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語』 子罕(자한)편 제4장을 보면, 孔子의 제자들은 스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입을 모아 정리하고 있다.
子絕四러시니 毋意毋必毋固毋我러시다
선생님은 네 가지를 끊으셨으니,
의도(意圖)함이 없으셨고, 기필(期必)함이 없으셨으며,
고집(固執)함이 없으셨고, 내가 없으셨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나온 뜻일까? 그 명확한 뜻을 알려면, 먼저 『論語』의 전체적인 내용과 함께 ‘子罕’편을 一瞥(일별)해봐야 한다. 공자의 親炙弟子(친자제자)와 再傳弟子(재전제자)들은 선생님이 남기신 『詩』 『書』 『易』 『禮』 『樂』 『春秋』 등의 經 외에 선생님과 함께하면서 듣고 본 말씀과 대화, 일상생활은 물론 여러 行動擧止(행동거지) 등등이 후대를 위해 기록해둘 가치가 있음을 절감하면서 이를 정리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주제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해서 책으로 엮었으니, 이것이 총 20편으로 구성된 『論語』이고(『論語』 20편을 분석한 내용은 단행본인 家苑 『論語大觀』이나 혹은 이를 강의한 카페 동영상 중 ‘논어 大觀 특강’ https://cafe.daum.net/well48/VSig 참조), 그 아홉 번째 편명이 ‘子罕’이다.
제자들은 편집회의를 거듭하면서 선생님께서 천하를 다스리는 통치철학과 함께 君子의 道理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시어 萬古의 모범이 되는 옛 성현들의 말씀과 그 통치철학 등을 두루 글로 정리하셨으나 정작 그 핵심인 仁義禮知(인의예지)와 天命(천명), 利 등등에 대해서는 의외로 드물게 입 밖으로 내셨음을 깨달았고, 『論語』 제9편의 제1장에 “子는 罕言利與命與仁이러시다(선생님은 利와 더불어 命과 仁을 드물게 말씀하셨다)”를 배치했다. 곧 ‘子罕’은 ‘선생님께서 드물게 말씀하셨다’는 뜻으로 통용되는데, 이 속에 담긴 깊은 의미는 利와 命과 仁이 매우 중요한 내용임에도 그 높은 단계에 올라간 인물이 아니면 서로 논하기가 어렵기에 굳이 말씀하지 않으셨고, 스스로 그 깨달음을 얻어 대화할 수준에 이를 때까지 기다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높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과는 대화하지 않으셨을까? 그렇지 않다. 무지하고 비루한 사내가 진지한 태도로 물었을 때 그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양 끝을 집어 차근차근 두드려가며 설명하셨다. 그리고 이미 통념화된 예법이라도 그것이 민생을 고달프게 하는 데서 나왔다면 따르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셨고,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사회적 약자 계층이나 불행한 일을 겪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심은 물론 周遊轍環(주유철환) 시기 생명의 위협 속에서조차 ‘斯文(사문)’을 들어 제자들의 불안한 마음을 어루만져주셨다.
孔子의 ‘絕四’는 아마도 周遊轍環을 함께 했던 제자들을 통해서 정리된 내용인 듯하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이 유추된다. 孔子가 魯(노)나라의 司寇(사구, 오늘날 우리나라 행안부장관) 벼슬과 재상직을 맡아 魯나라를 民心에 기반한 强國(강국)으로 만들었을 때, 이를 두려워한 이웃의 齊(제)나라가 이른바 ‘女樂士(여악사) 사건’을 일으켜 孔子를 노나라에서 떠나도록 만들었다. 孔子는 당시 중국 전역에 이미 聖人이자 제일의 유명인사로 통했을 뿐만 아니라 군병력에 대한 전략과 전술에도 능했기에 武力과 戰爭을 통해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각국의 제후들은 공자를 등용하려고 앞다퉈 초청했고, 그 초청을 받아들여 마침내 공자와 제자들의 철환주유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공자는 武力으로는 결코 천하의 화평을 이룰 수 없음을 알았기에 가는 곳마다 民本에 根幹(근간)한 聖人의 德治를 권유했다. 하지만 공자를 만나본 제후와 정치인들은 공자를 등용하여 政事를 펴게 되면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슬그머니 공자를 배척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암살하려고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공자는 자신이 아니더라도 爲民政治로 나아갈 그 나라에 적합한 인물을 추천하기도 했으니, 이것이 ‘공자의 絕四’에 담긴 내용이다. ‘絕’과 ‘毋’라는 글자에서 그 뜻이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끊을 절’인 ‘絶’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糸(실 멱)’에 ‘色(색 색)’을 합한 글자로 통용되는데(조선의 순조본 『論語諺解(논어언해)』본에도 ‘絶’ 로 썼다), 『康熙字典(강희자전)』를 비롯해 청대에 정리된 모든 經傳에서는 ‘糸(실 멱)’에 ‘刀(칼 도)’에 信標(신표)인 瑞信(서신) 곧 符節(부절)을 뜻하는 軍隊(군대) 指揮權(지휘권)이자 發動權(발동권)’을 뜻하는 卩(절, 㔾, 卪)의 변형인 ‘巴(파)’를 더한 ‘絕’자를 수록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北宋 때 발간된 『廣韻(광운)』에서도 “絕作絶은 非라(絕을 絶로 지음은 어긋남이라)” 했다. 곧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絶’은 ‘絕’의 변형자임을 알 수 있다. ‘糸(실 멱)’에 ‘色’을 넣어서 통용하는 까닭은 『周易』의 세 번째 괘인 屯(둔, ䷂)괘 大象傳(대상전)에서 언급한 經綸(경륜)의 綸에서 그 의미를 살필 수 있다. 필자가 『周易大觀(주역대관)』 中권에서 정리했듯이 綸은 ‘푸른 印끈(靑絲綬, 청사수)’으로, 천자로부터 兵權(병권)을 위임받아 發兵符(발병부) 주머니를 허리에 찰 때 매던 길고 넓적한 녹색의 비단끈으로, 권한을 상징한다. 인끈인 綸은 綬(수), 紱(불)이라고도 하는데, 신분에 따라 그 색이 다르다. 곧 ‘絶’이나 ‘絕’은 단순히 실을 끊어낸다는 뜻이 아니라 권력의 상징인 ‘인끈을 끊어내다’는 의미로 ‘권력을 내려놓다’ ‘권력에서 쫓겨났다’ ‘권력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毋는 ‘그만두다, 그치다, 말다, 금하다’의 뜻을 담고 있는데, ‘어미 母’에서 변형된 글자이다. 母는 포유류의 젖가슴을 나타낸 글자로, 어미가 새끼를 가슴에 품고 젖을 먹이는 데서 ‘어미’라는 뜻을 취했으며, 새끼가 커서 더는 젖을 먹이지도 않고 젖도 나오지 않기에 두 젖꼭지를 나타내는 ‘丶(점 주) 丶’ 대신에 ‘丿(삐칠 별)’을 넣은 ‘毋’를 써서 억지로 쥐어 짜가며 ‘~을 하지 않는다’ ‘~함이 없다’는 뜻을 취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공자의 ‘絕四’인 ‘毋意毋必毋固毋我’는 단순히 네 가지를 ‘끊었다’ ‘斷絕했다’의 뜻이 아니라 ‘권력을 잡으려고' 의도적으로 다가감도 없었고, 期必(기필)코 함도 없었고, 자신만이 옳다고 고집함도 없었고, 꼭 나만이라야 하심도 없었다’는 뜻이다. 仁義를 실현하기 위한 辭讓之心(사양지심)이자 오늘날 일반인들의 눈으로 본다면 讓步(양보)의 美德(미덕)이고, 代議民主主義(대의민주주의) 사회의 정치인들이 본다면 ‘웃기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공자의 '絶四'를 다시금 살피면서 오늘날 富와 權力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뚫고 기필코 내가 이기겠다고 고집하면서 宣傳煽動(선전선동)으로 사회분란을 일으키는 이들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
孔子의 ‘絶四’의 1백분의 1이라도 실천하려고 노력해보시라. 그러면 사회는 분명 양보의 미덕이 되살아나서 庶民(서민)인 뭇 백성들이 살맛나는 세상이 되리라고!
첫댓글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