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징계의 선포(35-43)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직하고 진실해야 하며, 자신의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불의와 잘못된 행동의 대가를 인식하고 회개할 기회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회복과 용서를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언제든지 돌아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35그러므로 너 음녀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36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네 누추한 것을 쏟으며 네 정든 자와 행음함으로 벗은 몸을 드러내며 또 가증한 우상을 위하며 네 자녀의 피를 그 우상에게 드렸은즉 37내가 너의 즐거워하는 정든 자와 사랑하던 모든 자와 미워하던 모든 자를 모으되 사방에서 모아 너를 대적하게 할 것이요 또 네 벗은 몸을 그 앞에 드러내 그들이 그것을 다 보게 할 것이며 38내가 또 간음하고 사람의 피를 흘리는 여인을 심판함 같이 너를 심판하여 진노의 피와 질투의 피를 네게 돌리고 39내가 또 너를 그들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네 누각을 헐며 네 높은 대를 부수며 네 의복을 벗기고 네 장식품을 빼앗고 네 몸을 벌거벗겨 버려 두며 40무리를 데리고 와서 너를 돌로 치며 칼로 찌르며 41불로 네 집들을 사르고 여러 여인의 목전에서 너를 벌할지라 내가 너에게 곧 음행을 그치게 하리니 네가 다시는 값을 주지 아니하리라 42그리한즉 나는 네게 대한 내 분노가 그치며 내 질투가 네게서 떠나고 마음이 평안하여 다시는 노하지 아니하리라 43네가 어렸을 때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이 모든 일로 나를 분노하게 하였은즉 내가 네 행위대로 네 머리에 보응하리니 네가 이 음란과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다시는 행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5-43)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고 불신으로 인해 심판을 받는 상황이 묘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와 배신을 고발하며, 정당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회복과 용서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 선포의 도입부(35)
예루살렘의 종교적·정치적 음란을 배은망덕으로 고발하신 후(3-34), 여호와께서 음녀 예루살렘에게 그 악행에 상응하는 징계의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음녀야’ 호격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35절과 이사야 23:16에 두 번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정체성이 음녀로 규정됩니다. 여호와에 의해 아내로 택함을 받고 왕후의 지위에 오른 예루살렘이 ‘모든 지나가는 자에게 다리를 벌리는’(25) 창녀가 됐습니다. 남자만 보면 흥분해서 알몸을 드러냈습니다.
(2) 징계의 요약적 근거(36)
정치적으로는 정부들(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을 바꿔가며 놀아났고(26-29), 종교적으로는 자기 자녀들의 피를 드려가며(20-21) 온갖 우상들과 음란을 즐겼습니다(36).
(3) 징계(37-42)
이제 예루살렘은 그동안 지치지도 않고 저질렀던 간음의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남편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미워하던 자들뿐만 아니라 함께 즐기던 정부들까지 모두 모아들여 그들 앞에서 예루살렘의 알몸을 드러내십니다(37). 알몸으로 음행을 즐긴 자에게 모든 사람 안에서 알몸이 되는 형벌이 선고됩니다. 공개적 장소에서 알몸이 되게 하는 것은 간음한 자에 대한 사법적 징벌의 상징적 행위에 해당합니다(참조. 예레미야 13:22,26; 호세아 2:10). 전에 해웃값을 받고 놀아주던 애인들(33-34)이 예루살렘을 징벌하시는 여호와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동맹을 맺었던 나라들마저 적이 됐기에 예루살렘은 어디에도 도움을 구하는 손을 내밀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이 간음하고 피를 흘린 여자들처럼 재판을 받고 여호와의 진노와 질투에 넘겨집니다(38). 간음은 중죄로 죽음에 넘겨졌습니다(참조. 출 20:14; 레 18:20; 20:10; 신 22:22). ‘피를 흘리는 여인’은 현재 문맥에서 36절의 어린아이 희생 제사와 관련한 고발입니다. ‘진노와 질투의 피’는 간음하고 피 흘린 아내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질투를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질투는 이스라엘과의 결혼(언약) 관계를 배경으로 하는 표현입니다. 그분의 질투는 언약에 신실한 아내에게는 보호로(참조, 왕하 19:31; 사 9:7; 37:32; 59:17), 언약을 배반한 아내에게는 진노로(참조, 시 79:5; 겔 5:13; 8:3, 5; 23:25)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질투가 구체화합니다. 남편 여호와께서 간음한 아내 예루살렘을 사방에서 데려온 자들의 손에 넘겨 철저하게 징벌하십니다(39-41). 음행을 위해 길 어귀마다 쌓은 누각과 광장마다 만든 단(24-25, 31)이 (한때 같이 놀던 자들에 의해) 다 파괴되고, 우상을 만드는 데 쓴 여호와께서 주신 패물(17절의 ‘장식품’)은 빼앗기고 우상을 치장하는 데 사용한(16,18) 옷은 벗겨져 알몸이 됩니다(39). 모든 것을 빼앗긴 것으로 징벌이 끝나지 않습니다. 간음한 자를 돌로 죽이듯이(참조. 신 22:23-24) 무리가 예루살렘을 돌로 치고 칼로 토막을 내고, 집들을 불사릅니다(40-40a). 여호와를 배반한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고 철저하게 파괴됩니다. 열왕기하 25:9에 따르면 바벨론 군대는 약탈이 끝난 예루살렘에 불을 놓아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포함한 모든 집을 불태워버렸습니다. 41b-43절은 심판 이후의 회복을 내다보는 말이 아니라,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게 집행될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기에 음행을 하거나 해웃값을 주는 일이 없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분노가 풀리고 질투가 사그라지기까지, 마음이 진정돼 다시는 노하지 않으시기까지 예루살렘을 벌하십니다. 배은망덕한 예루살렘에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은 경감되거나 중단되는 일 없이 철저하게 집행됩니다.
(4) 요약적 진술(43)
예루살렘이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않고 하나님을 분노하게 했기에 그분께서 분노와 질투로 갚으십니다. 모든 가증한 일에다가 음란마저 저지른 예루살렘에게는 완전한 멸망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소돔과 사마리아와 예루살렘(44-52)
개인이나 공동체의 잘못된 선택은 더 큰 심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결국 자신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도덕적 기준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44○속담을 말하는 자마다 네게 대하여 속담을 말하기를 어머니가 그러하면 딸도 그러하다 하리라 45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머니의 딸이요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며 46네 형은 그 딸들과 함께 네 왼쪽에 거주하는 사마리아요 네 아우는 그 딸들과 함께 네 오른쪽에 거주하는 소돔이라 47네가 그들의 행위대로만 행하지 아니하며 그 가증한 대로만 행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적게 여겨서 네 모든 행위가 그보다 더욱 부패하였도다 48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우 소돔 곧 그와 그의 딸들은 너와 네 딸들의 행위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9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 50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51사마리아는 네 죄의 절반도 범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네가 그들보다 가증한 일을 심히 행하였으므로 네 모든 가증한 행위로 네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하였느니라 52네가 네 형과 아우를 유리하게 판단하였은즉 너도 네 수치를 담당할지니라 네가 그들보다 더욱 가증한 죄를 범하므로 그들이 너보다 의롭게 되었나니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하였은즉 너는 놀라며 네 수치를 담당할지니라(44-52)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죄가 다른 민족보다 더 심각하다는 경고가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며, 그들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궁극적으로, 회개를 통해 회복의 기회가 주어짐을 상기시킵니다.
(1) ‘그 어머니에 그 딸’(44-45)
예루살렘의 음란이 그 어머니에게로 소급되면서 속담이 되고, 다른 두 음란한 자매들과 비교됩니다. 속담을 즐겨 사용하는 자들은 음란한 예루살렘과 관련해서 ‘어머니가 그러하면 딸도 그러하다’(44)고 말할 것입니다. 어머니가 딸의 부정적 거울이 되면서 둘이 운명공동체로 연결됐음을 보여주는 속담이 예루살렘에 이중적으로 적용됩니다. 예루살렘은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머니의 딸’이고,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자매들의 자매’였습니다(45a). 어머니가 음란한 가나안 출신이기에 그 딸 예루살렘 역시 음란했고, 그의 자매들도 마찬가지로 음란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음란은 후천적으로 습득한 나쁜 버릇이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천성에 속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음란한 어머니의 딸답게, 음란한 자매들의 자매답게 음란했습니다. ‘형의 동생’은 문자적으로는 ‘자매들의 자매’로, ‘자매들과 동기’를 의미합니다.
(2) 사마리아와 소돔보다 더 부패한 예루살렘(46-47)
예루살렘의 두 자매가 소개됩니다. 자기 딸들과 함께 예루살렘 왼쪽에 살던 사마리아가 언니로, 자기 딸들과 함께 예루살렘 오른쪽에 살던 소돔이 동생으로 나옵니다(46). 이스라엘은 태양을 바라보며 좌우를 정했기에, 왼쪽이 북쪽이고 오른쪽이 남쪽이 됩니다. 북왕국을 대표하는 사마리아는 예루살렘 북쪽에, 아마도 사해 남단에 있었던 소돔은 그 남쪽에 위치합니다. ‘그 딸들’은 사마리아나 소돔에 속한 주변 성읍들을 가리킵니다. 어떤 연유에서 사마리아가 첫째가 되고 소돔이 막내가 됐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연대기적으로 보자면 창세기 18:16-19:28에 등장하는 소돔이 가장 먼저이고, 오므리(882/78-871)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도가 된 사마리아(왕상 16:24)가 가장 늦습니다. 아마도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특권 의식을 비판하기 위해 사마리아와 소돔과 예루살렘을 한 어머니의 세 자매로 언급한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입장에서는 매우 도발적인 비교였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다가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한 사마리아는 그렇다 치고(참조, 23장), 소돔과의 혈연적 연결은 분노를 유발할 정도로 모욕적이었을 것입니다. 전설이 된 소돔의 죄악과 멸망 때문에 소돔을 등장시킨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타락은 이미 심판을 받은 사마리아와 소돔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와 소돔의 길을 따라가면서 가증한 짓을 행한 예루살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면에서 그들보다 더 타락하였습니다(47; 5:6-7). 죄악에 있어서는 예루살렘이 사마리아와 소돔을 초라하게 만들었습니다.
(3) 소돔과 사마리아의 비교(48-50)
예루살렘을 사마리아와 소돔에 비교하여 고발한 다음, 다시 소돔과 사마리아의 죄악이 예루살렘에 비교하여 언급되고 있습니다(48-51a). 여호와 보시기에 동생 소돔과 그 딸들의 행위는 예루살렘과 그 딸들이 저지른 것만큼은 아니었습니다(48). 소돔은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으면서도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고 거만을 떨며 가증한 일을 저지르다가 이를 보신(참조. 창 18:21) 여호와에 의해 멸망의 심판에 떨어졌습니다(49-50). 성적 타락을 언급하는 창세기 19:5-6과 달리 여기서는 사회적 연대성을 무시하는 불의가 멸망의 주된 원인으로 제시됩니다. 소돔은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누리며 살면서도(참조. 창 13:10)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누이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이 지은 죄의 절반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51a).
(4)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한 예루살렘의 음란(52)
예루살렘에 비교하면 사마리아와 소돔은 차라리 의롭게 보였습니다(51-52). 예루살렘 덕분에 사마리아와 소돔의 가증한 짓들이 사소하게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네 죄의 절반도 범하지 아니한’ 사마리아가 멸망했다면, ‘너와 네 딸들의 행위 같이 행하지 아니한’ 소돔과 그 딸들이 심판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면, 이들을 의롭게 할 정도로 가증한 일을 많이 행한 예루살렘의 운명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뢰와 충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이스라엘의 배신과 불신은 심판을 초래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를 깊이 성찰하고, 잘못된 길에서 돌아설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으로서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지만, 동시에 무한한 사랑으로 회복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믿고, 그분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