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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상 산문집 『어디든 멀리 가고 싶은 너에게』
<책 소개>
엄마와 딸이 함께 떠난 유럽여행 에세이 『어디든 멀리 가고 싶은 너에게』. 여행을 하면서 모녀는 매일 일기를 썼다. 솨니는 가는 곳마다 그림을 그렸다. 마음에 바람을 일으키는, 그곳에 두고 온 짧은 추억들. 그 기억들은 유려한 문체와 아름다운 그림으로 엮었다.
<저자 소개>
글·사진 |
이미상 /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했다. 영문학을 전공한 뒤 중앙대학교에서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전문가 과정을 마쳤다.
2007년 계간『불교문예』가을호에 <아마가사키 호텔>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신인상을 수상했다.
영어동화전문가 모임 ‘Kiztory mom’ 동인이며, 용인과 성남 분당 지역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동화 읽기’를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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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
솨니(김수완) / 서울에서 태어나 안양 평촌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자퇴한 후 검정고시를 치르고 자신의 꿈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현재는 미국 예술고등학교(Interlochen Center for the Arts)에 재학 중이며 조기 졸업자로 확정됐다. 스콜라스틱(Scholastic) 출판사가 해마다 수여하는 상인 'Art & Writing Award'를 3년 연속 수상했다. 예술가들을 위한 간행물 Winter Tangering Review 추천으로 2014년 3월, 뉴욕 브로드웨이 'Art House'에서 최연소 작가로 전시회를 가졌다. 2012년 엄마와 함께 유럽 미술관 여행을 하며 쓴 ‘솨니의 일기’가 곧 출간될 예정이다.
<목차>
Prelude
Chapter 1 /에스파냐
솔 광장의 햇빛
톨레도 냄새
아, 게르니카
세고비아 대성당의 꽃
아빌라에서
모호한 빛
쿠엥카, 시간의 심연 속으로
회전하는 집
산티아고 밤 열차
대성당
피니스테레, 또 다른 대양을 향한
Restaurante caffeteria ‘DAKAR’ 15:8
Chapter 2 /포르투갈, 그리고 다시 에스파냐
리스보아의 푸른 꽃
페나, 나의 궁전
엄만 밥 안 하니까 좋아?
카르모나 파라도르 파티오
코르도바, 멀고 외로운
말라가, 히라솔
네르하, 루마니아 여인
외로운 론다
그라나다, 침묵의 언어
물에 상처받은 아이를 찾아서
나의 천국, 헤네랄리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피게라스의 갈라테아
예술가들
아디오스, 에스파냐
Chapter 3 /이탈리아
트라파니의 저녁 바다
잃어버린 낙원, 파비그나나
팔레르모를 여행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어요?
카푸친 카타콤
체팔루의 정복자 펠레
아그리젠토 아그리젠토
우리에겐 아직 가야 할 몇 마일이 있다
기차가 바다를 건널 때
나폴리, 폼페이
물에 잠긴 푸른 동굴
파르네세의 헤라클레스
드디어, 로마
라파엘로와 붉은 꽃
바티칸, 디오게네스
엄마가 잘못했다
굿나이트 앤 굿바이!
밤의 포로 로마노
네가 이상한 거야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오래된 베키오 다리
시에나 골목
피렌체 야영장을 떠나며
베네치아의 섬들
꿈틀거리는 마법의 숲
트레비소의 눈물
베네치아의 바바리맨
밀라노에서 이틀
Chapter 4 /프랑스
이탈리아를 떠나 니스
모나코 태양 아래
기차는 멈출 것이다
크레이프를 기다리는 시간
마르세유 가는 기차
론 강의 낮달
아비뇽, 생 베네제 다리
님으로 가는 길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엑상프로방스 아침 시장
낭트는 수상해
신은 어디에나 계시니까
골짜기의 백합
카르나크, 시간이 남기고 간 자리
그 여자는 한국말을 모르니까
오래된 엽서들
천국보다 아름다운
어쩐지 눈물나는 파리
징글징글한 루브르
엄마, 나도 사랑을 하게 될까?
슬픔이여 안녕?
24시 메트로 카페
좋은 시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가
지베르니 가는 길
보들레르, 에스카르고
당신은 한국을 사랑하나요?
네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출판사 서평>
시리도록 아름다운 그 여행의 기록
행복은 바람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귀 밑으로 바람이 지나갈 때······
꿈꾸는 자들의 여행 일기
1. 시인 엄마
우물 속으로 내려가고 싶다
나는 나의 죽음을 한 입 한 입 맛보며 죽고 싶다
나는 나의 가슴을 이끼로 가득 채우고 싶다
물에 상처받은 아이를 보기 위하여
- 로르카, <물에 상처받은 아이>에서
저자 이미상은 로르카의 시에서 바람소리가 난다고 했다. 그녀의 글에서도 바람소리가 난다. 그 소리에는 추억과 향수와 열정, 문학과 예술과 인생이 투명하게 배어 있다. 바람 이는 깊은 우물을 지닌 시인 엄마. 그녀는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는 여고생 딸 솨니와 길을 떠난다. 이들은 다른 여행자들이 그랬듯이 떠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삶이란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고, 쾌락보다 고통이 더 많지만 끝까지 가야 하는 지난한 길. 그러나 미지의 세계를 향해 한 발짝 내딛는 순간 불안과 두려움은 어느새 뒤편으로 물러서고 단단한 땅이 펼쳐진다. 물리적인 공간을 여행한다 해도 결국 그 길은 각자의 내면을 따라가는 것이며 어두운 마음속 한쪽에 숨겨진 스스로의 빛을 발견하는 일인 셈이다.
일상이란 시간을 잠시 내려놓고 떠나는 건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건 자신을 비우는 일이기도 하고 잡초가 우거진 마음속 정원을 대면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이미상은 어쩌면 조용한 선동자일지도 모르겠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신비한 곡조에 이끌리듯 그녀를 따라 멀리 떠나고 싶어지므로. 매혹적인 사이렌의 목소리로 시인은 지중해의 에메랄드빛 바다, 이글거리는 태양, 눈부신 하얀 하늘, 짙은 꽃향기, 오래된 골목, 교교한 달빛 아래 고성(古城)과 생동감 넘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노래한다.
이미 수많은 여행자가 거쳐 간 길도 그녀의 세밀하고 따뜻한 시선과 사각거리는 감성의 필터를 거치면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길이 된다.
2. 예술가를 꿈꾸는 작은딸 솨니
솨니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늘 편두통을 달고 살았다. 선생님에게 특이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학교에서는 입을 꼭 다물고 살던 아이. 획일적인 중학교 교육방식에 적응하지 못해 1학년 때 자퇴를 한 후 솨니의 편두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후 솨니는 검정고시를 치르고 마음속 예술가의 불꽃을 피우기 위해 혼자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런 솨니가 첫 여름방학 때 한국행 비행기 표가 비싸다며 차라리 파리로 가서 그림이나 실컷 보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덜컥 비행기 표를 끊는다. 게다가 엄마 표까지.
이 여행의 시발점은 그랬다. 저자가 젊을 때부터 꿈꾸던 유럽 여행은 이렇게 느닷없이 이루어졌다. 에너지가 넘치는 고등학교 1학년 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얼떨결에 따라나선 여행길. 하지만 이렇게 떠나지 않았다면 먼 곳에 대한 동경은 늘 그리움으로 남았을 터이다.
3. 엄마와 딸
탯줄은 세상에 나오는 순간 모체와 분리되지만 엄마와 자식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탯줄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아이는 커가면서 정신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일구어나간다. 하나의 몸이었다가 둘이 되는 일. 아쉬움이 남을지라도 아이가 가야할 길. 나이 들어 파삭해지는 엄마와 물 먹은 수선화처럼 예쁘게 피어나는 아이. 엄마의 딸에서 딸의 엄마로 이어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이렇게 공존하는 시간 속에서 세상은 존속한다.
세파에 던져진 아이의 아픔을 위로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 아이의 슬픔과 절망에 같이 아파하며 울어주고 늙은 어깨를 내어주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을 때가 있다. 저자는 말한다. “나는 이제 아이가 울어도 달려가면 안 된다. 눈물을 보니 안쓰럽긴 했지만 어찌 독기 하나 없이 먼 길을 갈까. 누구나 살면서 무수히 많은 벽에 부딪힌다. 내 자식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다만 모든 벽은 문이라는 것을 내 아이가 좀 더 빨리 깨닫길 바랄 뿐이다”라고. 다른 시선으로 다른 길을 걷는 일이 많아질지라도 자식을 온전히 이해하며 응원하는 엄마와 성장하는 딸의 여행기는 그래서 특별하다.
4. 마음속 지도를 따라가는 길
여행을 하면서 모녀는 매일 일기를 썼다. 솨니는 가는 곳마다 그림을 그렸다. 마음에 바람을 일으키는, 그곳에 두고 온 짧은 추억들. 그 기억들은 유려한 문체와 아름다운 그림으로 되살아나 지나온 시간 속에 별처럼 붙박인다. 이들에게 여행은 오래전 잃어버린 떨림을 되찾아주는 한 편의 시이며 사색과 고요함 속에 마음속 지도를 따라가는 순례길이기도 하다.
책속으로 추가
아그리젠토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왜 우리가 이런 곳에 오는지를. 하늘은 짙푸르고 나무들 또한 진녹색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떤 색깔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오로지 한 가지 폐허만 존재한다. 거대한 폐허 앞에서 다른 피조물은 자멸한다.
승리의 폐허, 우리는 이것을 보러 왔다. 하늘은 땅을, 땅은 하늘을 끌어당겨 폐허만을 숭배한다. 폐허의 신봉자들. 들끓는 태양마저 압도당한다. 모든 역사와 자연과 인간과 예술도 결국 살아남아야 승리자다. 여기서는 폐허가 살아남았다.
솨니가 드로잉을 끝내고 바닥에서 흙을 한 줌 주워 그 위에 문지른다. 숲에선 매미가 혀를 차듯 울고 있다. (155쪽)
오래된 것들은 많은 말을 들려준다.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우리는 여행을 한다. 같은 언어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은데 낯선 것, 모르는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단 한 번이기에, 스쳐가는 것이기에 이들에게는 마음을 연다. 다시 올 수 없는 것들이기에 집중하고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인다. 발밑에 있는 돌멩이 하나도 가슴 시리다. (221쪽)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 옆에 작은 서점이 있다.
서점 여자에게 아감벤 책을 찾는다 했더니 “트램 60번을 타고 네 정거장 가서 내리면 큰 서점이 있어요” 한다. 여자는 아트숍과 영어 서점 있는 곳도 자세히 적어준다. 여자는 “찾는 책이 없어 미안합니다” 한다.
우리가 책들을 둘러보자 《스코틀랜드 44번지》라는 책을 소개한다. 줄거리까지 설명해준다. 여자가 너무 진지해 우리는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계속 들었다. 서점 여자는 어딘지 《아이 엠 러브I Am Love》의 여배우 틸다 스윈튼을 닮았다. 서점 책들은 책갈피 사이사이 카드가 끼워져 있다. 카드에는 예쁜 손글씨로 책의 리뷰가 꼼꼼히 적혀 있다. 나도 이런 서점 여자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동네서점들은 참고서만 가득해 서점의 운치라는 걸 잃어버렸다. (225쪽)
분수 옆 무화과나무 아래서 비를 피한다. 고흐, 로트레크…… 가난한 화가들이 살았던 몽마르트르. 보들레르가 혐오하던 파리에 비가 내리고 있다.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나 자신과 화해하는 일, 세상에 대한 모든 분노 뒤에는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내가 있다. 편안해진 것 같다가도 여전히 자신을 미워하는 순간을 만날 때가 있다. 아마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무화과 열매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떨어진다. (308쪽)
솨니가 보들레르의 무덤을 스케치하는 동안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고 묘지의 문 닫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온몸으로 시대의 아픔을 겪은 시인은 “우리가 남을 이해하는 깊이는 그를 사랑하는 정도와 같다”라고 했다. 내가 모순투성이 인간들에 대해 그나마 이만한 아량이라도 갖게 된 것은 보들레르를 사랑한 덕분이라 말할 수 있다. 솨니도 언젠가는 인정하게 되리라. 모든 존재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순을 인정하는 그 자리에 예술이 머문다는 것을. 전철이 고가를 지나고 있다.(323쪽)
<책 속으로>
아빌라에 간다. 태양은 나무들에게 제 모양대로 그늘을 주었다. 투명한 초록의 잎들이 은빛으로 빛난다. 버스는 아카시아꽃이 만발한 작은 마을 라 카소나로 들어간다. 닫힌 버스 안에서도 꽃향기가 난다.
“아빌라는 책자에도 없는데 엄마는 뭐 볼 게 있다고 가?”
“나도 몰라. 시인 로르카가 좋아한 곳이라 그냥 가보고 싶어.”
광활한 평원과 완만한 구릉. 도로변에는 노란 꽃.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운 여인처럼 꽃들은 어울리는 자리에 흩어져 피어 있다.
열일곱에 나는 이런 길을 가지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며 해가 질 때까지 걷던 길, 자전거를 타고 햇살 속을 달리던 길.
코스모스가 피고 미루나무 가로수 사이로 버스가 오가던 길. 나는 허락한 적이 없는데 누가 그 길들을 다 없애버렸나.
로르카는 《인상과 풍경》에서 아빌라를 쓸쓸하게 그렸다. 추운 겨울 저녁이라 그랬을까. 아름다움 앞에 오는 슬픔 때문일까.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에서 슬픔을 먼저 느낀다. 내게 머물 수 없기에, 내가 가질 수 없기에,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을 어찌하랴. (28-29쪽)
나는 타성에 젖지 않으리라 했다. 고정된 삶을 살지 않으리라, 절대로 《연금술사》에 등장하는 크리스털 장수 같은 삶은 살지 않겠다고 했다. 내 딸들에게 늘 “네가 원하는 길을 가라. 꿈을 포기하지 마라” 했다. 그러나 꿈을 갖고 살기처럼 힘든 일이 있을까. 그 꿈이 나이 들면 절망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되면 어쩌나.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Revolutionary Road》에서 아이를 낳고도 꿈을 멈추지 않는 ‘에이프릴’을 그녀의 남편도 친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신병원에서 나온 이웃의 수학자 ‘존’은 에이프릴을 이해했다. 존이 말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허무와 절망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진짜 절망을 보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에이프릴이 말했다. “나보고 다들 미쳤다는데 미친 것이 제대로 사는 거라면 난 미쳐도 상관없어요!”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구하지 못했다. 용기 내어 일어서려는 자는 절망을 각오해야 한다. 그 절망을 넘어서야 비로소 꿈이 시작된다. (53-54쪽)
레비 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인류학자란 필연적으로 자신의 사회 내에서는 비판자가 되며 자신의 사회 밖에서는 동조자가 된다” 했다. 자신의 사회에 결여된 무엇인가를 다른 사회에서 파악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학자만이 그럴까.
예술가도 시인도 여행자도 그렇다.
세상의 모순을 피하려 하지만 더 큰 모순이 기다리고 있다. 내게 결여된 것들을 찾아 여행을 떠나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결핍이 존재한다. 설령 기대한 것이 있다 해도 내게 올 수 없어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여행을 떠나면 세상이 달라지고 사람도 바뀔 줄 알았는데, 시칠리아의 저녁 바다에서 마주친 나는 여전히 모순투성이 인간으로 초라하고 솨니도 쓸쓸해 보인다.
중학교에 들어간 솨니가 불안불안하던 어느 날 “죽을 것 같아, 일분일초도 학교에서 못 견디겠어” 했다.
그즈음 우리 아파트 7층에 사는 고등학생이 투신해 우리 라인 현관 지붕 위로 떨어졌다. 오전 수업이 일찍 끝났다며 솨니가 학교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서서 “엄마, 저기 어떤 사람이 누워 있어” 했다. 4층인 우리 집 계단참에서 엎드려 있는 남학생이 내려다보였다. 내가 늦잠을 자고 있던 토요일 오전이었다.
“일단 기말고사 끝나고 방학 동안 고민해보자.”
나랑 그렇게 약속해놓고 12월 1일 솨니는 방문을 잠갔다. 베란다 쪽 창문도 봉쇄했다. 전문가에 따르면 “이럴 때 부모가 방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 했다.
나는 아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방문 앞에서 인기척을 살폈다. 잘 때도 아이 방문 앞에서 잤다. 현관문의 잠금 고리에 작은 종을 달아놓았다.
아이는 식구들이 잠들면 창문을 넘어와 화장실에 가고 냉장고에서 음식들을 꺼내갔다. 나는 냉장고를 비웠고 먹을 것들은 안방에 두고 문을 닫았다. 아이가 볼 수 있도록 화장실 거울에 매일 편지를 붙여놓았다.
보름이 지난 늦은 아침, 아이는 앙상한 다리로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아이는 국에 밥을 말아 먹으며 눈이 빨개졌다. 나는 식도가 다 헐어 밥이 넘어갈 때마다 쓰라렸다.
욕조에 물을 받아 아이를 씻겨주었다. 거실 해가 드는 곳에 아이를 눕히고 얼굴 마사지를 해주었다. 우리는 레스토랑에 갔고 서점에 들러 책을 사고 영화를 봤다. 솨니는 일단 검정고시를 보겠다고 했다. 다음 날 나는 학교에 가서 아이의 자퇴서를 제출했다. (133-135쪽)
자료제공(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