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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음 냉수 같은 사람 안효관 목사
성경본문: 잠언 25: 13
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여러분, 지난 한 주 무척이나 더웠는데, 어떻게 더위를 이겨내셨습니까?
며칠 전 저녁식사를 마치고 날씨도 덥고 운동도 할 겸 해서 집사람과 함께 한옥마을에 갔습니다. 한옥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남천교 다리를 지나가는데, 얼마 전에 지어진 한옥누각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더위를 피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냇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얼마나 상쾌하던지, 사람들이 많이 모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열대야까지 겹치면서 저녁에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많은데,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느 신문에 보니까 ‘열대야 꼴불견’이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이런 것이었습니다.
- 러닝셔츠 바람으로 나온 중년 남성들이 돗자리를 펴고 앉아서 술판을 벌이다가, 술에 취해서 큰 소리로 떠들고 담배꽁초와 술병을 아무 데나 마구 버리는 것.
- 젊은이들이 텐트형 모기장까지 가지고 와서 잔디밭 위에 펼쳐놓고 서로 끌어안거나 과도한 스킨십을 하는 것.
- 불쾌지수가 높아지면서 사소한 일로 싸우는 것. 며칠 전에 실제로 수원에서는 술을 마시던 한 남자가 부채질을 하다가 그 부채가 옆 사람에 닿았다고 해서 서로 치고 박고 싸움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 아무 곳에나 주차를 해서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는 것 등입니다.
내가 더워 짜증이 난다 하더라도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짜증 나지 않도록 서로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남을 배려하면 내 자신도 즐거울 뿐만 아니라, 그 배려의 혜택을 받는 사람 역시 마음에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더위로 인해서 짜증나는 때에 마음은 시원함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얼음냉수 같은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얼음냉수 한 잔 마시는 기분이 어떨까요? 요즘 우리 시대에는 시원한 얼음냉수 한 잔이 얼마나 귀한지, 그 소중함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언제든지 냉장고 문만 열면 얼음이 있고, 시원한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에 쓰여진 말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에는 냉장고가 없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얼음냉수는 어쩌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최고의 물입니다.
더구나 “추수하는 날”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추수하는 날”이란 말은 보리나 밀을 추수하는 5, 6월경을 말합니다. 중동지역에서 5, 6월은 가장 더운 날씨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 본문은 “가장 무더운 5월이나 6월에 마시는 얼음냉수”라고 표현하지 않고, “추수하는 날에 마시는 얼음냉수”라고 했을까요? 물론 같은 시기를 가리키지만, 그 문맥상 의미는 아주 다릅니다.
여러분, 보리추수를 직접 해보셨습니까?
1년 농사 중에서 가장 힘든 작업이 보리추수입니다. 어렸을 때 농사짓는 일을 돕는 일을 종종 했었는데, 가장 하기 싫은 일이 보리 추수하는 일이었습니다. 요즘은 보리를 심는 논이 많지 않습니다만, 예전에는 거의 모든 논에 보리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보리를 추수하는 때는 더운 때일 뿐만 아니라, 보리타작을 할 때면 보리 ‘까시래기’라는 하는 보리수염이 옷속에 파고들어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몸에는 땀이 나 있지요, 몸에 파고든 까시래기는 몸에 착 달라붙어서 바람이 불어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가렵고 아파도 긁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아마 우리나라 우리들만의 고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추수하는 날”이라는 말은 단순히 무더울 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힘들고 고통스럽게 추수하던 때를 말합니다. 한 편으로는 추수를 한다는 기쁨도 있지만, 그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무더운 여름 날씨에 보리추수를 할 때 겪게 되는 고통을 견뎌내야만 합니다.
바로 그런 때에 시원한 얼음냉수 한 그릇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 시대에도 뜨거운 여름에 얼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솔로몬의 왕궁에는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레바논의 높은 산이나 헬몬산의 만년설에서 채취한 얼음을 잘 보관해서 그것을 물이나 음료수에 타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궁에서는 얼음냉수를 마실 수 있었지만, 일반 평민들에게 얼음냉수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은 바로 그런 무더운 여름에 먹는 시원한 얼음냉수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사람에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무더운 여름에 시원하게 먹는 얼음냉수와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충성된 사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자는 왕의 명령을 받고 왕을 대신해서 다른 나라에 가서 외교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요즘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대통령 특사’를 파견합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와 리비아 사이에 외교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이 대통령 특사로 리비아를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아직까지도 풀려지지 않는 리비아와의 외교관계는 우리나라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요한 일에 대통령이 선택한 사람이 형인 이상득 의원이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국가적 문제가 있을 때에 왕을 대신해서 외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송 받은 사람이 사자입니다. 그 사자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충성심입니다. 자신을 파송한 왕을 위한 충성된 마음이 없이는 결코 주어진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왕은 사자를 파송해놓고 노심초사합니다. ‘문제가 잘 풀릴까? 더 큰 어려움은 없는 것일까?’ 그렇게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던 왕에게 파견되었던 사자가 돌아와서 ‘모든 문제가 잘 풀렸다’고 보고한다면, 그 말 한 마디는 정말로 추수 때에 마신 시원한 얼음냉수 한 그릇과 같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사자로 세상에 파송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일꾼들로 살아가야 합니다. ‘충성’이라는 말에는 생명을 드리기까지 헌신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0절에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생명을 드리기까지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에게는 그가 드린 그 생명의 대가로 주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 주인을 위해서 생명을 기꺼이 드리는 사람입니다.
스위스 사람들은 충성스럽기로 소문난 민족입니다. 스위스는 그 면적이 우리나라의 절반도 되지 않는 작은 나라입니다. 인구도 800만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위스는 그 어떤 나라도 부럽지 않는 부자나라입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보다 2배 가까이 높습니다. 우리나라보다 2배 정도 잘 사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스위스’ 하면 생각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바티칸의 방위를 맡고 있는 군대가 스위스 군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의 방위를 스위스 군대가 맡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나라가 아주 어려울 때 스위스는 용병을 외국에 보내 돈을 벌어오게 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루이 16세의 호위병은 프랑스 병사들뿐만 아니라 스위스 용병 768명을 비롯한 외국 용병들과 함께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시위대가 왕궁으로 진격해 오자, 프랑스 병사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시위대 병사들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루이 16세 곁에서 왕을 호위한 사람들은 스위스 용병들뿐이었습니다. 더 이상 왕위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한 루이 16세는 남아 있는 스위스 용병들에게 “너희는 프랑스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 고향을 돌아가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용병을 지휘하던 12명의 스위스 장교들이 진급회의를 가진 후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 스위스 군대는 한 번 지킨 신의는 끝까지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단 한 명도 철수하지 않고 왕을 지키기 위해 혁명군과 항전을 벌였고, 768명의 용병 모두가 혁명군에 의해서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스위스 군대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바티칸에서는 지금도 스위스 군대가 방위를 맡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위스 군대는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신의를 지켜준다는 것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서 약속한 것을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내게 손해가 된다 하더라도 그 약속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감당할 때에 때로는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때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만큼 큰 시련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과의 신의를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충성된 사자입니다.
그것은 비단 교회에서 맡겨진 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맡겨주신 사명도 있고, 가정을 위해서 맡겨진 사명도 있습니다.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맡겨진 사명도 있습니다. 어느 자리이든 간에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충성이라는 말의 신약성경 언어는 ‘피스티스’(πιστις)입니다.
이 말은 신실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또 ‘믿는 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신앙인을 가리켜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믿는 사람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믿는 사람’이란 말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이란 뜻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뜻은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믿는 자’라고 자부하기 위해서는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신실해야 합니다. 한 번 한 약속은 내가 손해 본다 하더라도 반드시 지키고, 시간 약속과 같은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일까지도 잘 지켜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저 사람은 믿을 만 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충성된 사람(신실한 사람)은 오늘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현장에서 대충대충 사는 사람은 결코 충성된 사람일 수 없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대충하고, 중요한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은 충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태복음 25:21) 작은 일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큰일에도 충성할 수 없습니다. 작은 일에 신실하지 않는 사람은 큰 일에도 신실하지 못합니다. 작은 일을 어떻게 하느냐를 보면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러 양과 염소를 나누십니다. 양과 염소로 구분하신 후에 오른쪽에 있는 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다...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께 그렇게 해드린 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묻습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께 그렇게 해 드렸습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반대로 염소로 분류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자 그들은 억울하다는 듯이 묻습니다. “언제 우리가 주님께 그런 못된 짓을 했단 말입니까? 주님께서 주리셨다면 우리가 당연히 먹을 것을 드렸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목마르신 것을 우리가 보았다면 우리가 마실 물이라도 주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주님이 나그네가 되어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면 우리가 어찌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주리신 모습을 본 적도 없고, 목말라 하신 모습을 본 적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그네로 우리 집에 찾아오지도 않으셨지 않습니까?”
주님은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먹을 것을 먹지 못해 배고파하신다면 내 도시락이라도 주님께 드릴 것입니다. 주님이 목말라 하신다면 내가 갈증이 날지라도 주님께 시원한 냉수 한 그릇 대접할 것입니다. 주님이시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하지 못합니까? 내가 만난 그가 주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주 작은 자입니다. 우리가 무시해도 되는 아주 천한 사람입니다. 모른 척 해도 별로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을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배고픔을 나몰라라 했습니다. 그가 갈증에 목말라 할 때 모른 척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지극히 존귀하신 주님께 한 행동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 하나 어떻게 처리했느냐 한 바로 그것이 지극히 큰일을 어떻게 처리했느냐 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작은 삶의 자리에서 지극히 작은 일 하나에 충성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일에 충성한 그것을 큰 충성으로 보십니다.
영국의 런던에 있는 한 미술관에는 ‘콘트티’라는 화가가 그린 ‘충성’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걸려 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은 보는 모든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그 그림은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그려졌습니다.
주후 79년 이탈리아 폼페이 근처에 있는 베스비어스 산에서 화산이 폭발해서 폼페이 시 전체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18세기 중엽부터 그 폼페이 시의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발굴작업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당시 폼페이가 얼마나 화려하고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폼페이에는 공중화장실과 공중목욕탕이 있었고, 포장된 도로와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최고 수준의 문화와 예술을 자랑하고 있었고, 그것을 공연했던 화려한 극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폼페이의 유물 가운데 발굴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 하나 발굴되었습니다. 그것은 폼페이 성문을 지키고 있는 한 보초병의 화석입니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폼페이 시가 불바다가 되었을 때, 성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앞 다투어 성을 빠져나가기에 바빴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성문을 지키고 있던 한 로마군 파수병은 용암이 밀려오는 죽음의 공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부동자세로 창을 굳게 잡은 채 성문을 지키고 있다가, 용암을 온 몸에 맞으며 뒤집어쓰고서 그대로 화석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병사를 모델로 해서 그림을 그리고서 작가는 그 아래에 그림의 제목을 ‘충성’이라고 붙였다는 것입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가운데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사람, 그가 바로 충성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뭔가 큰일을 이룬 사람보다는 오늘 내게 주어진 일이 비록 작고 보잘 것이 없다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성실하게 그 일을 감당하는 사람, 내게 주신 사명의 현장에서 나를 그곳에 보내신 주님의 기쁨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께서는 오늘 바로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찾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십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를 마시는 것과 같은 시원함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날씨가 무척이나 덥습니다. 9월 초까지 덥다고 합니다. 이 무더운 여름에 다른 사람의 마음에 짜증을 내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답답해지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행복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괜히 걱정거리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사람을 만나면 즐거움이 커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괜히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사람을 만나면 저절로 힘이 솟고 용기가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또 하나님께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에 열을 받게 하는 사람입니까?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와 같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추수하는 날에 더 열 받게 하는 사람입니까?
김주희 씨가 쓴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제목은 ‘님에게 이런 사람이고 싶습니다.’입니다.
님에게 이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님이 지쳐 있을 때 청량음료
같은 사람으로 향기를
주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하루가 온통 님의 생각 속에
꽉찬 사람이고 싶고,
길을 걸을 때도 제일 먼저 생각
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님이 괴로운 일이 있을 때도
위로자의 벗으로 남는 사람이고 싶고 ,
부담 없이 차 한 잔을 마실수 있는 사람,
힘이 들 때는 어깨를 빌려 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께 어떤 사람이고 싶습니까?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와 같은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감동 영성 성경본문 :잠언 25: 13
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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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영성중에 빼놓을 수 없는 영성이 있습니다. 감동입니다. 지구상에 태어났던 분들 중에 가장 감동을 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영성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도 지구상에 18억이상입니다.
감동이 있는 영화는 1000만 이상의 관객을 영화관으로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감동이 있는 부흥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많이 모이게 됩니다. 감동 영성이 그리운 때입니다.
교수님이 강의 시간에 대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대학생들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핸드폰이나 애인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대학생들이 대답한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감동”
현대인은 감동을 원합니다.
김 재성 장로님이 지난 주간 설교하였습니다. 치매 예방법 4가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1. 독서 2시간
2. 왼쪽 발, 왼쪽 손, 왼쪽 뇌 사용을 늘리기.
3. 많이 웃기
4. 감동받기
감동을 많이 받을수록 치매가 예방된다는 특이한 이론을 전개하였습니다. 감동 영성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때 감동을 주고, 어떤 때 감동을 받는가요? 감동 영성이란 어떤 것인가요?
1. 희생 감동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은 희생하는 사람의 희생 이야기가 감동을 줍니다. 이기적이고 욕심 쟁이 이야기는 감동을 주지 못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는 이야기를 주일학교에 처음 듣는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어느 아버지가 5남매를 잘 길렀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대학까지 공부시켜서 모두 결혼시키느라고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자녀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아들, 며느리 그리고 딸, 사위들아!내가 사업하다가 빗을 지었다. 7억원이다. 너희들이 할 수 있는 만큼 나누어서 갚아 다오. 너희들이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나머지는 내가 재산을 정리하여 하마.” 그리고 종이를 한 장 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모두가 얼굴만 쳐다 보더니 셋째 아들이 1억원이라고 적었습니다. 큰 아들이 체면상 3천만원이라고 적었습니다. 2천만원 두 명, 천만원 한 명이었습니다. “고맙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아버지는 다시 5남매 가정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내 재산을 분배한다. 너희들이 적은 수를 보고 재산을 정리하여 보니 10배씩은 나누어 줄 수 있겠다.”
그리고 10배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만큼 재산을 나누어 주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분은 어디에서 감동을 받나요? 희생이 감동입니다.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감동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감동을 받는 사람보다 감동을 주는 사람이 더 그리운 세상입니다.
2. 고행 감동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에서 감동을 받나요?
고생하고 고행하고 힘들게 살면서 무엇인가 이룬 사람들 이야기에서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요셉을 통하여 많은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형들이 미움을 받은 이야기, 형들이 팔아 버려서 애급으로 혼자 팔려가 종살이한 이야기, 그리고 감옥 살이 이야기 그 후에 모두를 극복하고 국무총리가 된 스토리에서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요즈음 소돔과 고모라의 음란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의 성적 관계, 아버지와 딸의 불륜, 근친 상간, 심지어 부부가 바꾸어 하는 성관계, 극단적으로는 짐승과 수간 모두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롯의 두 딸이 아버지를 술취하게 한 후 오늘은 언니가 아버지와 자고, 다음 날은 동생이 아버지와 자는 이야기등 상상도 못 하는 음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데 요즈음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감동스러운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불교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도하는 중이 산속에 오랜 세월 수도하고 있었습니다. 호랑이가 오더니 입을 벌렸습니다. 입속을 보니 큰 가시가 박혀 있었습니다. 빼주었습니다. 조금 후 호랑이는 예쁜 여자를 입에 물고 와서 앞에 내려 놓았습니다. 그 중은 평생 그 여자와 남매를 맺고 산속에서 살다 죽었습니다. 이것이 충청도에 있는 남매탑입니다.
이런 고행과 금욕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독거 수도사 이야기는 엄청난 감동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천연 동굴 생활을 하며 수도합니다. 동굴속애서 겨울의 찬 바람을 이겨냅니다. 여름의 더위와 모기의 뜯김과 싸웁니다. 진흙집 생활을 합니다. 공기 소통 구멍과 음식을 위한 구멍 하나만 있는 집을 짓고 그 안에서 평생 나오지 않고 살며 복음을 증거 하는 생활입니다. 기둥위에 조그만 공간을 만들어 놓고 그 곳에서 복음을 증거하며 사는 생활 입니다. 시온메 수도사가 모델입니다. 오래되어 빈 무덤속에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가끔 세 무덤에서 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는 기도할 때, 다른 하나는 일할 때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필요한 것을 두는 창고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산속에 버려진 집을 수도원처럼 사용하는 수도사들도 있었습니다. 우물이 말라버려서 사용하지 않고 버려진 것이 있습니다. 이는 수도사들의 고행 금욕 자리가 되었습니다. 천정이 없어지고 벽만 남은 곳에서 평생 수도하는 수도사들도 있습니다. 추위와 더위, 비와 눈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공간에서 고행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늘이 지붕이고 땅이 요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기 절제 훈련을 극단적으로 하면서 예수님을 닮아 살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감동을 주는 사람을 편하게 산 사람들이 아니라 금욕적으로 살아간 이들입니다.
3. 주는 감동
받는 사람은 감동을 주지 못 합니다. 주는 사람이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움켜 쥐려고 하는 사람이 감동을 준 이야기는 없습니다. 없어도 주고 또 주고 희생하는 사람이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감동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삭개오도 재산을 모으려할 때에는 감동을 주지 못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줄 때 감동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부자가 재산의 반을 준 이야기를 성경외에서 들어 보지 못 하였습니다.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게 되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병원입니다. 그 병원이 세워질 때 뒷 이야기입니다. 에비슨 선교사는 당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풍토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병원이 없었습니다. 카나다로 휴양하러 떠났습니다. 그는 건강이 점점 악화되면서 한국에 당장 필요한 것은 일시적인 구제품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병원을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에비슨 선교사는 한국에 병원을 세우기로 작정하고 온 한국인의 건강을 위하여 중보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고오든이라는 설계사가 <내가 설계도를 무료로 그려드리겠습니다>라고 자원하였습니다. 그 설계도대로 짓는 데 필여한 돈을 모금하러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번은 카네기 홀에서 한국에 병원을 짓기 위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 세브란스라는 청년이 나와서 말했습니다. “나는 그 동안 어디엔가 필요한 곳에 병원을 짓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여 왔습니다. 그 기도를 1년간 계속 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그 병원 지을 돈을 전부 대겠습니다. 하나님은 선교사를 만나게 하려고 나를 이 곳에 보내셨고 한국에 병원이 필요하니까 1년 전부터 나에게 그런 기도를 시키셨음을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1900년 에비슨 선교사는 그 돈을 가지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1902년 9월 세브란스 병원이 개원되었습니다. 남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이기에 응답이 됩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입구에 세브란스 얼굴 동상이 있습니다. 그 밑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받는 당신들의 기쁨보다 주는 나의 기쁨이 더 큽니다.”
AD 270년 이집트의 한 시골 마을의 예배당에 스무 살 나이의 안토니우스란 이름의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때마침 강단에선 마태복음의 한 대목을 읽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복음 19:16~21)
이 말씀이 그의 영혼 깊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결단의 기도가 흘러 나왔습니다. "예수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게 들려주신 말씀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는 여섯 달 전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에게 기름진 농토를 남겼었습니다. 그는 그대로 가서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의 첫걸음은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부터 그는 마을 어귀에 있는 공동묘지의 빈 무덤으로 거처를 옮기고는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였습니다. 그곳이 그에게는 영적 투쟁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온갖 종류의 유혹과 환영이 그에게 나타나 그를 무너뜨리려 하였고, 그는 이런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아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사막으로 옮겨 갔습니다. 사막 한 가운데 로마군이 사용하고 버려진 요새로 들어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의 영적 싸움에 승리하여 하늘로부터 임하는 평화와 감격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여섯 달에 한 번씩 친구들이 마른 빵과 소금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명을 부지하였습니다. AD 285년 그의 나이 35세 때였다. 예수님만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이 그를 사막 깊은 곳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선택이 병들어 가던 당대의 기독교를 살리는 수도원 운동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에 영향을 받은 많은 젊은이들이 사막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그는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곤 하였습니다. 356년 그가 105세로 죽을 즈음에는 수천 명의 수도자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신학박사도 아니고 유명한 목사도 아닙니다. 안토니우스와 같이 감동을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먼저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며,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4. 충성 감동
그런데 감동중에 가장 큰 감동은 충성의 감동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람들은 많은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시원하게 한다는 말은 감동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미국 감리교 신문에 실린 작은 기사입니다. 뉴욕에 갑자기 영하 34도까지 내려가는 주일이 있었습니다. 그 날 뉴욕 교회에는 평소 반 정도밖에 교인들이 출석하지 못 하였습니다. 자동차가 얼어 붙고 살인적인 추위로 몸이 약한 사람들은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날 88세 골디 슈리버라는 할머니는 자기가 늘 모시고 가서 예배드리는 100세 해밀턴 노인 집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그를 차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가는 길에 94세 된 친구 할아버지 파크스 집에 둘러 그까지 태우고 교회로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목사님이 감격속에 염려하며 물었습니다. “할머니! 위험하지 않습니까?” 이 때 할머니가 대답하였습니다.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뿐이지요. 내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뿐입이지요. 그런데 아직도 생명을 건 충성은 못 하고 있지요.” 이 짧은 기사는 많은 감리교인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며 일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감동을 주는 사람입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은 중앙 아프리카 선교를 하다가 매우 호전적이고 사나운 원주민들에 둘러 쌓여서 아프리카 선교 16년중 가장 위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오늘 밤 어두울 때에 이 곳을 빠져 나가야 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요히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그에게 심경의 변화가 일어 났습니다. 그 날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어 놓고 있습니다.
“1856년 1월 14일. 나의 마음은 몹시 혼란스럽다. 나는 이 넓은 지역에 대하여, 그리고 내일이면 나의 목숨을 빼앗을 지도 모를 저 많은 사람들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나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 가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리스도의 말씀을 떠올려 본다. 그 분에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다. 그 분은 모든 족속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땅끝까지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가장 완전하고도 가장 능력있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대로 믿어야 한다. 그 분이 나를 이 곳에 보내셨을 때에는 분명히 무슨 목적이 있다. 아무 목적도 없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을 리가 없다.
그렇다!
아무도 모르게 오늘 밤 이 곳을 빠져나가 살려던 계획을 포기한다. 나와 같은 상황에 빠진 사람은 모두 도망가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진실로 나는 오늘 밤 하늘의 달과 별을 관찰하며 여기에 그대로 누워 있을 것이다. 설령 이것이 마지막 밤이 된다 할지라도...
나는 지금 평온하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다음 날 일어나서 전도하였습니다. 드디어 리빙스턴은 아프리카를 변화시켰습니다. 오늘까지 리빙스턴은 온 인류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한 충성 감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기까지 충성하였습니다. 이것이 감동입니다.
왜 감동을 주는 영성이 필요할 가요? 감동을 주는 영성은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가요?
1. 감동은 변화를 줍니다.
사람들이 언제 변화됩니까?
감동을 받으면 변화됩니다. 억지로 안 됩니다. 감동받아야 합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중간에 왜 그렇게 감동을 받았는 지 설명이 없습니다. 단 하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이런 말 밖에 예수님은 다른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말 자체가 감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알고 계셨다는 것이 감동이었습니다.
만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오시더니 군중속에 있는 나를 불러 내 이름을 알고 있다면 나는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크게 변화를 받았습니다. 평생 최고 감동이었습니다.
남편은 사진 찍어 작품을 만드는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직업이 없습니다. 건달같습니다. 밤낮 놀러 다니는 것같습니다. 항상 경치 좋은 곳만 찾아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관광만 하는 것같습니다. 아내가 뼈꼴 빠지에 양품점을 경영하면서 가정 경제를 이어가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카메라입니다. 사진을 찍는 이들에게 카메라는 군인의 총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날 남편은 카메라를 잃어버렸습니다. 작가용 카메라라 대단히 비싼 것이었습니다. 아내에게 말도 못 하고 실망에 차있었습니다. 아내가 알았습니다. 아내는 빚을 내서 카메라를 사주었습니다. 남편은 감격하였습니다.
“여보! 그 카메라 잘 잃어버렸어요. 이제 사진찍기는 그만 두고 취직해서 돈 좀 벌어 와요. 저 혼자 고생하잖아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작은 도전이었습니다. 남편은 감동을 받아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감동은 변화를 주기에 감동의 영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2. 감동은 건강을 줍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감동을 받으면 세포가 살아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건강이 살아납니다. 치매에 걸리지 않습니다. 생활에 활력소가 생깁니다. 그래서 건강에 도움을 줍니다.
모세가 120살 살면서 기력이 쇠하지 않고 눈이 어두워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다. 감동을 많이 받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 혼자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모세가 홍해에 지팡이를 내밀었습니다. 우리는 영화로 보기만 하여도 시원한 대 실제로 본인은 얼마나 기분좋게 놀랐을 가요? 온 세상이 모두 모세의 것같았을 것입니다. 두고 두고 행복하였을 것입니다. 감동에 감동이었습니다.
지팡이로 반석을 쳤습니다.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200만명이 마실 물이 아니라 생활하는 물이 쏟아졌으니 강물같았습니다. 얼마나 시원하였을 가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영적 권위에 놀라 순종하고 따라오니 얼마나 감동을 받았을 가요?
날마나 만나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습니다. 200만명이 배부르게 먹을 만나가 매일 그것도 40년 동안 쏟아져 내렸으니 얼마나 신났을 가요? 순간마다 발걸음마다 감동의 생활이었습니다. 이렇게 감동받으며 사니 120년을 살아도 기력이 지치지 않았습니다.
감동은 건강에도 도움이 됩니다.
모세는 죽기 싫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그렇게 감동을 주면서 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 될가요?
감동은 건강에도 도움이 됩니다.
3. 감동은 헌신을 줍니다.
감동받은 사람은 헌신하게 되고 헌신하는 사람은 감동을 받은 사람입니다. 감동받은 사람은 감동받은 것만큼 헌신합니다. 크게 감동받은 사람은 크게 헌신합니다. 조금 감동받은 사람은 조금 헌신합니다. 감동받지 못한 사람은 헌신하지 못 합니다.
저와 동창 목사님이 미국 스프링스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한 병칠 목사입니다. 그가 최근 감동깊은 결혼 주례를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 눈이 내리던 12월 대강절 어느 날이었습니다. 머리가 하얀 두 노인 한쌍이 찾아와서 결혼 주례를 부탁하였습니다. 사연이 기구하였습니다. 다 늙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 데 서로 결혼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물론 둘 다 미국인입니다. George 와 Elizabeth 라는 두 노인의 50년 전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랐습니다. 친구로서 서로 사귀다가 연애로 발전하다가 이른 나이에 양가의 허락을 받고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가정을 이루며 살다 보니 젊은 혈기에 싸우는 일이 잦았습니다. 사소한 일로 자주 싸우다 보니 쌓이고 쌓였습니다. 별 것 아닌 일로 이혼하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자존심이 상하여 3년 만에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둘 다 재혼하였습니다. 남자는 재혼하고 살며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늙어서 당뇨병에 걸렸습니다.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며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눈도 잘 안 보이고 귀까지 잘 안 들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재혼한 부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돌보아 줄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한편 여자는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재혼하고 두 딸을 낳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이 인터넷으로 어머니의 첫 사랑 남자를 찾았습니다. 첫 남편이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딸의 주선으로 50년 만에 둘이 다시 만나고 보니 여자는 건강한 간호원인 데 남자는 폐인이 다 되어 있었습니다. 불구자가 된 전 남편을 보는 순간 여자가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저 남자를 간호하며 평생 살자.”
그래서 프로포즈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성탄을 앞두고 둘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따로 입장할 수 없어서 같이 손을 잡고 입장하였습니다. 여자는 결혼서약을 할 때 너무 울어서 한참 걸려야 했습니다. 남자는 귀도 어둡고 눈도 어두워서 더듬거려야 했습니다. 한 병칠 목사가 부부가 되었음을 공포하고 둘이 키스를 하는 데 꼭 끼어 안고 한참을 울면서 떨어지지 않아서 하객들이 모두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매년 고맙다고 성탄절이면 카드를 보내 온다고 합니다.
감동받은 사람은 변화됩니다. 헌신하게 됩니다. 활기찬 건강으로 살게 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