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편지
황동규(黃東奎)
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는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Ⅱ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시어, 시구 풀이]
내 : ‘그대’를 짝사랑하는 서정적 자아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 : 서정적 자아는 자신이 ‘그대’에 대한 사랑이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일상적인 자연 현상에 비추어 나타내고 있다.
사소한 일 : 서정적 자아의 ‘그대’에 대한 사랑이 간절하고 깊다는 것의 반어적 표현
진실로 진실로 : ‘진실’의 반복을 통해 서정적 자아의 ‘그대’에 대한 사랑이 간절함을 표현함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 : ‘그대’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
눈, 꽃, 낙엽 : ‘그대’에 대한 사랑이 불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소재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 자신의 사랑이 ‘그대’에게는 해가 뜨고 바람이 부는 자연 현상처럼 특별할 것 없는 사소한 일로 느껴질 것이라는 표현이다. 자신의 사랑을 ‘사소한 일’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사랑이 간절하고 깊이 있음을 나타내는 반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언젠가는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 언젠가 ‘그대’가 외로움과 괴로움에 처한다면 그 때까지 간직해 오던 사랑으로 그대를 불러 보겠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은 오랜 세월 동안 변하지 않고 계속된 서정적 자아의 간절한 사랑을 나타낸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 서정적 자아는, 한없는 기다림의 모습을 한 자신의 사랑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며, 자신의 사랑이 더 이상 짝사랑이 아니라 ‘그대’의 사랑으로 응답받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서정적 자아는 ‘그대’를 향한 사랑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정적 자아는 또한 자신의 사랑이 그치기 전에, 먼저 저 눈이 그치고 그 다음으로 다시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다시 눈이 퍼붓고 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 부분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사랑이 불변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서정적 자아의 고백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자신의 사랑이 불변할 것이라는 고백으로 들린다. 서정적 자아는 그의 사랑이 골짜기에 퍼붓는 눈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그 꽃이 진 뒤에 다시 낙엽이 지고 다시 눈이 퍼붓고… 하는, 수없는 순환 뒤에야 그칠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 사랑이 계속될 것이라는 내용에나 들어맞을 ‘믿는다’라는 표현을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임을 믿는다.’라고 한 것 또한 이와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사랑이 언젠가는 그칠 것이라는 이 표현은 반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서정적 자아의 사랑은 골짜기의 눈과 마찬가지로 ‘퍼붓고’ 있을 뿐이다.
[핵심 정리]
지은이 : 황동규(黃東奎, 1938- ) 시인. 서울 출생. 서울대 교수. 1958년 <현대문학>에 ‘시월’, ‘즐거운 편지’ 등이 추천되어 등단. 여행을 통하여 외면적인 풍경을 묘사하되 단순히 그 풍경들이 외면적 묘사에 그치지 않고, 황량하고 삭막한 내면의 풍경들을 드러내는 데 그는 일정한 시적 성취를 보여 주고 있다. 시집으로 <삼남에 내리는 비>, <풍장(風葬)> 등이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서정적. 낭만적
어조 : 간결한 고백의 어조
표현 : 반어법. 반복법
구성 :
Ⅰ 사랑의 사소함에 대한 고백 - 실은 간절함을 나타냄
Ⅱ 사랑의 순간성에 대한 고백 - 실은 불변성을 나타냄
제재 : 짝사랑의 감정
주제 : 사랑의 간절함과 불변성에 대한 고백
▶ 작품 해설
이 시는 ‘그대’에 대한 화자의 절절한 사랑을 표현한 작품이다. 서정적 자아는 자신의 사랑이 아무리 사소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해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계절이 수없이 바뀌어도 그 사랑은 불변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이 시를 이와 같이 직설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놓으면, 그 해석은 결코 원래의 의미와 같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서정적 자아가 자신의 사랑을 사소하다고 말하고, 그 사랑이 언젠가는 그칠 것이라 말하는 것은 모두 반어적인 표현이다. 즉 이 시는 자신의 사랑이 짝사랑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와 사랑이라는 감정이 가진 유한성(有限性)을 알기에 이런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서정적 자아는 사랑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안다. 그것은 절절하게 퍼붓다가도 자신도 모르는 사인에 꺼져 버릴 수 있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속하는 것이다.
이 시의 반어(反語)는 바로 이와 같은, 인간 존재와 사랑이 가진 유한성에 대한 비극적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시의 중심적 표현 기법인 반어법은, 자신의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선언할 수 없는, 그러나 그 영원성을 스스로 믿으며 또한 ‘그대’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