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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류한가족 전북교구 원문보기 글쓴이: 청주사랑(오종필)
하늘이 내신 특별한 분(문선명 선생님) & 눈부시게 빛나는 원리강론
제4지구에서 전환기를 보내신 박광선 충남 천안 원로목사
"그 영통인은 나를 보자마자 제대로 알아보는 것 같았다. 나에게 수많은 영인들이 함께 왔다고 했고, 당시 원리강론을 소지하고 갔는데, 자꾸만 책을 바라보며 그 책에서 눈부신 빛이 난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 책은 세계 만민을 살리는 책이 될 거라고 증거하지 않는가! "(본문중에서)
1. 꿈에서 만났던 문선명 선생님
나의 신앙의 첫 출발은 이상한 인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64년 어느 여름날, 우리 집에 낮선 젊은 청년 두 사람이 찾아왔다. 당시 작은 아버지께서 마을 이장을 맡고 계셨는데, 이들 청년이 우리 마을로 농촌계몽을 나온다고 하여 집에서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시골 마을이라 툇마루에 앉아 세 분의 대화가 전개되었는데, 때 마침 마당에서 퇴비작업을 하던 나는 달콤한 대화에 솔깃함을 느꼈고, 그것이 내가 통일교회와 관계 맺게 된 첫 번째 만남의 인연이 되었다. 두 청년 중 한 분이 나중 알고 보니, 진도에 최초로 인도자 발령을 받고 부임했던 박길년 지역장이셨다.
그 분은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서너 시간 동안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본래 화술이 뛰어난 달변가이셨는데, 말씀의 은혜는 실상 나에게 전수되고 있었다. 말씀의 내용은 주로 인간의 가치관문제를 비롯해서, 문화권 발전사를 거론해 가며 한국이 장차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매우 신기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은 장시간 대화를 마친 후 큰 가방을 내 방에 맡기고 곧 다시 오겠노라며 떠났다. 그들과 직접 인사를 나누거나 대화를 했던 건 아니었지만, 귀 동냥으로 들었던 말씀 속에서 나는 큰 희망을 발견했고, 속히 그분들이 우리 마을에 와서 계몽활동을 해주기를 간절히 기대했었다.
그 당시 나는 중학교를 다니다가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하고 농사일에 매달리며 꿈도 희망도 상실한 채 좌절과 절망의 수렁 속에 허우적거리는 상황이었기에 더 절실히 기다려졌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한대로 다시 나타나질 않았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 초입의 어느 날, 다른 청년이 대신 와서 올 수 없게 되었다며 가방을 가져가 버렸다.
마음에 뭔가 큰 것을 놓친 것 같은 허전함에 빠져들던 얼마 후, 하시호(1800가정)라는 친구가 무슨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날더러 조용히 만나자고 불러냈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 동창생으로 당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의 결론은 나에게 수련회에 참가해보자는 권유였다. 별로 관심 없어 시큰둥하고 있는데, 수련회 갔다 왔다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을 보니 지난해 우리 집에 왔던 그 청년이 거기 있지 않는가! 사진을 대하니 너무도 반가웠고 그 청년을 꼭 만나고픈 마음에 선뜻 수련회를 참석하겠노라고 수락했다.
그리고 수련회를 가기 전날 밤, 나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된다. 한 번도 보지 못하던 분인데 한복차림으로 나를 찾아와 빙그레 웃으시며 바라보고 계셨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수련회에 참석하였는데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까닭은 어젯밤 꿈속에 나타나신 그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나의 꿈 이야기를 전했더니, 박길년 지역장은 종종 있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인도네시아 사라와크 국왕 안토니 브루크스 씨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분은 계시를 받고 문선명 선생을 찾아 나섰고, 드디어는 한국을 찾아와 선생님께 경배를 드리고 갔다는 신기한 이야기였다.
당시는 아버님(이하 문선명 선생님을 칭함)이라 하지 않고, 선생님이라 호칭하던 시절이었는데, 통일교회는 초창기 시절부터 이렇듯 선생님을 미리 계시를 받고 찾아온다거나 꿈에 몽시(夢示)를 받고 오신 분들이 허다하다고 하였다. 나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을 꿈에서 만났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고, 통일교회 입교 전에 문선명 선생님을 먼저 만났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2. 종살이를 통해 만났던 참아버님
지역수련을 마치고, 다음에는 전남 광주에서 있었던 지구수련에 연이어 참석했다. 지역 수련회를 받던 때가 1965년 2월 초순이었는데 그 수련회를 마치고 나자 지구수련을 가기를 강력히 권고 받았다. 마음으로는 꼭 가보고 싶었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일찍이 6.25사변 당시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마저 가출하여 고아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조부모님과 작은 아버지 밑에서 시키는 일만 하던 처지였기에 작은 아버지의 허락을 득(得)해야 했는데 수련회 이야기를 꺼내자 ‘미친 놈’이라며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시호 친구와 야반도주를 하여 해남에서 머슴들이 자는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광주까지 걸어갈 작정을 해보았지만 난생 처음 육지에 나온 촌놈들이라 지리를 제대로 몰라 그냥 버스 편으로 광주에 갔다.
지구 수련을 4월 중순경에 마치고 지역수련을 함께 이수한 박석무, 하시호와 동행하여 전라북도 남원으로 사업을 해가며 도보로 올라갔다. 고무신을 신고 먼 길을 도보로 가다보니 발가락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기도 했다. 남원에 도착하여 산동면 중절리로 임지배정을 받고 개척전도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하시호는 건강에 이상이 생겨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석무 선배와 둘이서 임지에 갔지만 실상 마을도 작은 부락인데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한 상태가 되어 나는 그 마을 최고 유지인 전 산림조합장 댁에서 일을 도와드리며 봉사활동을 통하여 신임을 쌓았다.
그렇게 출발된 봉사활동은 나중에는 완전히 그 집에 매인 머슴살이가 되고 말았다. 남의 집 종살이를 하던 1965년 10월 10일은 나에게 영원히 잊을 수없는 한날이 되었다. 그날은 참부모님께서 세계 40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시던 날인데 선배는 자유로운 몸이라서 귀국 환영행사에 올라갈 수 있었지만 나는 매인 몸이라 가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마음 아픈 현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발을 헛디뎌 높은 절벽에서 추락하는 큰 사고를 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온통 얼굴이 찢겨져 피투성이가 된 채로 하산하다가 뒤늦게 올라오던 한 동료의 부축으로 병원으로 달려 응급 치료를 받게 되었다.
온통 얼굴을 붕대로 감싸 맨 상태에서 다음날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하얀 소복 차림의 할머니께서 절벽에서 떨어지는 나를 치마폭으로 받고 계셨고, 거기에서도 아버님(문선명선생님) 얼굴이 슬쩍 지나치시는 걸 보여주셨다. 치마폭으로 받으신 분은 어린 시절 나를 무척이도 사랑하셨다는 증조할머니가 틀림없었다. 꿈을 통하여, 돌아가신 분이 그토록 역력히 나를 구해주는 모습을 보고 나는 영계가 분명 살아있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또한 나는 그 당시 사고에서 죽지 않은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다.
사고 이후 나는 그 현장을 다시 가보지는 못했지만 지게와 연장을 수습하러 갔던 분이 그 현장을 보고 대성통곡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냐하면 내 또래의 자기 아들도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기에 자기 아들 생각하며 그러기도 했겠지만, 사건 현장이 너무도 험난한 절벽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리산 줄기의 남원은 험산준령과 높다란 절벽들이 유난히 많은 곳으로, 나는 당시의 사고로 눈을 잃을 뻔했고 얼굴이 상처투성이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생생하게도 영적인 도움을 통하여 나를 살려 주신 배후가 있었음을 확실히 실감했다.
나는 1년 동안 남의 집에서 아무런 보수 없이 종살이를 했는가 하면 돌아보니 옷 한 벌도 얻어 입은 적이 없었고, 그토록 심한 상처를 입고 떠나는 자리에서도 여비 한 푼도 주지 않았던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괘씸하고 생각할수록 억울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나를 모진 시련 속에서 연단시키려는 그 어떤 뜻이라도 있겠지 하며 분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야만 했다. 참아버님이 온갖 만고풍상으로 걸어오신 길이 새삼스럽게 떠올랐고 나도 그 분신체로서 겪게 되는 수난이며 억울함이라 생각되어 참아버님이 더욱 불쌍하고 측은하게 다가왔다.
3. 실제로 처음 만나본 참부모님
내가 참부모님을 처음 만나 뵙게 된 날은 1967년 1월 1일 초하루 날이었다. 그 전날 1966년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통일산업 취업차 강진과 영암지역장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 협회본부를 방문했던 자리에서였다. 이날은 내가 서울구경을 처음해본 날이자 협회본부에 첫발을 들여놓은 역사적 순간이다. 이날 꿈에도 그리던 참부모님을 뵙는 자리였기에 도대체 어떤 분인가 하는 궁금증을 갖고 세세히 살펴보기도 했다.
그리고 곧바로 수택리 통일산업에 들어가 산탄 공기총 목공반에 투입됐다. 수택리 생활의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지독하게 힘들고 어려운 자리였다. 말이 취업이지 한 달에 급료라는 명목으로 아마 260원을 받았던 걸로 기억된다. 그 돈은 급료라기보다는 이발과 목욕비로 지급되었던 돈이다.
차가운 날씨에 화목을 피워놓고 작업하다 무릎에 화상을 입었어도 그 치료비마저도 나오질 않아 서울 고모 집에 가서 치료를 받고 와야 하는 때도 있었다. 서울로 치료차 가던 날 영하 17도의 차가운 날씨에 장갑도 끼지 않고 맨손으로 벌벌 떨어가며 전차를 타러갔던 그 일은 지금도 생생해서 잊히지 않는다. 직장에서의 일과는 새벽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각자 주어진 책임분담을 완수하려면 전력을 다해도 턱없이 부족했다.
고생을 너무도 심하게 시킨다 싶어, 나는 속으로 “이거 공산주의보다 더 악랄한 집단 아냐?” 할 정도로 의구심과 반발 심리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문승균 사장님과 직접 총 개머리판 재단 작업을 함께했던 보람, 통일산업 초창기 시절에 동참해 공적인 일에 참여했다는 일말의 자부심은 잊을 수가 없다.
그중에도 가장 귀한 영광의 시간들은 참부모님과 함께 하는 기도회 시간이었다. 참부모님께서는 거의 매일 망우리고개를 넘어 수택리를 다녀가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작업을 하는 우리는 오실 때마다 다 뵐 수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운 좋게도 밖에서 작업하다 부모님과 마주치면 우리를 통일동산으로 데려가셔서 말씀도 해주시고 기도회를 가지셨는데, 참으로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함께 일하던 아가씨들에겐 좋은 신랑감 만나게 해 주신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대부분 430가정 축복에 들어갔던 주인공들이다. 수택리에서 일했던 기간은 약 5개월 남짓이지만 참부모님을 가까이서 뵈오며 일했던 그 시간이 더없이 귀하고 값진 추억으로 남아 있다.
4. 영적 역사를 통하여 만난 참아버님
나는 1971년 여름, 군대를 마치고 큰 결심을 한 적이 있었다. 3년이란 목표를 설정하고 무작정 상경하여 500만원을 손에 쥐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당시의 500만원은 요즘 환산한다면 적어도 몇 억쯤은 되리라고 짐작해 본다. 남자가 적어도 무슨 일을 하던 그만한 돈은 있어야만 하겠다는 야심이었지만 무일푼의 몸으로 그 고지 달성은 그리 만만한 목표가 아니었다.
처음 서울 남산에 올라 사방을 휘하고 둘러보니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전깃불과 수많은 집들이 무수히 가득한데, 내가 머무를 방 한 칸 없다는 비참한 신세가 너무도 초라했다. 인류의 구세주로 오셨던 예수께서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고 한탄하시던 바로 그 심정을 뼈저리게 체휼해보았다.
나는 서울 남산과 서울역 주변에서 하드(얼음과자) 장사와 우산 장사부터 시작해서 별의별 장사를 닥치는 대로 해나갔다. 그런가 하면 대천 해수욕장에서 장사를 할 때는 맨발로 뛰어다니다보니 곰발바닥이 되기도 했고, 무주구천동에 들어가서는 하마터면 뱀 잡는 땅꾼이 될 뻔도 했다. 떡 장사를 비롯해서 농산물 장사, 화장품 장사에다 완구장사 등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전국을 무대삼아 뛰어다녔다. 누가 남긴 말인지는 몰라도 “눈물어린 빵을 맛보지 않은 자,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을 나는 온몸으로 체득하며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경험하였다.
전국 곳곳을 누비며 우여곡절 끝에 강원도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강원도 양양에서 삼립 빵 대리점을 차려놓고 일을 하던 차, 나는 다시 뜻 앞에 붙잡혀 들어왔다. 그게 제1차 기동전도단 활동이었다. 비장한 각오로 나섰던 나의 목표를 한 순간에 접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극적인 대전환이었고, 제2의 인생 도박에 뛰어든 내 인생의 새로운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했다. 500만원의 꿈을 백지상태로 돌려놓고 과감한 결단으로 기동전도단에 입단하여 소정의 수련을 마친 나는 전북 팀으로 배정받아, 각 교회를 순방하며 사업(펀드레이징)과 전도 활동 등을 펼쳐나갔다.
그렇게 활동하는 도중에 이상한 영적 현상을 체험했다. 맨 처음 나타난 영적체험은 온몸이 떨려오는 진동역사였다. 마치 시골에서 무당들이 씻김굿을 할 때 손대를 잡으면 손이 떨리듯, 그렇게 전신이 떨리는 기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던 현상이 조금 더 진행되더니 이상한 몸짓으로 발전되어지고, 단원들의 심정검토를 하는가 하면, 알 수 없는 글씨로 무언가를 표현하려 하기도 했다. 장난기가 많던 후배 하나는 나에게 사탄이 들어왔다고 내 등을 때렸다가 뜨거운 불에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영적 역사는 임실 오수에서 그 첫 번째 현상이 일어났는데, 그러한 영적 현상은 잠시 멈춘 듯하다가 무주교회에 가서는 기묘한 꿈으로 나타났다. 점심을 먹고 오후 활동을 나가기에 앞서 잠시 휴식시간이 있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오침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잠시 눈을 붙이려던 찰나, 비몽사몽간에 나는 깜짝 놀랄 꿈을 꾸었다.
처음엔 햇살처럼 밝은 빛이 비쳐오더니 거룩한 한 형상이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얼굴 용안은 워낙 밝은 빛이라 눈이 부셔 제대로 살펴볼 겨를이 없었지만, 금빛 찬란한 그 모습은 얼굴을 지나 복부 쪽으로 내려가다 하복부에 이르러서는 하도 거룩한 형상인지라 그 거룩한 상을 바라보니 내 머리가 두 조각으로 쫙 갈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불가(佛家)에선 이런 경험을 했다면, 각(깨달음, 覺)을 했다고 말하리라 여겨진다. 내가 겪은 그 체험은 평생 처음 있었던 일이었고, 그 순간의 기쁨은 말로 형용키 어려운 희열로 가득 찼다. 나는 꿈에 나타나신 그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그렇게 스스로 확신했다. 그후 나는 영적 현상의 도가 점점 높아가기 시작했다. 익산 함열과 김제에 이르러서는 매우 놀라운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신문(주간종교)이나 일상용품을 가지고 펀드레이징을 하던 중인데, 한번은 배가 고파 어느 식당에 들어가서는 식당 주인에게 뭐든지 대접하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 하니, 주인장은 다소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무료로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고, 어느 기성교회를 찾아가선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대뜸 호통을 치며 일갈을 날리기도 했다.
또한 사업도 평소와는 전연 다른 스타일로 전개했다. 보통 사업을 나가면, 물건 하나 팔아달라고 사정하기 마련인데, 나는 아주 당당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으면, 한곳으로 모이도록 손짓으로 권유를 하고, 모여진 군중들을 향해 “나는 세계평화를 위해 나온 사람이다. 당신들은 뭐든지 맘에 드는 걸로 하나씩 가져가도록 하라!” 이런 식으로 아주 명령하듯 권고를 했다. 그런데도 그날은 평소의 몇 배 이상의 수입을 올렸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저녁 늦게야 홀로 교회에 도착했다. 교회에 도착해 기도를 하는데 내 입에서는 놀랍게도 아버님의 음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도 역시 나의 기도가 아니었다. 아버님 역사가 일어나게 되니 모든 단원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원들을 모아놓고, 아버님의 입장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아버님 역사는 나 이후, 목포의 지역장도 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영적 역사의 보고를 받으신 아버님은, 영계역사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셨다고 전해 들었다.
아버님의 음성이 나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을 보고, 나는 아버님의 음성은 바로 하늘의 음성이라고 판단을 해 보았고, 앞서 무주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형상도, 광주에서 갖게 된 집회석상에서 아버님과 일치를 이루는 경험을 거치면서, 아버님은 실체를 쓰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깊게 각인되었다.
반면 영적 역사는, 그후 스스로 자제하여 중단하고 말았는데, 영적 역사에는 사(私와 邪)가 개입되는 경우가 있기에 위험성을 발견해서 그런 것이다.
5. 개척지에서 만난 참부모님
1차 기동대를 수료하고 나는 개척 전도지에 자진하여 뛰어들었다. 전라북도 부안군 주산면 신성리라는 마을로, 한 겨울에 이불보따리 하나 걸머메고 찾아가던 당시의 내 모습은 흡사 영락없는 방랑 김삿갓이었다. 어떤 연고가 있어서 그 마을에 갔던 것은 아니고, 다만 주산면 쪽으로 나가보라는 임지배정을 받고 무작정 가다가 신성이라는 마을 이름에 끌려 그 마을로 찾아갔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황혼의 저녁 무렵에 마을 이장을 찾아 농촌계몽을 하고 싶다고 부탁하고, 냉방인 새마을회관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중고생들을 불러 모아 야간 학습지도를 했다. 이런 야학은 군 입대 전에 고향에서 1년 이상 해본 경험도 있고 해서 자신감이 있었다. 학생지도를 하다 보니 밥 먹는 문제는 학부모들의 초대로 어느 정도 해결됐다.
개척지에서 있었던 일을 다 기술하자면 한권의 소설을 써야 할 내용이기에 여기서 그 이야기를 다 풀어 놓을 수는 없다. 어느 날은 누구의 부탁을 받고 상당히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분은 알고 보니 점을 치는 영통인(무속인)이었다. 그 영통인은 나를 보자마자 제대로 알아보는 것 같았다. 나에게 수많은 영인들이 함께 왔다고 했고, 당시 원리강론을 소지하고 갔는데, 자꾸만 책을 바라보며 그 책에서 눈부신 빛이 난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 책은 세계 만민을 살리는 책이 될 거라고 증거하지 않는가! 영계를 통하는 사람은 이런 것까지도 알 수 있나 싶어, 나는 새삼 놀랐다. 그리고서 다음에 내가 있는 곳을 방문하겠다고 약속을 하기에 그러기로 하고 돌아왔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내가 가르치고 있던 학생 집에서 탈곡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 영통인이 불시에 찾아왔다.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는 것을 보고, 학생 부모를 향하여 대뜸 일갈을 날린다. “어떻게 선생님이라 하면서 머슴처럼 일을 시키고 있느냐?”고 했다. 그 말에 우리는 모두가 놀랐다. 그리고 그녀는 정성껏 계란 한 꾸러미와 쌀을 한말쯤 놓고 갔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 나에겐 큰 시련이 닥쳤다. 까닭은 내가 통일교회에서 나왔다는 것이 우연히 밝혀지면서 그 동리에서 쫓겨날 뻔 했던 일이다. 알고 보니 내가 가기 전에 그 마을로 개척 나간 일이 있었는데, 당시 교회를 세운다고 청년들이 남의 집 처마 밑에 있던 나무를 몰래 가져오다가 들통이 나 쫓겨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로 큰 홍역을 치른 다음, 추운 겨울에도 냉수목욕을 해가며 정성들이던 차에 이번에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뜻하지 않은 기묘한 사건에서부터 비롯된다. 학생 중 가장 기대했던 한 여학생이 가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학생은 알고 보니 잘못된 일로 임신 중이었고, 출산 때가 가까워져 불가피하게 집을 뛰쳐나가 구세군교회에 들어가 해결하려는 속셈이었다. 그 문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여학생 어머니를 협회본부로 데려가, 그곳에서 기도하시던 영통한 할머니들로부터 큰 깨우침을 받는 그런 계기로, 전 가족이 수련을 받고 가정 복귀를 하였다. 그런가 하면, 어떤 여학생은 1800가정 축복을 받고 현재도 목회 사모로서 뜻 전선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나는 지금 돌아보면, 개척 전도지가 가장 은혜가 넘치던 곳이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곳을 찾아가는 심정부터 사무친 하늘과의 교감이 이루어졌고, 하늘은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며 때로는 시련으로, 때로는 은혜로 간섭하시는 체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척지의 생활은 참부모님께서 배후에서 늘 함께해 주셨기에 나는 참부모님과의 깊은 만남을 체험했다.
6. 특별정성을 통해 만난 참부모님
개척전도를 시발로 출발된 나의 목회생활은 내가 가야할 천직이라 생각했고, 오로지 공직생활에만 전념했다.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은 기업체나 다른 직장들을 찾아 떠나가기도 했지만 나는 목회공직이 가장 귀하다는 걸 알았기에 오직 한길에 전념했던 것이다.
나는 어려운 곳으로 보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누구도 가기 싫어하는 그런 곳까지 들어가 내 젊음을 담보로 청춘을 불사르기도 했다.
찾아간 곳은 진안 도통교회로 식구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오는 소수인데다 교회는 누에를 기르던 잠실이었으니, 환경의 열악성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그곳에서 나는 신혼초의 생활을 할 때인데, 새로 부임하신 양준수 교구장 내외분은 하도 어이가 없으셨든지, 눈물어린 기도를 하시며 다른 곳으로 즉시인사 조치를 해주시기도 했다.
개척전도와 교회장 생활만도 10년 이상의 경험을 거쳐 경남 하동교역장, 진도와 해남교역장을 거쳐 목회공직 24년 이상자로 선정되어, 국가메시아로 나가게 되는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목회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들은 외롭게 개척지와 목회임지를 찾아가던 일들이며, 식구도 없고 어려운 교회를 붙들고 몸부림쳤던 숱한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가 하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애국충정의 심정에 불타 활동했던 구국세계대회 활동(서울 창동에서 조장으로 활동), 면면촌촌 도서지방까지 누비며 외쳤던 승공강연 등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간직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건은 아버님 댄버리 교도소에 들어가실 때의 일이다. 당시 아버님은 탈세혐의로 미국 법정에 서시게 되었고, 결국은 댄버리 교도소에 입감되어 수형생활을 하셔야만 했던 기막힌 일이 진행되고 말았다. 나는 아버님이 교도소에 가실 수밖에 없다는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미국 레이건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쓰고 21일간의 특별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당시 건강도 별로 좋지 않던 상황이라 동료들의 만류가 있기도 했지만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금식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금식은 무난하게 성공적으로 잘 진행되었다. 금식 기간 동안 설교단상을 지키는 것은 물론, 멀리 수십 리가 넘는 횡천면까지도 심방을 다닐 정도였으니, 보는 이마다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금식 정성을 승리로 끝내고 나니, 가장 놀랐던 사람은 박용수 씨라는 분이다. 이분은 내가 승공연합 지부장으로 일찌감치 점찍었던 분인데, 자신이 쌍계사 신도회장직을 맡고 있었기에 극구 사양해온 분이셨다. 그분은 동국대 출신이며 정보계통에 있던 분으로 젊은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다. 그런데 21일 금식을 마치고 나자 그 분이 자청하여 군지부장을 맡겠다고 하지 않는가!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는데, 그분은 나의 정성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실토했다. 그분이 지부장을 맡겠다는 그날부터 승공연합 활동은 일사천리로 일이 잘 풀려나갔다. 여성회장도 우리 유치원 자모회장을 점찍어 두었지만, 원불교 부녀회장이란 이유로 사양하던 입장인데, 박용수 회장과 한자리에서 만나보니 의외로 쉽게 일이 풀렸다. 이런 식으로 사무국장과 청년회장도 아주 좋은 사람들로 금세 자리가 잡히고, 각 면단위 지부장 역시 끌끌한 인물들로 진용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나는 이들을 모아놓고 평소의 지론을 역설했다. 지금껏 우리 단체는 위만 바라보는 형식에 그치다보니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 공산주의가 바로 그런 형태다. 중앙에서 교육을 받고 온다거나 큰 행사를 갔다 오면 누구나 쉽게 은혜와 감동을 받지만 그것은 모두가 일회성이며 일시적인 현상뿐이다.
이것은 마치 ‘보자기로 뜬 구름 잡는 허상’에 불과하다. 감동과 감화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현장에서 뿌리를 내리느냐 하는 토착화작업이 우리가 해야 할 절대 과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십시일반 정성을 모으고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쳐나가는 지속적인 활동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동시에, 우리의 활동은 보고용 가식적인 활동이 아닌 실제적 실세화 작업을 해야만 한다고 강력히 주장을 폈다. 그 모임의 반응은 대단한 효과를 가져왔다. 즉시 얼마씩의 회비를 거출하기 시작했고, 나는 군 지부장을 앞세우고 각 면단위와 큰 부락들을 찾아다니며 승공강의로 신바람을 일으키며 외쳐댔다. 그 결과 1년도 채 못 되어, 경남도지부에서 모범지부로 선정되기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뿌듯하고 큰 보람을 느꼈는지 모른다.
한 가지 아쉬웠던 일은 좀 더 하동에 머물러서 일하지 못하고, 아버님의 환고향섭리 발표에 따라 고향 진도로 떠나온 사실이다. 내가 진도에 온 이후 그들은 나를 잊지 못하겠다며 관광버스 두 대를 동원하여 공로패와 선물까지 준비해서 찾아왔던 일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댄버리 고난을 앞두고 죽음을 각오하며 드렸던 21일 금식의 정성은 비록 아버님의 고난 길을 막아드리진 못하였지만 아버님의 소원이신 승공활동의 확고한 기반을 닦아드렸다는 점에서는 정성의 효과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승공연합 군지부 활성화를 놓고 노심초사하던 나에게 특별 금식정성 하나로 만사가 해결되는 것을 보면서 참부모님께서 모든 대사에 앞서 정성들이는 까닭을 깨닫기도 했다.
7. 낚시터에서 만난 참부모님
참부모님을 가장 가까이서 많이 뵐 수 있었던 기회는, 다름 아닌 낚시터에서였다. 맨 처음은 완도 명사십리를 한 바퀴 도시며 낚시하실 때인데, 배안에는 전남 목회자 너댓 명이 동승했던 걸로 기억된다. 그때 아버님은 섬 주변을 돌아보시며 혼자 말씀처럼 “농어촌이 저렇게 가난하고 못사는 까닭은 지도자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야” 라고 탄식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후 아버님과의 낚시는 미국 알라스카 코디악과 뉴욕 허드슨 강에서의 낚시로 이어졌는가 하면, 파라과이 판타날 낚시 40일 수련이라는 진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중에도 아버님의 진면목을 발견했던 알라스카 코디악 낚시는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알라스카에서 낚시를 하게 된 것은 전국 시군단위 목회자 초청 방미연수의 기회였다. 방미연수단은 전체 124명이었는데, 알라스카 코디악을 출발로 뉴욕과 워싱턴 주요 관광지를 다 돌아보고, 보스턴지역을 거쳐 나이아가라 폭포와 서부지역 LA지역과 그랜드 캐니언, 후버 댐, 라스베이거스 등을 두루 돌아본 후, 마지막 하와이 섬까지 둘러보는 장장 28일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워싱턴타임스사를 방문하기도 하고, 벨베디아와 이스트 가든까지 우리 일행을 초청하여 참부모님께서 특별선물까지 하사하셨던 그 크신 은혜는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남아지게 되었다. 이 당시 왜 코디악 낚시가 잊혀지지 않는가 하면, 아버님의 놀라운 정성과 투지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첫날부터 우리에게 아버님은 강행군의 수련을 시키셨다. 하루 종일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면 우선 뱃멀미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고, 고기 낚는다고 시달리다보면 피곤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바다낚시를 하고 왔으니 편히 쉬라고 할 줄 알았는데 3시가 넘도록 말씀과 화동회의 시간을 갖고 나서야 취침을 허락하셨다.
그런데 말씀하시길, 새벽 6시에 바다에 나가야 한다고 하시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잘 자야 3시간뿐이다. 그래서 곤한 잠에 떨어져 자고 있는 사이 누군가 일어나라고 기상을 선포한다. 깨어 보니 5시 40분경이었고, 아버님은 이미 바다에 나가셨단다.
첫날은 해변에서 연어낚시를 했지만, 이튿날에는 먼바다로 나가 할리벗(광어)낚시를 했다. 이날 나는 운좋게도, 할리벗 88파운드짜리를 낚아 1등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낚시를 잘해서 낚아올린 쾌거는 아니었다. 실은 낚시라면 아예 문외한이던 나에게 고기가 와서 내 낚시에 물어주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아버님은 성에 차지 않으신 듯 시상도 하지 않고 기뻐하는 마음 대신 200파운드 이상을 잡아 올리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우리는 다음 날 더 열심히 낚시에 임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큰 고기가 낚여지는 건 아니었다. “대어를 낚으려면 선산에 봉황이 울어야만 한다.”고들 했다. 3일째 되던 날, 낚시를 그만하고 뉴욕으로 들어가라는 긴급지시가 떨어졌는데, 공교롭게도 나는 뉴욕에 들어가질 못했다. 까닭은 우리 캡틴이 연락을 잘못 받아, 우리 배 팀만 뉴욕을 가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는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처음 미국 땅에 발을 디뎠던 초짜들이라 어디 한군데라도 더 구경하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던 때문이었으며 아버님과 지겨운(?) 시간을 보낼 일을 생각하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게 가장 복 받은 은혜의 시간이 되었다. 뉴욕이나 다른 관광지쯤은 언제든 구경을 할 수가 있었지만 참부모님을 직접 모시고하는 코디악 낚시는 결코 쉽지 않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1주일 동안 코디악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아버님의 생활은 매일 똑같이 새벽 6시 전에 바다에 나가시고, 온 종일 낚시와 정성의 시간을 보내시다가, 다시 돌아오시면 노래를 부르시거나 누구든 노래나 간증을 시키기도 하시며, 말씀 잔치가 언제나 깊어가는 밤을 잊은 채 그렇게 습관처럼 사시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치지 않는 그 열정과 그 놀라운 체력은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누구도 가히 추종을 불허하는 그 모습에 나는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나도 열정과 끈기가 둘째가라면 좀 섭섭해 할 사람인데, 감히 아버님 앞에서는 할 말을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님은 진실로 살아계신 신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참어머님과의 깊은 인연은, 판타날 낚시터에서였다. 국가메시아들로 하여금 40일간 낚시수련을 하라는 특별지시가 내려져, 브라질 상파울로와 자르딘 뉴 호프 농장을 경유하여 파라과이 판타날까지 들어갔다. 그곳은 한국에서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면 마지막 끝에 도달한다는 지점이기도 한 곳이다.
판타날은 한마디로 태초의 에덴동산이라 할 만큼, 온갖 짐승들이 자유롭게 사람과 어울려 살고, 때 묻지 않아 자연은 그 풍경이 지극히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은 관광지였다. 이런 곳에서 40일이란 장기간 낚시를 한다는 것 자체가 환상적이며 꿈만 같은 일이었다.
환경이 극도로 열악하기에 교대로 불침번을 섰던 추억도 있는가 하면, 참부모님과 함께 식탁에 앉았던 귀한 시간들은 더없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했던 귀한 시간은 참어머님의 선박에 동승했던 일이다.
어머님과 함께 배를 타던 날은 일본인 캡틴을 비롯해 단 세 명만이 함께 바다로 나갔다. 나는 큰 고기를 낚아 어머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생각으로 낚시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는데, 어머님이 고기를 먼저 낚으시어 나를 부르시더니 고기가 참 예쁘다고 자랑도 하시고, 사진을 함께 찍자고 말씀도 하시더니 핸드백에서 초콜릿을 꺼내 놓으시며 “이건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초콜릿이야” 이렇게 말씀하시며, 함께 그 초콜릿을 나누어 먹었다.
그 초콜릿이 얼마나 비싼 제품이었는지는 몰라도, 참어머님이 직접 주셨고 참어머님과 단둘이서 먹었던 초콜릿이었기에 그야말로 최고 최상의 초콜릿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 자리에서 어머님의 포근함과 한없는 자애로움을 느꼈고, 꾸밈과 가식이 없는 순박함에 친 누님 같은 친근감을 느껴보았다.
내가 만난 참부모님은 누가 뭐라 해도 하늘이 내신 특별한 분이라고 나는 증언하고 싶다. 처음 몽시를 통한 만남에서부터 영적 역사를 통해 만나본 체험이나 실제 가까이서 만나본 참부모님은 확실히 범인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는 그런 분들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생각의 폭도 달랐고, 하시고자 하는 목적도 오로지 한분 하나님의 뜻에, 전 생애를 걸고 살아오신 위대한 삶에 나는 무한한 경의가 솟구쳐 오른다.
참부모님이 추구해온 필생의 과업은 분열과 갈등의 세계를 종결짓고, 영원한 평화와 이상세계를 이 땅에 실현코자 함에 있다고 볼 때, 그 숭고한 정신을 우리는 받들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이상이 어디 있겠으며 이처럼 큰 꿈을 꾸어본 자 누가 있었단 말인가!
나는 우리 당대에, 그것도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이 땅에, 이처럼 귀한 참부모님이 오셨다는 것이 너무도 자랑스럽다. 반면, 그토록 위대한 사명을 갖고 오신 참부모님께서 아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올바른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통탄스러운 일이다. 때가 되면 분명 만민이 추앙하는 그런 날이 머지않아 오리라 확신한다.<끝>
첫댓글 MBCnet 다큐스페셜 '통일과 평화를 위한 삶' https://www.youtube.com/watch?v=rHyqr7Q00K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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