 다 시험에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알아야 합니다. 이 능력과 권세는 어느 특정한 사람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누가 먼저 주신 것을 개발했느냐? 혹은 어떤 은사냐의 차이이지 성도라면 모두 다 받은 은사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알면 교만하지 않습니다. 내가 특별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되기도 전에 르우벤처럼 끓어 넘치지 않기 바랍니다. 3절 말씀처럼 이제 시작일 뿐이에요.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나는 새를 손으로 잡을 수 있다고 뭐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르우벤이 감당 못해 장자권을 빼앗겼습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잘 감당한다면 이것을 통해 온갖 아름다운 것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목적이 아니고 그 은사를 잘 감당하면 그것을 통해서 내가 변화 받고 큰 은혜와 큰 상급을 받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능력 잘 감당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시므온과 레위를 통해서는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5-7절에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했습니다. 답부터 말씀드리면 사랑의 은사 감당법입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구분한다면 에로스 사랑은 남녀의 사랑이고, 필레오 사랑은 자녀에 대한 사랑, 스톨게 사랑은 애국 애족 취미 이런 것이고,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숭고한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사랑하라는 교훈은 이 중 세 번째 아가페를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랑합니다.”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지 이성의 사랑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사랑의 은사 역시 한 사람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신 은사라는 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의 자녀들도 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예수 안에서 사랑의 은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사랑의 수고를 잘 감당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잘 감당하는 법 역시 먼저 성령 충만 받아 예수님의 마음 가진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다음은 사랑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참 사랑을 지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약점 투성이기에 성령의 사랑으로 했다가도 가까워지면 육신의 사랑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했다가 인정에 못 이겨 그리 마옵소서 주님을 말려 책망을 받았듯 주님에 대한 사랑도 얼마나 이 두 특성 사이에서 오락가락합니까?
그러므로 먼저 사랑의 은사를 충만히 받음으로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사랑 은사 받지 않음도 감당치 못한 것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것도 감당치 못한 것입니다. 사랑이 변질 되는 것도 감당치 못한 것입니다.
사랑의 은사 잘 감당치 못하면 하나님께서 다 흩으십니다. 그래서 7절에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했고,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주님께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 하셨습니다. 다 흩으신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부흥의 비결이요 내가 잘 되는 비결입니다.
시므온과 레위 보세요. 그들은 철저한 인간적 사랑의 소유자이지 참 사랑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동생만 보일 뿐 그를 해친 사람까지도 품을 수 있는 사랑은 없었습니다. 여동생 디나에 대한 애정이 살인으로 표현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닌 혈연 학연 지연 중심 혹은 좀 괜찮은 사람이면 존중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시하는 인간적 사랑이라면 아무리 그 사랑 때문에 똘똘 뭉쳐 있다 해도 그것은 없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은 철저히 무시 받기 때문입니다.
레위라는 이름 자체가 “연합된 자”라는 이름이죠? 그러나 인간의 사랑으로만 연합되어 있다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미움이 있고 미움은 곧 살인이며 그 마음으로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나친 애국 애족이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지 않습니까? 네셔널리즘과 인터네셔널리즘은 차원이 다릅니다.
5절에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했는데 시42:10에 보면 말도 찌르는 칼이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말도 칼이 됩니다. 그리고 6절에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했는데 이는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의 가축들을 약탈할 때 끌어가지 못한 가축들까지 못 쓰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사랑이 없으면 남에 대한 배려가 없고 남의 앞길까지 훼방칩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 내 손해입니다. 사랑 없으면 하나님도 함께 하지 않으시고 흩으시되 복까지 흩으실 것이니 결국 나를 해하는 것이고 내 앞길을 막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내가 사는 것이고 남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에게 주신 은혜를 잘 관리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놀라운 권능을 받았고 또 아버지 마음 사랑을 받았습니다. 관리 잘해 우리 안에 잠재한 은사의 풍성한 나타남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잘 감당하여 충성과 겸손으로 행하고 결코 교만하거나 변질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특권과 사랑의 풍성함을 넘치게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