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 천도
( "가자 남으로! 한양이 천년의 터전이다" )
한양천도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도읍지를 정하고 나라가 이사가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국채가 이사 가는 것이다.
우선 선발대로 상왕 정종이 대비와 함께 먼저 떠났다. 태종 이방원이 보현원(普賢院)까지 따라 나와 먼저 가는 형님을 전송했다. 임금이 구도를 떠나기 전 나라의 역사를 신도에 운반해야 한다. 국사(國史)를 운반하여 경복궁에 안치했다.
태종 이방원은 제릉(齊陵)에 배알하여 한양 신도로 옮기는 것을 고(告)하고 친히 인소전(仁昭殿)에 나아가 제사 지냈다. 한양으로 옮기는 것을 조상님께 고했으니 이제는 살아있는 어른을 찾을 차례다. 태조 이성계가 있는 태상전을 찾았다.
속내를 털어놓고 지내던 무학대사의 죽음으로 침울해 있던 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하여 술자리를 베풀었다.
한양 천도는 태종 이방원의 선택이라기보다 아버지에 대한 효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었다. '개경에서 탈취한 정권을 한양에 가서 아들에게 빼앗기고 개경으로 돌아왔다'라고 조롱하는 개경인들의 시선에 아버지는 괴로워했다.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개경인들을 피하여 소요산과 한양 그리고 금강산과 고향 동북면을 주유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또한 생모 신의왕후 한씨와 계모 신덕왕후 강씨마저 잃고 홀로 살아가는 아버지가 안쓰러웠다. 가까이 두고 모시고 싶었지만 변방으로 떠돌 때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제 사랑하는 부인 강씨의 정릉과 애지중지하던 막내아들 방석의 묘가 있는 한양으로 모시게 되어 다행이었다.
거가를 타고, 한양으로 가다
11월 8일. 드디어 임금의 거가(車駕)가 개경을 출발했다. 문무백관이 임금의 가마를 뒤따랐다. 임금의 행렬이 선죽교를 지나고 숭인문 마루턱에서 잠시 머물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송악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신령스러운 산이라 하여 개경인들이 숭상하는 산. 비록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고향의 산이나 다름없는 산이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순서를 바꾸어도 되지 않느냐고 스승에게 대들었다 '발칙한 놈' 이라 꾸중을 듣고 송악산을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렸던 일이 생각났다. 그렇게 호되게 가르쳤던 스승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두문동에 들어갔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스승 원천석을 이제 한양에 돌아가면 모시고 싶었다.
임금의 환도 행렬이 임진 나루터에 닿았다. 수십 척의 배가 동원되었다. 초겨울 강바람이 쌀쌀하다.
태종 이방원을 태운 배가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강심을 지날 무렵 아버지가 위화도에서 회군했다는 전갈을 받고 포천에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가기 위하여 부리나케 임진강을 건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때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장마철이었지. 나룻배를 타고 떠난 직후에 나타난 최영 장군의 수하.
그 때 그들의 손에 내가 잡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와 어머니를 개경으로 압송하여 아버지에게 인질극을 벌였을 때 아버지는 어떻게 나왔을까? 아니었을거야. 내가 정순공주를 희생시키듯이 아버지는 우리를 희생시켰을거야."
만감이 교차했다. 가정과 국가. 국가를 생각하는 사나이와 가족. 어쩌면 하나의 운명체인 것 같지만 한 덩어리로 동화할 수 없는 별개의 구성단위라고 생각되었다. 사나이 가는 길에 범부는(凡夫) 평탄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지만 혁명아(革命兒)에게는 그러한 길을 허용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를 돌보지 않고 가정을 소홀히 했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개경을 출발한 환도행렬은 사흘 만에 한양에 도착했다. 경복궁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목멱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경복궁. 피가 튀고 생명이 갈렸던 곳이다. 고개를 들어 오른쪽을 쳐다봤다. 인왕산이다.
한양에 별로 좋은 기억이 없는 태종 이방원에게 그래도 인왕산 아래에서 아들 하나 얻은 것이 뿌듯했다. 이 아들이 훗날 세종대왕이다.
도성에 들어온 태종 이방원은 제일 먼저 종묘를 찾았다. 환도를 조상님께 고하기 위해서다. 종묘 알현을 마친 태종 이방원은 연화방(蓮花坊)에 있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조준의 집에 들었다. 아직 궁궐 공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태종 이방원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 궁궐 공사가 끝나지도 안았는데 환도를 결행한 것이다.
이튿날.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공사 현장을 찾아 이궁조성 제조 이직을 불러 치하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뿐만 아니라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동원된 백성과 군사들을 위로하고 음식과 술을 내려주었다.
10월 19일 이궁이 완공되었다. 임금이 정사를 살피는 정전과 편전이 9칸, 승정원청과 부속실 구실을 하는 행랑이 14칸. 침전을 포함한 내전이 118칸이었다.
천막에 거쳐한 이성계의 의도
이제야 궁 이름을 창덕궁(昌德宮)이라 명명했다. 궁궐 공사가 한창이던 2월에 찾아와 정전에서 집무를 보는가 하면 공사가 완공되기도 전에 환도하여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 태종 이방원의 급한 성미를 알 수 있다.
궁 이름과 각종 전각 명칭을 지어놓고 경복궁 공사를 지휘하던 정도전과는 사뭇 다르다.
새로 지은 궁궐에서 축하연이 베풀어 졌다. 한양시대의 개막이다. 용상에 앉아있는 임금에게 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하례를 올렸다.
이어 의정부찬성사 권근이 종친과 공신 그리고 육조(六曹)의 관료를 거느리고 헌수하였다. 권근이 화악시(華嶽詩)를 지어 올리고 이에 뒤질세라 하륜이 한강시(漢江詩)를 지어 바쳤다.
"한강물은 예전부터 깊고 넓으며 화악(華嶽)산은 푸르고 푸르도다. 한강은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화산(華山)은 울울(鬱鬱)하여 푸르고 성(盛)하니 우리 임금 오시는 길거리는 아름답고 백성은 즐거워서 노래하도다."
태상왕(太上王)이 마지막으로 개경을 출발했다. 태조 이성계가 임진나루를 건넜다는 소식을 접한 태종 이방원은 양주에 나가 태조 이성계를 맞이했다.
"내가 양도에 내왕하느라 백성들의 생업에 지장을 주었는데 이제부터는 한군데 정해서 살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양도(兩都)란 개경과 한양을 이르는 말이다. 태조 이성계는 아들 방원에게 불만이 쌓이거나 부인 신덕왕후가 보고 싶으면 훌쩍 개경을 떠나 한양으로 떠났다. 자신은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새벽에 떠나고 밤에 들어 왔지만 그래도 백성들에게 폐를 끼쳐서 송구하다는 얘기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태종 이방원과 태조 이성계는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부자지간의 잠자리였다. 이튿날 태조 이성계의 행차가 노원역에 이르러 하룻밤 묵게 되었다. 행궁도 없고 객사도 없다. 노원 들녘에 막사를 치고 야영했다. 태상왕과 현존 임금이 천막에서 밤을 보낸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개경을 떠난 사흘째 되던 날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를 모시고 한양에 입성했다. 무안군 방번이 쓰던 집을 태상궁(太上宮)으로 정하고 들기를 권했으나 태조 이성계는 거절했다. 어디로 모실까? 방원은 난감했다. 태조 이성계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장막을 치고 기거했다.
창덕궁과 방번의 집으로 들지 않고 천막에 거처하는 태조 이성계의 의도는 '내가 들어가 살 궁실을 새로 지어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