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과 후원 답사 <20111.6.7> 군성11 동기회의 두번째 문화답사는 역시 지난번에 이어 許鈞교수를 모시고 차원 높은 현지 답사와 강의로 진행되었다. 답사지는 창덕궁과 후원이다.일반 관람객과는 달리 학술조사단 의 연구회원팀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일반팀 시간과는 달리했다. 1시40분부터 昌德宮後園 특별관람팀(13명)으로 입장하여 후원부터 답사가 시작되었다. 우선 창덕궁 후원에 관한 백과사전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창덕궁 후원(昌德宮後苑) 또는 비원(祕苑)은 창덕궁 북쪽에 창경궁과 붙어 있는 한국 최대의 궁중 정원이다. 궁원(宮苑), 금원(禁苑), 북원(北苑), 후원(後園)으로도 불린다. 조선 시대 때 임금의 산책지로 설계된 후원(後園)으로 1405년(태종 5년) 10월에 별궁으로 지은 것인데, 이후 1592년(선조 24년)에 임진왜란 때에 불타 없어지고, 1609년(광해군 1년)에 중수했다. 많은 전각(殿閣)과 누각과 정자가 신축, 보수되어 시대에 따른 특색을 보여 준다. 정원에는 왕실 도서관이었던 규장각과 더불어, 영화당(映花堂), 주합루(宙合樓), 서향각(書香 閣), 영 춘루(迎春樓), 소요정(逍遼亭), 태극정(太極亭), 연경당(演慶堂) 등 여러 정자와 연못들, 물이 흐르는 옥류천(玉流川)이 있고, 녹화(綠化)된 잔디, 나무, 꽃들이 심어져 있다. 또한 수백종의 나무들이 26,000그루 넘게 심어져 있고, 이 중 일부는 300년이 넘은 나무들도 있다. 창경궁을 합한 창덕궁의 총면적 약 0.674km(20만 3769평) 중 창경궁은 약 0.177km (5만 3600여 평)이고, 비원은 약 0.205km(6만 1937평)이다. 창덕궁 후원은 1997년에 창덕궁 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부용지(芙容池) 앞 부용정(芙容亭)에서 허교수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강의 내용을 정리해 본다.
1.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창덕궁 후원 이야기 그리고 우리나라 정원이 일본,중국정원과 무엇이 다른가?
창덕궁 후원은 창덕궁과 함께 1997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매스콤에서 지정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지정과 등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정은 법적 으로 구속을 받으며 수정사항이 있으면 법률을 고쳐야 하는 강제사항이다. 등록은 전세계 전 인류가 공유한다는 의미이다.
창덕궁 후원은 서양의 자연주의 내츄랄리즘이 아닌 동양적인 자연주의가 베어있다. 나와 자연은 상대적 관계이다. 서양식 자연주의는 인간이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룻소도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동양적 자연주의는 대자연 속에 들어가 있는 한 인간으로 일체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잘 나탄난 것이 정원문화이다. 같은 동양 정원문화에서도 일본,중국,한국이 다르다.
세계에서 정원문화의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 정원은 정원의 모든 것을 인간의 기교로 다듬는다. 나무도 정원설계도 돌도 인위적으로 다듬고 만든다. 예쁘고 보기가 좋 은 정원이 일본정원이다. 자연을 가까이 하려는 노력은 어느나라 보다 크다. 사람에 맞추 어 다듬는 원예이다. 그렇지만 일본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이 있어도 정원에는 세계문화유 산이 없다.
중국은 겉보기가 우리와 비슷한 것 처럼 보이지만 다르다. 중국의 대표적인 정원은 졸정 원,이화원,두보초당 등이다. 중국정원은 정원설계를 통해 나의 뜻을 나타낸다. 동정호는 괴석을 옮겨다 만들었고 두보초당의 석가산은 나무를 이용한 樹抑설계이다. 나무를 앞에 가득 심어 나무 뒤에 깜짝 놀라는 정원을 만드는 설계이다. 산으로 경치를 막으면 山抑 이고 나무로 막으면 樹抑이다. 이런 抑景으로 감동효과를 노린다. 감추었다가 갑자기 나 타내는(遂) 표현법이다. 이화원은 구불구불한 길로 이어지다가 정원을 나타내는 曲抑의 설계이다.
한국정원의 기본 발상은 자연의 숲을 그대로 둔채 즉 자연을 기본으로 하여 펼쳐진 도화 지에 정자,건물을 조성하는 자연주의 정원이다. 借景의 원리이다. 예로서 담양 소쇄원은 홍문관(弘文館) 대사헌(大司憲)으로 있던 소쇄 양산보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사사되자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지은 정원이 다. 계곡,나무,바위를 그대로 두고 인위적인 정자를 조화롭게 설계하고 꾸민 정원이다. 이런 정원을 산수정원이라 한다. 숲과 샘을 차경하면 林泉정원이다. 먼 경치를 빌리면 遠借정원이다. 멀리 보이는 무등산을 정원에서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遠借정원이다. 경치를 내려다 보는 阜借, 먼것을 가깝게 보는 隣借, 윤선도의 五友歌에서 보는 달을 빌 리는 抑借 등 많은 借景의 원리를 사용한다. 또 사계절 순환에 따른 자연 변화를 가장 잘 정리한 것이 한국정원이다. 자연이 인문화된다. 우리 정원의 범위는 무한히 넓다. 차경의 원리는 공간을 무한히 넓게 이용한다. 실크로드에 가보면 쏟아지는 별,은하수를 느낀다. 별이 경물(景物)이 된다. 부용지의 잉어도 경물이고 옥류천의 거북이도 경물이다. 나를 죽여야 자연이 보인다. 그래서 인류의 문화유산이 되는 것이다. 산수정원은 자연이 감상 대상이다. 이것이 인문화이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 정자를 짓는다. 정자는 산수정원 의 핵심이다. 2. 정자에서 본 연못의 감상 - 주련에 씌어진 내용을 알고 감상해야- 동양화에는 그림을 감상하면서 글을 그림에 적어 그림과 글(시)이 일체가 된다. 시를 보 면서 그림을 보듯 함께 느낀다. 연못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때 먼저 정자 기둥에 새겨진 주련의 내용을 알고 연못의 경치를 감상해야 한다. 주련의 내용을 알면 정자 주변의 경 치가 다시 보인다. 주련은 붙이는 순서가 있다. 정문의 왼쪽이 1번이다. 그리고 좌선(좌 선회)한다. 좌선은 우주운행의 기본이다. 하늘은 좌선, 땅은 우동한다. 부용정(芙容亭)의 주련 두개만 풀어본다
(1) 千叢艶色霞流彩(천총염색하류채) 천 포기 고운 빛깔은 아름답게 흐르는 노을이요, (2) 十里淸香麝裂臍(십리청향사열제) 십리에 맑은 향은 배꼽 열린 사향일세. 수없이 많은 떨기를 이루고 있는 부용정 연꽃들의 고운 빛깔을 저녁놀이 아름답게 흐 르는 모습으로 비유하고 멀리까지 퍼져가는 맑은 향을 마치 사향노루가 배꼽을 터뜨려 향이 풍겨 나오는 듯하다고 표현한 것이다.사향노루의 배꼽에 사향선(麝香腺)이 있어 여기서 사향이 생성된다.
3.현묘지도(玄妙之道)를 느끼고 가야 건물 정자마다 편(현)액이 걸려 있다. 편액을 보면 용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漢字 해석만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전통시대 당시의 어법을 이해해야 한다. 취규정(聚奎亭)은 奎星이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奎星은 28수의 열다섯번째 별로 문운(文運)을 맡고 있다. 하늘에도 땅에서와 같이 궁궐이 있고 왕과 신하가 있다. 신하 중에 문신들 즉 文運이 상승하면 상서(祥瑞)로 알았다. 취규정은 학자들이 모인다는 뜻 으로 풀이되며 휴식과 독서를 위한 공간인 것이다.
농산정의 농은 귀머거리 뜻이다. 심산계곡의 물소리로 바깥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는 듣지 않는다. 신라 최치원이 해인사 선유동에 농산정을 지었다. 그를 헐뜯는 정치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심산유곡에 정자를 짓고--
가장 높은 곳에 태극.소요정이 있다. 태극은 우주순환의 원리가 다 들어 있다. 정자이름이 소우주를 구현하고 있다. 유교에서는 太極이 궁극적인 像이다. 도가에서는 태극 위에 무극을 두고 있다(성리학자들은 무극이 태극이라고 하지만).태극은 만물의 근원이다. 태극은 양의를 낳는다. 음과 양이다. 음은 다시 음(태음,노음)과 양(소음)을, 양은 다시 음(소양)과 양(태양)을 낳는다. 사상은 팔궤를 다시 64궤- 분화를 거듭하면 삼라만상이 태극이다. 태극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이치만으로 있다. 울리지만 들 리지 않는 것이 稀이다. 있으나 보이지 않는 것이 微이다. 태극의 자태는 정(靜)이다 불교에서 염화시중의 미소이다. 말로는 안되는 것이다. 태극은 가치관이 없다. 오직 존재할 뿐이다. 가치 중립이 태극이다. 유물의 내력을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시간 낭 비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玄이다. 숲속은 그윽하고 묘하다. 玄妙하다. 이 곳에 와서 현묘지도(玄妙之道)를 느끼고 가면 대성공이다.
사상(四象)
4. 연경당의 누마루를 보며 연경당은 양반가의 주택을 흉내낸 건물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랑채(남향집 경우)는 오른 쪽(동편)에 안채는 왼쪽(서편)에 위치한다. 사랑채에는 누마루가 있다. 누마루는 자연으로 들어가는 곳으로 해석한다. 자연 가까이 가려는 심리, 우주자연에 맡기려는 마음이 깃들 어 있다. 누마루 보다 당의 형태를 갖추면 정자를 짓는다. 먹고 쉬고 방도 있게 만든다. 자연으로 들어가서 산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경치를 감상한다. 양반가는 정자를 2~3개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樓나 정자를 보면 그 가문의 가세를 짐작케 한다.
5. 인정전에서 - 왕도정치의 참뜻을 이해한다. 조선궁궐의 정전이름은 모두 정사 정(政)이 들어간다. 勤政殿,仁政殿,明政殿,崇政殿 등 政은 바를 정(正)과 칠복(攵)의 합자이다. 매질을 해서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왕은 백성의 정상에 있기도 하지만 하늘의 명을 받아 항상 스스로 바르고 밝게 덕을 갖추고 곧게 다스 려야 한다. 政은 왕이 군림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인격을 도야하는 것이다. 治는 왕 자신 이 아니라 다른사람 즉 신하가 바르게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정전의 어질인 仁은 둘(二)과 사람(人)의 합자이다. 仁자는 으뜸 원(元)과 같은 자이다. 元도 二와 人으로 만들어 진 글자이다. 인격의 으뜸으로 삼는 것이 仁이다. 중국의 여러 제후들이 공자께 재상으로 제자를 추천 받고자 하며 물을 때 그가 仁하냐 물으면 늘 모른다고 했다. 단순히 어질다는 의미가 아니다.
聖君과 善臣이 만나는 것이 慶會이다. 신하는 문반과 무반이 있다. 문반열은 동쪽이고 무반 열은 서쪽이다. 품계석에도 엄연히 구분된다. 문반이 도우는 것이 輔이고 무반의 것은 弼이 다. 왕이나 신하는 항상 중국 요순시대의 보필이 잘 되던 시대의 선례를 찾아 상고한다.
방위의중심 임금의 어좌는 남면이다. 궁의 위치는 전후좌우 상하의 방위의 중심이 먼저 설정되어야 한다. 기본 원칙은 양을 앞, 음을 뒤로 한다. 抱陽背陰이 원칙이다. 남향을 기준으로 함이 원칙이나 지형에 따라 명정전과 같이 동향도 가능하다. 주변의 방위는 종속된다. 방위의 중심이 주변을 포괄한다. 고저에서는 北高南低의 원칙이다. 높새바람은 북동에서 부는 바람이고 마파람은 말바람으로 남쪽에서 부는 바람이 어원이다. 전통을 이해하려면 자신을 없애야 한다.
추녀마루와 잡상(雜像) 추녀마루 합각마루의 꼭지점이 취두(鷲頭)이다. 독수리 취鷲, 머리두頭자다. 임금과 왕비의 침소인 궁에는 용머리가 없다. 왕이 용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개념에서는 용은 왕을 상징한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용을 창으로 찌르는 모습을 카토릭 성당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지붕에 줄지어 서 있는 雜像들은 서유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표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어우야담이라는 책에서 주인공 이름이 나온다. 잡상의 수는 10개이다. 가장 앞에 있는 것이 삼장법사 다음이 손오공,저팔계,이귀방이다. 삼살보살도 천상각도 보인다. 잡상은 그야말로 잡동사니를 말한다. 어처구니라고도 한다.맷돌의 어처구니 만이 아니고 잡상의 어처구니다. 잡상의 유래는 중국 송나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하늘을 쳐다보는 잡상의 시선 속에 부정한 것을 막아 전각을 상스럽게 유지하려는 염원이 담겨 있다.
6. 용마루의 오얏꽃(李花) 문양에 관하여 1910년 이후 순종은 일본에 의해 창덕궁 전하로 강등되었다. 고종황제에서 황제가 아닌 李씨 왕으로 강등하여 불렀다. 조선 왕궁의 용마루에 올라있는 오얏꽃 문양은 일본이 직접 문양 으로 만들어 넣었다. 왜일까? 조선왕조의 모든 유물과 상징물을 파괴하던 시기인데-- 일본은 조선과 일본이 같다는 내선일체사상을 주입하고자 했다. 사직단은 사직공원으로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태극기와 무궁화 말살을 계속하던 시기이다. 조선왕가를상징하는 문양을 일본의 히데요시,도꾸가와 등의 가문의 문양과 같이 낮추어 여기려 하는 불순한 의도이다. 일본은 가문의 문양을 중시하고 무덤에도 문양을 사용한다. 우리에게는 그런 문양을 쓰지 않는다. 우리의 가문에는 족보가 있을 따름이다. 이왕가의 문 장,문양에 오얏꽃을 사용하는 의도가 분명히 밝혀졌다.
허교수의 강의 내용을 발췌하였으나 제대로 전달할 실력이 못되어 죄송하게 생각하며 여기 서 강의의 전달교육을 마치고 창덕궁 후원을 돌며 찍은 주요 연못과 정자, 건물을 감상한다.
부용지와 부용정 위치와 연혁 : 주합루 남쪽 부용지 가에 있는 정자이다. 『궁궐지』에는 “예전(숙종 33년)에 지은 택수재(澤水齋)를 정조가 고쳐지으면서 부용정으로 개명하였다.”고 하였다. 『동국여지비고』에 “주합루 남쪽 연못가에 있다. 연못 안에 채색하고 비단 돛을 단 배가 있어, 정조 임금께서 꽃을 감상하고 고기를 낚던곳이다
부용정 주련
어수문(魚水門) 위치와 연혁 : 주합루의 남쪽 정문이다. 임금이 드나드는 중앙의 큰 문과 신하가 드나드는 좌우의 작은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조 때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어수문 뒤에 있는 주합루의 뒤편 언덕 너머에 어수당(魚水堂)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어수당을 세울 때 같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한경지략』에서는 어수당을 효종 때 창건했으며 우암(尤庵) 송시열 (宋時烈, 1607~1689년)을 인견(引見)하여 ‘어수(魚水)’의 뜻을 되살렸다고 했다.
주합루(宙合樓) 위치와 연혁 : 2층으로 된 건물인데, 원래 1층은 왕실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으로 규장각 이라고 하였고 2층은 열람실로서 주합루라고 하였다. 나중에는 규장각이 인정전 서쪽 현재 의 위치로 옮겨갔기 때문에 지금은 이 건물 전체를 주합루라고 부른다. 주합루는 1776년 정조가 즉위한 해에 건립되었는데 이 곳에는 정조가 지은 어제, 어필,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 인장 등을 보관하였다. 『동국여지비고』에서는 주합루를 규장각의 정실(正室)이라고 하였다.
영화당(暎花堂) 위치와 연혁 : 영화당은 부용지 동쪽에 있는 건물이다. 「궁궐지」에는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으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 이 영화당을 짓는일을 논의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광해군 때 처음 지어진 것으로 볼 수있다. 지금의 건물은 1692(숙종 18)년에 재건한 것이다. 이 건물의 앞쪽 마당은‘춘당대(春塘臺)’라고 불리는 곳으로 이 곳에서 왕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과거시험이 실시되었다. 고전 소설 「춘향전(春香傳)」에서 이몽룡이 과거 급제할 때 시험 본 장소도 이곳 춘당대이며 이 때 글제가 ‘춘당춘색고금동(春塘春色古今同)’ 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은 마당 앞쪽에 창경궁과 경계를 나누는 담장이 둘러 쳐 있는데 원래는 창경궁과 경계가 없이 터져 있었으므로 창경궁의 춘당지(春塘池)가 춘당대와 하나의 공간을 형성하였다. 영화당은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베풀거나 활을 쏘기도 한 정원이었 는데, 정조때부터 과거 시험장으로 이용하였다. 영화당에서는 왕이 참석한 가운데 시관(試官) 이 자리하여 시제를 내리고,춘당대에서 초시(初試)에 합격한 응시자들이 마지막 시험을 보았 다.『궁궐지』에 의하면 영화당 건물 안에는 선조, 효종, 현종, 숙종의 편액이 걸려있었다고 하 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영조의 친필인 ‘暎花堂(영화당)’ 현판만 남아 있다. 갑술년(甲戌年) 에 썼다고 되어 있으니 1754(영조 30)년에 쓴 것이다.
영화당 천정과 해시계
금마문(金馬門)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독서를 하기 위해 만든 소박하고 단출한 전각인 기오헌(寄傲軒)과 의두각(倚斗閣)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창덕궁 후원, 정조가 세운 규장각이 들어서 있는 주합루와 가까우며 영화당을 지나 담장을 따라가면 나타난다. 금마문은 중국 한나라 때 미앙궁(未央宮)에 있던 문으로, 문 안쪽 전각에 왕세자가 있음을 상징한다. 순조의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자는 할아버지 정조의 개혁의지를 품고, 약화된 왕권을 세우기 위해 규장각 근처에 전각을 짓고 독서를 했다고 한다.
불로문(不老門)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워진 문으로 창덕궁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세워진 돌문 이다. 세로판석에 돌쩌귀 자국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나무문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 문을 지나가는 사람은 무병장수한다고 전해진다.
애련지(愛蓮池)애련정(愛蓮亭) '연꽃이 피는 연못’이라는 뜻인 애련지(愛蓮池)는 창덕궁 불로문(不老門)을 지나 왼쪽에 자리하고 있고, 애련지 북쪽에 서 있는 간결한 정자가 애련정(愛蓮亭)이다. 애련지는 부용지와 달리 가운데 섬이 없는 방지(方池)로, 사방을 장대석으로 쌓아올렸다. ‘애련’이라는 이름은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가 쓴 ‘애련설(愛蓮設)’이라는 시에서 유래했다. 숙종이 지은 ‘애련정기(愛蓮亭記)’가 ‘궁궐지(宮闕志)’에 전한다.
한반도를 닮은 연못-관람지(觀纜池) 연못가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합죽선(合竹扇) 모양의 정자인 관람정이 있다. 한반도처럼 생겼다 하여 반도지(半島池)라 불렸다가 관람지(觀纜池)로 명칭이 바뀌었다. 1908년 무렵 제작된 동궐도형(東闕圖形)에 묘사된 연못은 호리병 모양이었으나 고종 때 일제가 연못의 형태를 의도적으로 고쳤다고 한다. 함경도 지역을 남쪽에, 경상도·전라도 지역을 북쪽에 배치하여 한반도의 지형을 바꿔놓았다고 알려지면서 명칭을 바꾸게 되었다.
취규정(聚奎亭) 인조 18년(1640)에 세운 정자로, 창덕궁 후원 존덕지에서 옥류천 쪽으로 가는 언덕 위에 서 있다. ‘학자들이 모인다’라는 뜻의 취규정(聚奎亭)은 휴식과 독서를 위한 공간이었을 것 으로 여겨진다.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에 사방이 트인 초익공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취한정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 정원 어귀에 있다. 임금이 옥류천의 어정(御井)에서 약수를 마시고 돌아갈 때 잠시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소박한 정자이다.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 으나 취한정에 대한 숙종과 정조의 시(詩)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1720년 이전에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요정 인조 14년(1636)에 세웠으며 탄서정(歎逝亭)이라 부르다가 후에 소요정(逍遙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창덕궁 후원의 취한정 위쪽, 옥류천 바로 옆에 있다. 정자에 앉으면 옥류천과 소요암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옥류천변의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은 상림삼정 (上林三亭)이라 칭해졌다.
태극정(太極亭) 창덕궁 후원 옥류천 주변에 있는 정자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웠으며, 원래 운영정 (雲影亭)이라 불렀다가 태극정(太極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굴도리를 엮은 정면 1칸· 측면 1칸 크기의 겹처마 사각정자이다. 내부에 마루를 깔고 퇴를 달아 평난간을 둘렀다. 천정은 우물천정이고, 지붕 꼭대기는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정조의 ‘태극정시 (太極亭詩)’, 숙종의 ‘상림삼정기(上林三亭記)’ 등 태극정을 노래한 어제(御製)가 전해진다.
옥류천(玉流川)과 바위 소요암 창덕궁 후원 북쪽의 깊은 골짜기에 있으며 인조 14년(1636)에 조성하였다. 북악산 동쪽 줄기에서 흐르는 물과 인조가 팠다고 알려진 어정(御井)으로부터 계류가 흐른다. 소요암이라는 널찍한 바위에 U자형 홈을 파고, 샘물을 끌어 올린 다음 작은 폭포처럼 물이 떨어지게 만들었는데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 다고 한다. 소요암에는 인조가 쓴 옥류천(玉流川)이라는 글씨를 비롯하여 숙종이 지은 시(詩)가 새겨져 있다. 청의정·소요정·태극정·농산정·취한정 등의 정자가 옥류천 옆에 있다.
태극에 관한 설명에 경청하는 일행
연경당 정면 6칸, 측면 2칸, 단층팔작지붕집. 1828년(순조 28) 진장각(珍藏閣) 옛터에 세워졌다. 사랑채와 안채 모두 납도리집 형식이고, 장설(長舌)도 생략되어 있다. 정간(正間)은 넓고, 앞에는 좁은 툇간(退間)이 놓여 있다. 문은 모두 2분합(二分閤)이고, 대들보와 퇴량(退樑)의 높이는 모두 같으며 대들보 위에는 동자(童子)기둥이 종량(宗樑)을 받았다. 창덕궁에 있는 다른 건물이 단청을 한 데에 비해 연경당은 하지 않았다. 안채와 사랑채가 남향(南向)하여 동서로 나란히 있어 딴채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채로 된 집이다. 매우 단촐하고 아담하여 조선시대 사대부의 집 형태를 잘 보여준다.
백련이 피고 있다
영춘문
집 희(緝 熙) 위치와 연혁 : 예전에 왕세자가 거처하던 관물헌(觀物軒) 건물에 걸려 있는 어필 현판이다 . 『동궐도』에는 지금의 이름이 아니라 ‘유여청헌(有餘淸軒)’으로 표기되어 있다.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년)가 세자로 책봉된 다음 이 곳에서 서연(書筵)을 한 일이 있고, 1874(고종11)년에는 순종이 이 곳에서 탄생하였다. 1884(고종 21)년 갑신정변 때에는, 사방을 한눈에 살필 수 있어 수비가 용이하다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개화파가 고종을 모시고 이 곳으로 피신하여 청나라 군사들을 대비하기도 하였다.
희우루(喜雨樓) 위치와 연혁 : 성정각의 동쪽 누각에 동쪽을 향해 붙은 현판이다. 『궁궐지』에서는 “희우루와 보춘정은 성정각의 동쪽 누각인데 동쪽이 희우, 남쪽이 보춘이다.”라고 하였고, 『동궐도』 에서도 비슷하게 기록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1) 54권에 「희우루지(喜雨樓志)」가 있다. 그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정유(1777,정조 1)년에 매우 가물었는데, 이 누각을 중건하기 시작 하자 마침 비가 내렸고, 또 몇 개월 동안 가물다가 이 누각이 완성되어 임금이 행차하자 다시 비가내려 희우(喜雨)라는 이름을 지어 기념했다는 내용이다
보춘정(報春亭)-희우루와 같은 건물 위치와 연혁 : 성정각의 동쪽 누각에 남향하여 붙은 현판이다. 『궁궐지』에 “희우루와 보춘정 은 성정각의 동쪽 누각인데 동쪽이 희우, 남쪽이 보춘이다.”라고 하였다. 『동궐도』에도 표시 되어 있다. ‘보춘(報春)’은 ‘봄이 옴을 알린다’는 의미이다. 봄은 동쪽을 상징하고 성정각이 춘궁(春宮: 왕세자)이 독서를 하는 곳이므로 ‘춘(春)’ 자가 중의적으로 쓰인 듯하다.
위치와 연혁 : 현재 성정각 앞 행각에 ‘조화어약’과 ‘보호성궁’이란 편액이 나란히 북쪽을 향하여 걸려있다. 본래 창덕궁 내의원은 인정전 서쪽의 약방 자리에 있었다. 고종 때 내의원 을 전의사(典醫司)로 개편하였고, 순종 때 창덕궁을 개조하면서 내의원이 헐리어 현판과 도구 들을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영현문(迎賢門) 위치와 연혁 : 지금은 내의원이라 부르는 성정각의 남문이다. 『궁궐지』의 「창덕궁·성정각」조 에 “성정각은 세자가 공부하는 곳이다. 그 곳의 남문을 영현문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성정각이 세자가 공부하는 곳이었다는 것은 문의 편액을 해석할 때 도움이 되는 중요한 단서이다.
희정당(熙政堂) 보물 제815호. 정면 11칸, 측면 5칸. 단층 팔작기와지붕 익공(翼工)집. 조선 후기에 국왕이 평상 시에 거처하던 곳이다. 창덕궁의 침전인 대조전(大造殿)의 바로 앞 남쪽에 있으며, 대조전과 같은 높이의 기단(基壇) 위에 나란히 지었다. 원래는 창덕궁의 창건 때 세웠으나, 임진왜란의 병화 등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1834년에 재건된 건물도 1917년의 화재로 불에 타 없어지고 현재의 것은 1920년에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정문 보물 제814호인 창덕궁 외전의 편전인 선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인정전(仁政殿)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重層) 팔작지붕 다포 (多包)집으로 1804년(순조4) 건립되었다. 남향이고 인정문과 함께 회랑으로 둘러싸여 일곽을 형성한다. 기단(基壇)은 2중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과 좌우 측면에 석계(石階)를 설치하고 바닥 면에는 전석(塼石)을 깔았다. 처마는 겹처마인데 각 마루에는 양성(兩城)하여 취두(鷲頭) ·용두 (龍頭) ·잡상(雜像)을 올려 놓았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이 건물은 가구의 짜임새와 외관이 견실하면서 운치와 미려를 겸하여 흥선대원군이 근정전(勤政殿)을 재건할 때 이 건물을 규범으로 하였다.
잡상(雜像)들 좌측 잡상이 천상각, 다음 합장하고 있는 잡상이 삼살보살이다
숙장문(肅章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통과하여 금천교와 진선문을 지나면, 진선문 맞은편에 나오는 중문 (中門)이 숙장문이다.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에는 직사각형 마당이 있고, 마당을 빙 둘러 호위 청· 상서원 등의 행각을 비롯하여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이 있다. 숙장문을 통과하면 내전으로 갈 수 있다. 숙장문은 성종 6년(1475) 좌찬성 서거정이 지어올린 이름을 성종이 낙점하여 그때부터 사용된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1996년 시작된 복원공사를 통해 재건되었다. 모든 궁궐을 보고 숙장문으로 나온다. 현판은 반대쪽에 걸여야 한다. 진선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나오는 중문(中門)이다. 창덕궁 창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1908년 인정전 개수공사 때 헐렸다가 1999년 복원공사를 완료하였 다. 진선문을 들어서면 직사각형의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으며 마당에는 어로(御路)가 나 있 다. 마당 둘레에는 인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과 호위청·상서원 등의 행각이 있다. 백성의 억울 함을 알리는 신문고 혹은 등문고라 불리는 북을 태종 때 진선문에 설치했고, 중간에 유명무실 해졌다가 영조 때 다시 설치했다고 한다.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 보물 제813호.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의 다포계(多包系) 건물, 5량가구(五樑架構)의 팔작지붕. 인정문은 이궁(離宮)인 창덕궁의 정전(正殿)이면서 300년이나 조선의 정사를 다루어 온 인정전 의 정문으로, 1649년(인조 27)에 효종이, 1659년(효종 10)에 현종이, 그리고 1724년(경종 4) 영조가 이 문에서 임금자리에 오른 유서 깊은 곳이다.
창덕궁 금천교 교각을 2개의 홍예(虹霓)로 구성하였는데 물 속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돌로 홍예를 틀었 으며 양쪽 교대(橋臺)를 석성(石城)처럼 쌓았다. 중앙에 홍예가 모이는 곳에 큼직한 홍예 기석 (基石)을 놓아 지복석(地覆石)을 삼았으며, 하마(河馬) 형상의 석수(石獸)를 배치하였다.
창덕궁 후원탐방을 마치고 저녁을 선천에서 가진후 헤어졌다. 이 모임에서 정식으로 군성11 문화답사팀이 결성되었다.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재를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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