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교수는 6개월 동안 한양대에서 염색체와 씨름했다. 그리고 성모병원에서 실험실 시스템을 만들면서 말뚝잠을 자며 염색체 연구에 매달렸다. 장모가 “둘이 사귄 지 8년이 됐는데 연애만 할거냐”고 결혼날짜를 잡았어도 밤낮없이 염색체와 씨름하다 결혼 1주일을 앞두고 스승과 주변 사람에게 결혼을 알렸을 정도였다. 동기들이 내과 전문의 시험을 준비할 때에도 김 교수는 자나 깨나 염색체뿐이었다. 선후배나 동기 대부분이 김 교수가 전문의 시험에서 떨어질까 걱정할 정도였다.
국내 최초 비혈연간 골수이식 등 백혈병의 최고 권위자로
김 교수는 군의관 근무 뒤 김춘추 교수의 첫 제자가 됐지만 스승 밑에서 연구에만 몰두할 수가 없었다. 연구에 성과를 올리는 만큼 환경은 거꾸로 갔다. 임상강사를 마칠 무렵이 됐지만 성모병원에는 그를 위한 교수 자리가 없었다. 그는 1994년 개원 준비 중인 삼성서울병원의 ‘러브콜’을 받고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승은 김 교수를 껴안으며 분가(分家)를 축하했다. 김 교수는 삼성의 지원을 받아 미국 LA, 어바인, 시애틀 등을 돌며 분자생물학의 기초를 다졌으며 그곳 의사들의 환자치료계획서와 연구계획서 자료파일 100여 개를 복사해서 귀국, 밤을 새워 분석하며 임상 준비를 했다. 그러나 스승 김춘추 교수는 제자의 복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스카우트 파동’에 휩쓸린 스포츠선수 이상으로 가슴앓이를 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성모병원에 복귀했다.
김 교수는 성모병원에서 국내 최초의 행진을 이어갔다. 운도 따랐다. 1995년 8월 서울대병원에서 비혈연간 골수이식을 하기로 예정돼 있었지만 기증자가 기부를 거부하는 바람에, 10월 국내 처음으로 비혈연간 골수이식에 성공했다. 96년엔 면역계가 피아를 구분하는 표식인 사람백혈구항원(HLA) 6쌍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사람 간의 골수이식, 97년에는 탯줄조혈모세포 이식에 처음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20여 명의 환자에게 비혈연간 골수이식에 성공했지만 상당수는 얼마 넘기지 못하고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다. 더구나 부검을 기피하는 문화가 있는 국내에서는 원인조차 알 수 없어 남몰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김 교수는 1997년 ‘골수이식의 산실’인 미국 프레드허킨슨 병원에서 밤낮없이 분자생물학에 파고들며 그 원인을 찾았다. 또 골수이식을 받고 숨진 사람 100여명의 의무기록을 복사, 유형별로 정리해서 나중의 임상에 대비했다. 미국의 연구진은 김 교수에게 최고의 연구 환경에서 근무하며 최고의 성과를 내보자고 권했지만 스승이 미국까지 와서 김 교수의 미국 정착을 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