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歲寒圖) 발문(跋文)
지난해에 두 가지 <만학>, <대운> 책을 부쳐왔고, 금년에는 <우경문편>이라는 책을 부쳐왔는데,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요. 머나먼 천리 밖에서 구한 것이며, 여러 해를 거쳐 얻은 것이요, 일시적인 일이 아니다. 더구나, 세상은 물밀 듯이 권력만을 따르는데, 이와 같이 심력을 써서 구한 것을 권력 있는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밖의 한 초췌하고 메마른 사람에게 주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권력자에게 추세하는 것과 같구나.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력으로 합한 자는 권력이 떨어지면 교분이 성글어진다고 하였는데, 군도 역시 이 세상에 살고있는 사람일 텐데, 권력에 추세 하는 테두리를 초연히 떠나서 권리를 쫓아 들어가지 않으니, 나를 권력으로 대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이후라야 소나무, 잣나무는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 고 하였다. 송백은 사철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세한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이다. 성인이 특히 세 한을 당한 이후를 칭찬하였는데, 지금 군은 전이라고 더한 것이 없고, 후라고 덜한 것이 없구나. 세한 이전의 군을 칭찬할 것 없거니와, 세한 이후의 군은 또한 성인에게 칭찬받을 만한 것 아닌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한, 갖 시들지 않음의 정조와 근절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세 한의 시절에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 서한의 순박한 세상에 급 암, 정당시 같은 어진 이에게도 빈객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곤 하였으며, 하비의 방문 같은 것은 박절이 너무 심하였으니 슬픈 일이다. 완당 노인 쓰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上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非一時之事也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爲之 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槁之人 如世之趨權利者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오늘은 완당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 발문(跋文)을 발췌(拔萃)하여 게시(揭示)하게 되었다. 제주도(濟州島)로 유배 귀양 위리안치(圍籬安置) 9년간 끊임없이 발문 내용과 같이 변하지 않고 도와주었던 이상적(李尙迪)을 위해서 이 세한도(歲寒圖)를 그려서 주었다고 한다. 이상적(李尙迪)은 역관출신(譯官出身)으로 12차례나 중국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제주도 유배(流配) 생활을, 하는 완당을 위해서 구입(購入)한 귀한 책과 각종(各種) 자료(資料)들을 선물(膳物)로 제주도 유배지로 보내 주니, 감사 감격하는 마음을 세한도를 그리고 세한도를 그리게 된 연유를 발문으로 써준 내용이다. 공자님 말씀에 날이 추워진 연후에 소나무 잣나무가 나중에 시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이상적(李尙迪)의 변함없는 사제지정(師弟之情)을 칭찬으로 나타낸 말이다. 세한도에는 이상적이 청나라 당대 문인들과 교우를 맺고 교류하면서 이 인연으로 세한도를 그들에게 보여주고, 청나라 최고 문인학자 16인의 세한도를 보고 느낀 글을 적은 것이 세한도 그림 우측 공백에 붙인 것이 세한도 칭송(稱頌) 찬이라고 한다. 세한도가 우리나라 문화재가 된 것은, 알고 보면 손재영 선생님의 문화재 사랑에서 비록되었다고 한다. 세한도는 일본인(日本人) 도쿄 우에노의 후지스카 지시카(藤塚隣)가 소장하게 되었는데, 미술품 수집가 손재형 선생이 그의 집을 찾아가서 제게 세한도를 파 십시오. 그렇게 하기를 100일간 매일 찾아가서 세한도는 조선에 있어야 할 문화재(文化財)입니다. 저에게 세한도를 팔아라고 눈물로 하소연함으로써 후지스카 치카시가 졌다. 댓가도 없이 세한도를 손재형 선생에게 넘긴 것이다. 선비가 아끼던 것을 어찌 값으로 따질 수 있으리. 돈은 됐소. 보존만 잘 해 주시오.
“후지스카가 조금만 더 결심을 늦추었더라면 우리는 영원히 세한도를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세한도를 양도한 직후 미군의 폭격으로 후지스카의 집이 불타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후지스카 치카시는 아들에게 “조선의 보물은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고 그 아들은 2006년 사망하기 전 아버지가 모았던 추사 친필 글씨 26점, 추사와 관련된 서화류 70여 점 등 1만여 점을 과천시에 기증하면서 현금 200만 엔까지 더해 왔다. 손재형의 정성에 대한 감동이 그 아들 대에까지 이어진 것이리라. 세한도를 손에 넣은 손재형의 기쁨으로 돌아 가보자. 조심스럽게 그림을 펼치는 그의 눈은 그림을 비출 듯이 빛났고, 온전히 드러난 세한도 앞에서 다시금 가슴은 심하게 고동쳤다. 겨울 칼바람이 쓸고 지나간 듯 황량한 여백에 얹힌 허름하고 구멍 뚫린 집 한 채, 그러나 엄동설한의 칼바람에 흔들림 없이 섰고, 그 가지에 달린 잎들도 무성하고 싱싱한 소나무와 잣나무 4그루. 추사 김정희의 필법과 화법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이 귀물이 돌아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해방 조선에 퍼졌고 많은 이들이 그림을 보기를 원했다. 그 가운데 손재형은 당대의 석학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정인보와 이시영, 그리고 오세창에게 세한도를 보이고 이들로부터 발문을 받는다. 이 세 명의 발문은 세한도에 바쳐진 마지막 배관기(拜觀記) 즉, ‘절하면서 보았던 기록’이다. 그 앞에는 한때 그림을 소장했던 김석준과 청나라의 명사 16명이 세한도를 보고 남긴 감상들이 줄줄이 붙여져 있었다. 그래서 세한도를 다 펼치면 길이는 무려 14m에 달한다. 세한도(歲寒圖)라고 예서체로 쓴 제목 옆으로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고 쓰여 있다. 이 우선(藕船)은 이상적(李尙迪)의 호(號)다. 즉 “이상적은 이 그림을 감상하시라. 는 제목이면서 이 세한도가 이상적을 위해 그려졌다는 김정희 본인의 증명 증언이다.“추사는 세한도에 우리 서로 잊지 말고 오래도록 살세.(장무상망(長毋相忘)로 낙관(落款)을 했다. 세한도는 2020년 12월9일 손창근옹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세한도는 인문화 국보180호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로 기증한 손창근옹을 초청하고 문화유산 유공자로 포상하고 금관문화훈장을 주었다. <일부는 옮긴 글> 오늘은 인문화 국보180호 김정의 세한도를 반추해보았다. 여여법당 화옹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