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9년 어머니가 울면서 나를 안고 장호원읍내를 돌아니다가 어느 건물로 들어가는데 아마 병원인것 같습니다.
그러나 간호사로 보이는 여인이 `여기서는 안된다`며 아머니를 내 쫓습니다. 어머니가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나중에는 어느 기와집으로 들어가서 방에 누이는데, 주인 아저씨로 보이는 사람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는 분노가 폭발하며 마구 고함을 지릅니다.
"이 망할놈의 새끼 같으니라고, 이 죽일놈 ,...." 어머니가 나를 방에 누이고 밖으로 나갔고 아저씨도 곧 나갔습니다. 나는 상반신을 일으켜 포대기에 쌓인 내 몸을 바라봤습니다. 그러자 내 아래쪽의 포대기가 시뻘겋게 피로 물들어 있는게 아닌가?
나는 그후 정신을 잃고 몇달동안인지 아무런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그 후 내가 하루 종일 칭얼거리며 방에 누어 있고 어머니가 나를 가엽게 여겨주는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아버지는 금융조합에서 돈을 찾아가지고 집을 나갔다고 하며 후에 다른 어른에게 들은 이야기는 아버지가 기생집을 찾아가서 돈을 다 탕진하고 아편중독자가 되어 집으로 기어들어왔고 한달 있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우리 어린 3형제의 앞날을 걱정했음인지 집과 땅을 팔아 무극에 있는 삼촌에게 우리3형제를 맡기고 양육비로 돈을 다 드리고, 어머니는 단신 경성(서울)로 올라가서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야학에 다녔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사용하던 일본인들이 만든 장부에 일기를 기록했는데, 후에 나는 그것을 소중히 보관해 오다가 사진과함께 분실해 버립니다.
그 일기장에는 그날 그날의 모든 것을 기록하였는데, 거기에 대근(大根)이란 한자가 자주 등장하여 다른 어른에게 물어보니 무우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돈을 아끼느라고 무우를 사서 무우죽을 쑤어 먹으며 생활한 것입니다. 그리고 명동성당에서의 미사예물이 얼마까지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한편 충북 음성군 무극면의 삼촌네는 거기에도 자식과 식구들이 자그마치 13명인데 우리까지 와 있으니 대식구이고, 후에 안 일이지만 삼촌이 놀음으로 어머니가 드린 양육비를 다 탕진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우리 3형제는 숙모로부터 미움과 구박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우리 삼형제는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4식구가 함께 방을 씁니다. 할아버지는 몸집이 매우 크고 장대하며 농사를 짓고 돗자리를 만들어 시장에 내대 팔아 작은 아들(삼촌)에게 생활비를 대 주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내가 하도 칭얼거리고 내가 비쩍 말라가는 것을 보고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어느날 나를 데리고 서울로 어머니를 찾아 올라갑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