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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7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눈물을 보시는 하나님 / 최승윤 목사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절망의 벽 앞에서 통곡하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히스기야입니다. 유다 왕국의 14번째 왕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선조 때부터 만연되었던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본인뿐 아니라 유다 나라 전체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그의 병은 7절에 보니까 “종처”라고 했습니다. “종처”란 종기입니다. 그의 몸안에 무슨 병이 있어서 종기가 밖으로 나오게 되었는지, 아니면 종기가 생겼는데 그 종기를 통해서 균이 들어가 속과 뼈가 썩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종기로 인해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절망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그가 죽고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경건한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렸다면 그가 가장 먼저 무엇을 했겠습니까?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히스기야가 기도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너는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의사들이 포기를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다면 아무 문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히스기야는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깜깜 절벽과 같은 상태입니다.
히스기야가 겪고 있는 절망의 고통을 우리는 온전하게 공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들에게는 필요없는 말씀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이 세상에서 살면서 고통과 절망을 겪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할 것없이 죽음 앞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평안하기를 원합니다.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지 않고, 평안하게 살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살이는 아픔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우리를 괴롭히고 흔들어댑니다. 남들은 아무 문제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고, 힘든 일이 있어도 잘 견디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 왜 나는 이렇게 허우적거리면서 살고 있는가? 억울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될대로 되라, 어찌피 죽을 인생, 그렇게 아둥바둥하며 살게 무어냐? 마음 편히 먹고 그냥 주어진 것 받아들이고 목숨이 붙어있을 때까지 살다가 죽으면 그만 아니냐?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것도 삶의 한 방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그런 날이 오기 전, 그런 때를 만나기 전, 준비를 할 것입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되는대로 살다가 일이 닥치면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관심없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때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고통과 고난과 절망의 때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그 순간을 위해서 오늘 신앙의 기초를 든든하게 다져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동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지금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을 다져두지 아니하면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휘청거리고, 안절부절하게 될 것입니다. 평안의 시간 속에서 보지 못했던 것, 평상의 시간 속에서는 알 수 없었던 나의 실체들이 드러납니다.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그 상태가 되면 나의 참 모습, 나의 나됨이 드러날 것입니다. 자신이 그동안 믿고 있었던 것이 기초부터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기초가 무너지면 서지 못합니다. 작은 어려움, 능히 극복할 만한 어려움은 우리 힘으로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을 갖고 안절부절하고, 낙담하는 것은 허약한 것입니다. 우리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을 갖고 무조건 기도로 달려가는 것은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도망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말도 우리의 능력만을 의지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지혜와 힘과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무조건 기도만 하는 것은 정당한 자세는 아닙니다. 주께서 힘을 주셨으면 그 힘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요, 주께서 지혜를 주셨으면 그 지혜를 올바르게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이가 30이 넘은 사람들이 아주 사소한 일에도 금방 어쩔 줄 몰라서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것은 나이가 30이든 40이든 아직 어린 아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마찬가지 논리가 신앙생활에도 적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상시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의 삶을 차근차근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위해서 오늘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모든 의사들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까지 히스기야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망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칠흑같은 어두움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히스기야가 과연 이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히스기야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정신나간 사람처럼 안절부절 하면서 왕으로서의 품위를 잃어버리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처럼 주변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절망의 벽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 절망의 벽을 홀로 대면했습니다.
그 벽을 뛰어 넘으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히스기야의 그와같은 결단과 다짐의 표현이 바로 기도요 통곡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죽음을 선언하신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기도와 통곡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밑져봐야 본전이다 라는 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기도라도 해보자. 혹시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지도 모르지 않느냐? 그런 식이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이 죽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가 기도와 통곡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죽음을 선포한 하나님만이 자신의 죽음을 벗겨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자신에게 죽음을 선언하셨는지, 왜 중병에 걸려서 죽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따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배반감에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서 모든 우상을 철폐하고 자신뿐 아니라 백성들 모두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했는데 그런 나에게 돌아온 것이 고작 죽음이란 말이냐? 분통터지고 억울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욕을 하고 싶는 그런 상태였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각과 감정들로 자신을 스스로 허물어뜨리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납득할 수 없고,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지금 나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이외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내게 죽음을 선언하셨을지라도 그 죽음의 선언을 생명의 선언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에 히스기야는 절망의 벽을 대면하고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며 통곡을 했습니다. 자신을 살려달라고, 죽을 병을 고쳐달라고, 이 죽음과 절망의 고통에서 나를 건져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가 흘렸던 수많은 눈물을 보셨습니다.
그의 통곡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죽음을 선언하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음을 선언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다시 살려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해주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와 그가 다스리는 유다 나라를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랬다 저랬다 변덕이 죽끓듯 하시는 분이십니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아무런 생각없이 선언하셨다가 거두시는 분이십니까?
히스기야가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어떻게 하나 보려고 하나님께서 지금 커튼 뒤에서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유치하고 조잡한 분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도 유치하고 조잡한 하나님이라면 믿을만 한 분이시겠습니까?
하나님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감정과 확신의 문제 이전에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것에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믿음이 발생할 수 있겠습니까?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있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죽음을 선언하신 하나님이 자신이 넘어야 할 벽이라면 히스기야는 그 벽까지도 넘어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외면하거나, 하나님 이외에 딴 길을 찾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죽음을 선언한 그 하나님과 정면으로 대면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길을 되돌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왜 살아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하나님께 제시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죽을 병이 든 것은 그가 왕에 오른지 14년 정도 되는 때입니다. 25세 때에 왕위에 올랐으니까 39세 때, 한창 젊은 나이에 죽을 병에 걸린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된 다음에 행한 일은 나라를 개혁하는 것이었습니다. 개혁의 핵심대상은 선왕들 시대에 뿌리 깊게 이어져 내려온 우상숭배였습니다.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뿌리 뽑고 나라를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14년 동안 히스기야는 그일에 매달렸습니다.
한창 진행 중인 개혁이 자신의 죽음으로 중단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만약 자기가 죽으면 이 나라가 어찌 되겠는가? 나라를 개혁하는 것은 아직도 멀었는데 과연 하나님께서 내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내가 지금까지 해온 개혁정치는 과연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열성으로 해온 개혁정치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는가? 혹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일찍 데려가시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우상숭배에 빠진 유다를 온전하게 개혁하게 하시려면 나의 생명을 계속해서 연장시켜 주셔야 하지 않은가? 앗수르로부터의 위협은 과연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앗수르가 쳐들어오면 지금까지 내가 해온 개혁정치는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셨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내가 해온 개혁정치를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셨다면 허송세월만 한 것이 아닌가? 히스기야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이켜보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려주시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순전한 마음으로 충성스럽게 살 것을 다짐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통곡했고, 자신이 앞날을 생각하면서 생명을 달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하고, 다윗이 걸어갔던 길을 충성스럽게 걸어간 것을 인정해주셨습니다. 비록 그 길에서 부족과 연약함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유다를 향한 히스기야의 충심을 보셨기에 히스기야에게 15년이라는 생명을 연장시켜주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인 유다를 개혁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와 통곡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뿐아니라 유다까지도 앗수르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스기야는 죽을 병의 벽을 넘었습니다.
절망의 벽을 넘어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에 죽음을 선언하신 하나님께 생명을 달라고 부르짖을 수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로 하여금 절망의 벽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유다 나라를 향해서 품고 있었던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비전이 있었기에 죽음을 선언하신 하나님을 대면해서 생명을 달라고 눈물로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히스기야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기도와 눈물과 통곡은 단지 일찍 죽는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사명과 비전에 충실하고자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과 열정과 꿈과 비전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바로 이런 믿음의 뚜렷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흔들림 없는 신뢰이기에 환경과 여건이 열악하다고 하여도 변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하게 보이고, 낙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의지합니다. 광야, 황무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여도 그것이 결코 하나님께는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용기를 내서 부르짖습니다. 자신의 무능력과 무지함을 핑계대고 뒷걸음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결과가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도 초조해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기다립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뒷짐을 지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일에 충실하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주께서 주의 일을 이루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요청되는 것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의 우리 모습이 히스기야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과 다른,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넘어야 할 벽이요 울타리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를 막아서고 있는 모든 것을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의로움을 내세우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속한 어떤 것도 의지하거나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 만을 의지 하고 모든 벽과 울타리를 넘어가야 합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시편 18:19절)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변함 없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하더라도, 오랜 시간 동안 침묵하신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님을 대면해서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하고 통곡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눈물을 보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품고 있는 생명과 진리와 꿈과 희망이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그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가 품고 있는 것,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진실한 것인지를 점검하십시오. 혹시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사람들의 이목에 따라서 움직이는 신앙은 아닌지. 사람들의 평가와 판단에 좌우되는 신앙은 아닌지를 하나님을 대면해서 추적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과 비전을 따라서 오늘도 내일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을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주께서 돌봐주실 것입니다. 그 길을 가면서 흘렸던 수많은 눈물들을 주께서 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었던 통곡소리를 하나님께서는 들으실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너의 기도를 내가 들었고, 네 눈물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너를 인도할 것이다. 나와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살아가는 너를 통해서 내가 큰 일을 행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여라 내 종들아. 내 자녀들아.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들과 함께 할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들려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들려주시는 이 위로와 축복의 말씀을 들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우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