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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9장 31-37절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옆구리를 찌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것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의 모든 과정은 성경을 응하게 하는 역사입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는 역사라는 것은 단지 구약의 약속과 그 약속에 대한 신약에서의 성취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가운데 그러한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영원 전에 장차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하여 작정하시고 작정하신 바를 그대로 실행하시는데, 거기에 무엇을 두셨느냐? 특별히 구약 시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더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성취가 신약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취 가운데 지난 시간 우리가 살펴본 내용은 예수님께서 입으신 옷을 군인들이 나눠가질 때 어떤 옷은 나눠가졌지만 통으로 짠 옷에 대해서는 제비를 뽑았는데, 사소한 내용 같지만 이러한 내용조차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칼빈은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옷이 나눠지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옷이 발가벗겨지는 내용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는 본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자리에 있어야 할 자로서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기 위함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죄인의 옷을 벗겨 수치를 주는 것, 사람들이 볼 때는 사소한 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뜻이 거기에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더불어 지난 시간 성경을 응하게 하는 역사로 신 포도주를 마시는 내용도 있었는데, 인용되고 있는 구약의 말씀에 비춰보면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자발적으로 받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고, 목마른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여 예수님의 입에 대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그가 대신하여 다 받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성취와 관련된 두 가지 내용 사이에 한 가지 교훈의 말씀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시기에 앞서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는 택하신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만 회복하도록 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왜 선지자들이 하나님 사랑과 관련된 계명만이 아니라, 이웃 사랑과 관련된 계명에 대해서도 자주 책망하는 일이 있었는가? 또한 사도들의 서신을 통해 참된 교리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난 뒤, 왜 항상 그런 교리에 합당한 삶을 말하는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율법의 성취를 위하여 자신의 모친을 자신의 제자 사도 요한에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친히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뜻하신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다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심으로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피게 되는 내용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죽으셨지만, 죽음 이후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는 내용을 계속해서 보게 됩니다. 먼저 31절입니다.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요한복음의 경우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과 다음 주에 살피게 될 아리마대 요셉 그리고 니고데모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자들의 반응에 대하여 기록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먼저 확인하겠는데, 누가복음 23장 47절입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백부장이라는 직책은 로마의 군인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된 일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이르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정녕 의인이었다는 것이 그의 고백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서는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54절입니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죽으시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면서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인 것입니다. 그 일이 얼마나 놀랍던지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그 지진과 일어난 일들을 보고서 심히 두려워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동시에 기상이변이 일어난 것을 기록하고 있고, 단순히 기상이변 정도가 아니라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나오는 기이한 일까지 벌어진 것입니다. 그 된 일을 보고서 이방인인 백부장이, 그리고 그와 함께 있던 군인들이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죄인이 아닌 의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의 반응은 어떠한가? 우선 성경은 이 날이 ‘준비일’임을 상기시킵니다. 무엇보다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라고 말하는데, 큰 날로서의 특별한 안식일, 즉 유월절에는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요청하기를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율법에 명백히 지시된 사항입니다. 신명기 21장 22절과 23절에 보면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 빌라도에게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는 요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이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그들은 외식하는 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지금 저들은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리면서 사소한 부분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겁니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서도 안식일만큼은 거룩히 지키려고 하는 그런 외적인 면만 신경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15:22) 무슨 말씀입니까? 번제와 다른 제사를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겁니까? 번제와 다른 제사 제도를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신 것인데, 어떻게 싫어하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제사라면, 말씀과 상관없는 제사라면 결코 좋아하실 수 없고, 기뻐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모든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요,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 없이 제사면 무조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유대인의 자세는 어떤 면에서 사울 왕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종교적인 외형과 형식은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따라 큰 날로서의 안식일에는 더더욱 시체를 십자가에 둘 수 없다고 하여 치워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아직 죽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에 다리를 꺾어서라도 속히 죽여 시체를 치워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지 전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거룩함을 위하여 말하고 있지만 정작 내적 거룩함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자 하니 이 얼마나 모순적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안식일의 주인인데도, 그런 주인을 죽이면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자 하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 행동입니까? 이런 예배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저들에게 하실 수 있는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 밖에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1-13)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무조건 제사만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예배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몸만 나와서 예배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믿음을 따라 순종함으로 드리는 예배여야 합니다. 지금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죽임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며,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그들의 입은 외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거 할 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이런 자세는 이미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는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28절에 보면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고 말씀하는데, 철저히 외적 정결에만 온통 마음이 가 있을 뿐 그 마음을 정결하게 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조금 전에 언급한 백부장과 비교해 보자면 지금 유대인의 죄는 더욱 더 심각한데, 왜냐하면 백부장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도 그의 죽으심에 대하여 어떻게 고백합니까?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땅이 흔들리고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결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지진이 일어날 때 그들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지만,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즉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으로서 죽은 것임을 넌지시 인정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그런 죄인의 시체를 십자가에 달린 채로 있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아셔야 합니다. 진리에 대하여 무뎌도 너무 무딘 것입니다. 이방인보다 더 무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친근하다고 할 수 있는 유대인에게 오셨지만 바로 그 유대인에게 배신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구원을 열어놓았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가장 불편할 수 있는 내용 속에서 하나님은 가장 놀라운 내용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최악일 수 있는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최상의 일을 결과 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의 타락을 정하셨습니다. 또한 아담 안에서 타락한 자들 중 택하신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기로 정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드셨지만 그 상태에서 구원하시는 게 아니라, 가장 밑바닥까지 가게 하셔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앉히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를 알게 하시도록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하셨다가 우리를 높이시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역시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낮아지시고 다시금 높아지신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유대인들은 큰 날로서의 안식일에는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않기 위해 빌라도에게 치워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죽지 않을 것을 염두 해 두었는지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겁니다. 어떤 분은 십자가형이 수족을 형틀에 못 박아 세워놓음으로 살이 찢어지고 뼈마디가 어그러지는 고통 속에서 피가 천천히 흘러나와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형별이기 때문에 처형방법과 죄수의 상태에 따라 사망에 이르는 시간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죽기까지 며칠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때문에 유월절을 정결하기 지키기 위해 십자가를 치웠으면 할 때 죽지 않은 상태로 치우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완전히 죽여서 치워달라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경건을 위한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그들 마음의 완악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요청에 대하여 오늘 본문 32절, 33절에 보면 강도 두 사람은 그렇게 하였지만 예수님에 대하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꺾으면 다 꺾어도 될 일이지만, 강도 두 사람은 다리를 꺾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대신 34절에 보시면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말씀하는데, 아마도 그의 죽음을 확인하는 내용으로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죽음을 확인하게 위해 다리를 꺾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나 피와 물이 나오는 것을 통해 그의 죽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성경을 응하게 하는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다리를 꺾지 않은 내용과 관련해서는 오늘 본문 36절에서 말합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이와 관련된 말씀은 시편 34편 20절입니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여러분, 시편 34편은 표제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어떤 면에서 굉장히 비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1)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4)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권면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8-9)고 말합니다. 이러한 확신은 이어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0)는 말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물론 후반부로 가면 인용한 20절 바로 앞인 19절에서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많다할지라도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20절입니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결국 오늘 본문이 인용하고 있는 시편 34편 20절은 어떤 의미냐? 고난이 없지는 않지만, 실제로 예수님조차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뼈가 꺾이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지만 그런 고난에서 건진다는 것이고, 그 말은 고난이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의 백성을 완전히 넘어뜨리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에 근거한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이루신 바를 자기 백성에게 주신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모든 은택을 받은 자들은 결코 구원의 길에서 이탈하거나 넘어져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견인의 은총이 주의 모든 백성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그리스도의 뼈가 꺾이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견인은 우리 자신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견고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꺾이지 않는 뼈에 있습니다. 그분의 뼈가 꺾이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론으로 할 때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 된 교회를 꺾도록 만드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고난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시편 34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의인이기 때문에 고난이 많습니다. 의인인데도 고난이 없다면 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다면 죄와의 싸움으로 인한 고난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은 여전히 죄를 향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권면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2-14) 육체의 고난도 고난입니다. 물질의 고난도 고난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고난 가운데 가장 많이 나타나는 고난은 사도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2-23)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바울과 같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침 속에서도, 그리고 이런 외침 속에서 자주 넘어지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로 옷 입은 이상 교회라면,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면 그 뼈가 꺾이는 일은 없습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요, 주의 모든 백성에게 주시는 위로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고 이것 때문에 우리는 더욱 죄와의 싸움을 용기 있게 싸울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기기보다는 지는 일이 더 많은데 어떻게 용기를 낼 수 있겠습니까? 지고 또 지면 자포자기(自暴自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리가 꺾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다리를 꺾이지 않도록 하셨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자신의 다리가 꺾이지 않도록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를 내놓으시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자기 양이라면 한 마리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여기에 우리가 용기를 낼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겁니다.
때문에 죄로 인하여 너무 죽을상만 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 가운데 있지만, 그리고 고난 가운데 넘어지는 일이 있지만, 그것도 자주 넘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용서를 구하면서 담대히 맞서 싸우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 36절 내용은 시편 34편을 인용한 것이지만, 좀 더 일찍 출애굽기 12장 46절을 통해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또한 민수기 9장 12절에서는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고도 말씀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예표 되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약 백성들은 바로 이런 모형을 통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봄으로 구원의 모든 은택을 받아 누렸습니다.
일반적으로 구약 백성과 관련해 이스라엘은 실패했다는 말을 하는데, 실패했다는 말을 하기 때문에 견인의 은총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실패한 것은 철저히 그들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할 때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비록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본 자들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형을 통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면서 참된 믿음 가운데 있는 자들은 그들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보존되고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합니다. 야곱이 그러합니다. 다윗이 그러합니다. 솔로몬이 그러합니다. 분명 그들은 그들의 죄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에서 늘 주의 은혜를 찬송했던 것입니다.
이런 은혜는 구약 백성만이 아니라 신약 백성에게는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모형으로 봤지만 우리는 실체로서 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확신 가운데서 서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실력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더욱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33절에서 예수님의 다리는 꺾지 않으신 반면 34절에서 군인 한 사람이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을 찌른 내용이 나옵니다. 거기서 피와 물이 나왔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결코 거짓된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리는 꺾이지 않도록 하면서도 한 군인에 의해 옆구리에 창을 찔러 피와 물이 나온 이 내용 역시 37절에 의하면 성경을 응하게 하는 역사인데, 일단 35절에 보면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모든 내용은 결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란 것입니다. 거짓 없는 참된 것으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해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36절, 37절을 통해 구약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결국 율법의 모든 모형들과 예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그것을 믿도록 할 목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믿지 않고 있습니다.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증거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습니다.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할 뿐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백부장조차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강퍅하고 무지함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다리가 꺾이지 않는 것도 우리의 믿음과 관련된 내용이고, 나아가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을 때 피와 물이 나온 것도 우리의 믿음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피와 물이 나왔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일단 요한일서 5장 6절을 보시면 사도 요한이 이렇게 증거 합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피와 물은 칼빈의 설명에 의하면 진정한 속죄와 진성한 정결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알려진 내용입니다. 죄 사함, 의, 그리고 영혼의 순결은 제사와 정결 예식이라는 두 가지 상징을 통해 율법에 예표 되었는데, 제사에서 피는 죄를 속하는 데 사용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는 데 지불되는 대가입니다. 그리고 정결 예식에서 물은 말 그대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것은 부정과 육신의 오점을 제거하는 수단입니다. 요한일서 5장은 이러한 구약의 제사와 정결 예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어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사실 ‘다 이루었다’는 말씀 안에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성취가 되었는데도 죽음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확인하도록 할 때 피와 물을 쏟으신 것은 이 사실에 대한 눈에 보이는 상징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 가운데서는 이것이 신약의 성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교회에게 남겨 두신 성례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약의 성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례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입니다. 세례는 물로 상징됩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상징됩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정결을 생각할 수 있고, 성찬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속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이라는 교부는 우리가 성경에서 취한 성례가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칼빈은 이런 어거스틴의 견해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언의 말씀에 따라 그의 다리가 꺾이지 않았다는 것이고, 대신 그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께서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는 것이고,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모든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의 속죄와 정결을 위해 피와 물을 쏟으셨다는 것입니다. 성례로 하자면 언약의 피와 구원의 표인 물을 우리에게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옆구리에 창을 찔러 피와 물을 쏟았다고 할 때 오늘 본문 37절은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는데, 이 부분은 스가랴 12장 10절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찌른 자는 로마 군인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약 스가랴 12장 10절의 내용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할 때 스가랴의 말씀은 어떤 면에서 언약 백성인 유대인이 찌른 것으로 예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대인들로 인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을 더하십니다. 또한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 찌른 대상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게 하십니다. 이런 애통으로 말미암아 스가랴 13장 1절에서는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고 말씀하시는데, 결국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말씀이 성취된다고 할 때 지금은 저들이 찌른 자들로 있지만, 찌른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볼 것이요 하나님의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통해 회개하게 할 것이요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통해 나온 피와 물로 말미암아 그들의 모든 죄와 더러움을 씻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물론 유대인 모두는 아닙니다. 또한 유대인이라고 해서 이방인이 제외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으로 시작해서 이방인에게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될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신 자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달리 말하면 유대인만이 아니라 사실은 죄인이라면 죄인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한 장본인입니다. 당연히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 우리에게 스가랴의 말씀처럼 은총을 베푸심으로, 간구하는 심령을 주심으로 회개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자리에 앉아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게 하시고, 또한 그분의 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정결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이 꺾이지 않게 하신 것,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오도록 찌른 것,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 역시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예언하신 것이고, 예언하신 그대로 성취하신 역사로 있습니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뜻의 의논에 따라 작정하신 내용으로 있고,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대로 실행된 역사로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냐? 택하신 자기 백성을 위해서입니다. 이런 실행의 역사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면서 다 이루셨습니다. 피와 물을 쏟으시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속죄를, 우리를 위한 정결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 구원의 은총이 얼마나 견고한지 그의 뼈가 꺾이지 않는 것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고난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자들, 그들에게는 더 많은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광은 고난이라는 과정을 필수로 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꺾이지 않습니다. 완전히 넘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는 그만큼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구원의 모든 길에서 의지해야 할 대상은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며, 우리를 위하여 중보자를 세우신 하나님 밖에 없음을 다시금 새기고 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여정들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