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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선한 양심을 가지라.
* 본 문: 딤전 1:19
믿음과 착한 良心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良心을 버렸고 그 믿음에 關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1. 들어가는 말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면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정죄하고 있고 사랑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진실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보시기에 선한 것인가
아니면 악한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공평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선으로 갚으시며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악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서 착각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을 흔히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시므로 자신의 모든 행위는 결코 잘못되지 않을 거야 하는 자부심과
잘못된 믿음으로 자신들의 행위는 정당하다고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것 때문에 자신의 모든 행위를 모든 행동을 의롭게 여기며 정당화시키며 그리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행위라고 여겨 자신의 양심마저도 저버리게 되는 경우를 서슴없이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왜 살펴보나요? 이것이 거울이 되어! 나의 신앙에 내 마음에 이러한 특징이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과연 믿는다고 하는 우리 자신들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특징은?
자기의 양심을 속입니다. -- 오늘 말씀
2. 본 론
가. 자기 양심을 속이는 특징이 있음
오늘은 다섯 번째 자기의 양심을 속이는 특성이 있음에 대하여 살펴보시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인즉 이방인들은 유대인이 가진 율법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은 말씀이 법이 되기에 저촉되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법이 법이 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에 살아야 대한민국에 법으로 저촉을받습니다.
외국인들은 법에 영향을 받지 않듯!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도 않고 내용도 모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을 하면 코웃음을 칩니다.
어린아이가 법을 몰라도 거짓말을 하면 눈치를 보고
몰래 잘못한 행위를 하고나면 숨으려고 합니다. 법과 상관이 없어도 혼자 숨으려고 합니다.
욕심이 생기면 뒤돌아서서 혼자 먹으려 합니다. 인생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을 때는 귀여워서 자랑스러워 칭찬을 합니다. 말 못할 때부터 이렇게 배웁니다. 양심이 거리낄 때 부모가 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했다고 하고 꾀를 내었다고 칭찬하면 인생의 본질 자체가 양심이 없는 본질입니다.
성경의 아담의 죄는 율법에 의한 죄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같이 죄를 짓지 않는 자들에게도 사망이 왕 노릇 한 것은 이방인들인데
어떻게 죄가 없는데 죽나요?
롬5:13을 보시면 아담과 죄를 짓지 않는 자들에게도 사망이 왕 노릇한 것입니다.
율법이 없이도 자기 자신이 양심이 율법이 되기에 양심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고로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율법이 된다면 이 세상의 일들이 공평하게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없는 그들이 잘못하면 그들에게도 죄책감이 일어납니다.
거짓하면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경우 양심의 가책을 받는 자기 자신의 양심이 율법의 구실을 하게 된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이방인과 같은 자들은 이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없이도
자신들의 양심이 스스로 자신들에게 율법이 된다는 것입니다.
롬 2:14-15
{律法 없는 異邦人이 本性으로 律法의 일을 行할 때는 이 사람은 律法이 없어도 自己가 自己에게 律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良心이 證據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或은 訟事하며 或은 辯明하여 그 마음에 새긴 律法의 行爲를 나타내느니라}
그러나 우리 인생들의 양심이 공평한 율법의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우리의 양심은 죄로 부패하여서 가다 말다가 하는 고장 난 시계와 같습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기능이 있어 선과 악을 논할 수 있는 기능이라 하겠지요?
사람에게서 선과 악을 논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한 말로 시시비비를 따질 때 무엇이라고 합니까?
“양심껏 말해.”하기도하며 “나는 양심을 두고 말한다.”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율법을 모르는 자라도 죄를 지으면 양심이 율법이 되어 고통이 일어나고
서로 송사하고 서로 변명하는 내적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그 양심이 깨끗하여야 선과 악을 옳게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양심을 무엇으로 선악을 분별할 수 있을 만큼 깨끗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공평하지 않습니다. 공평하지 않으면 불의한 재판장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오직 이 양심이 깨끗해 질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였으니
장성한 자는 선악을 분별하여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기에 선약을 알아야 하는데
1) 사람의 양심이 깨끗해 질 수 있는 방법
히 9:14
하물며 永遠하신 聖靈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自己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良心으로 죽은 行實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겠느뇨
인생의 양심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여집니다.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없이는
우리의 죽은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의 양심은 알게 모르게 화인을 맞아 이상이 생긴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었으나! 사람이 꾀를 낸 것입니다. (전7:29)
사람의 꾀로 인하여 양심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마치 양심이 있는듯하나 고장 난 시계와 같으니 (고장이 난 시계는 하루 2번은 저절로 맞는데)
이 고장 난 양심으로 어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가다가 말다가 하는 시계는 한 번도 맞지 않습니다. 양심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나는 양심이 없습니다. 하고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가능성 있는 자 아닐까요? 인생은 그래도 인생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성경은 왜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이유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그 판단으로 사형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이상이 생기면?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의 특징을 성경에서 보시면!
2) 만일 양심이 이상이 생기면
딤전4:1-2
그러나 聖靈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後日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迷惑케 하는 靈과 鬼神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自己 良心이 火印 맞아서 外飾함으로 거짓말하는 者들이라
*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쫓게 됩니다.
* 믿음을 떠나게 됩니다.
* 외식하게 됩니다.
* 거짓말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을 율법사 바리세인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상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우리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되기 전에는 귀신의 가르침으로 외식하게 되고 거짓말하게 되어 믿음에서 떠나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에게는 진실이 없습니다. 양심껏 이야기해도 거짓입니다.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양심은 사단의 지배 아래 있어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없게 되고
자기의 마음과 행동이 그릇됨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무디어져 버린 것입니다.
화인 맞은 부분은 감각이 없어지고 굳어져 딱딱하게 되었고
곧 완악하고 패역하여졌으며, 거칠어지고 고집스러워져서 남을 판단하게 되고 공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진노로 말미암아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들임을 지적하고 알리신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어떤 일들이 임하게 되었습니까?
딛 1:15
깨끗한 者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者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良心이 더러운지라
양심?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양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모든 마음먹는 것과 나의 모든 행동을 누군가가 보고 다 알고 있으니 거짓하지 말라고 타이르는 내부의 음성이 아닐까요?
양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신의 간섭이며 출현입니다. (신목사정의)
이러한 마음이 둔하여져서 없어지는 것이 양심이 상하는 일이요
양심이 화인 맞는 일입니다.
고전 8:12
이같이 너희가 兄弟에게 罪를 지어 그 弱한 良心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罪를 짓는 것이니라
양심이 더러운 자는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 양심에 화인을 맞으므로 감각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깨끗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들을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하여 더럽다고 생각이 들면 그렇다고 인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로 제사상에 올랐던 음식을 우상의 제물이라고 가르쳐 (조상을 귀신이라 합니다.)
그 식물을 폐하라하며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약한 인생들의 양심을 상하게 하여 오히려 그리스도께 죄를 범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식물은 하나님의 주시는 것으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으나 (딤전4:4)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더럽게 여겨져서 외식하게 되는 믿음이 된 것입니다.
주님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더럽게 하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마15:11-20)
그리스도의 피로 양심의 깨끗함을 받지 못한 고로 모든 것이 저들의 생각대로 더럽게 여긴 탓이 아닐까요?
이러한 더러운 양심을 가지고서는 자신의 악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의 내면의 참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뿐이 아니요 남을 판단하기에도 올바른 판단이 될 수가 없습니다.
히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良心의 惡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穩全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요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良心의 苛責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女子만 남았더라
행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使徒들에게 물어 가로되 兄弟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마음에 뿌림을 받으면 양심의 악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에 뿌림을 받는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이며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말씀으로 양심의 가책 곧 잘못을 깨닫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으면 두가지 양상 = 왜 쑤셔놔! 하면서 화를 내는 자와
어찌할꼬 하여 회개하는 자가 있습니다. )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때 자신의 아들을 보내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의 양심이라도 남을 판단하는 올바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들의 특징으로 스스로 양심의 화인을 맞은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령한 자는 남을 판단하나 자기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러하려면 하나님의 마음같이 공평한 저울 한결같은 추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뀐 자만이 온전한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착한 양심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거짓 없는 하나님의 양심으로 나오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도 밖에 없습니다.
선한 양심은 십자가의 도 밖에 없습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되 자기는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딤전 1:5-7
警戒의 目的은 淸潔한 마음과 善한 良心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律法의 先生이 되려 하나 自己의 말하는 것이나 自己의 確證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바울은 말씀의 경계의 목적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으로 나는 거짓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딤전 1:19
믿음과 착한 良心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良心을 버렸고 그 믿음에 關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3. 결 론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명령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양심을 닦아야 합니다.
착한 양심을 회복하지 못하면 믿음이 파선된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열심히 믿음의 생활을 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볼 수 있으나
양심을 깨끗이 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은 별로 본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양심이 깨끗하지 못한 채로 믿음에만 열중한다면 그 믿음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십자가에서만 양심이 회복됩니다. 낮아져야 합니다. 스스로 점검해 봅시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경계합니까? 믿음에 관하여서는 파선하였다고 합니다.
양심이 더러워지면 그 믿음은 파선되는 것입니다.
양심의 파선은 곧 영적 파멸을 말합니다.
어떤 종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오셨다고 하여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교리로부터의 자유를 그리고 심지어는 인간의 도덕 윤리적인 것마저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종 하는 자유를 누리려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자유가 아니며 자기들의 마음에 맞춰지는 복음이 아님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떠나서 믿음이 있노라 하는 자들의 공통점은 스스로의 평안이요, 스스로의 자유로움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이루도록 나타내시기 위하여
끝없이 간섭하고 끝없이 속박하여 종과 같이 낮아지게 하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시는 사랑이며 간섭입니다.
결코 우리 인생들의 마음대로 하도록 자유롭게 두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무거운 짐과 같은 것이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들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며 우리로 죄로부터의 진정한 자유와 사망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온전한 자유입니다. 방종이 아닙니다. 구속도 아니요, 억눌림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자유한 자는 죄에 메여 있고 / 죄에 자유한 자는 그리스도께 메여 있습니다.
롬 6:20
너희가 죄(罪)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義)에 대(對)하여 자유(自由)하였느니라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自由케 하려고 自由를 주셨으니
가. 진정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롬 1:17
복음(福音)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記錄)된 바 오직 의인(義人)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내 죄악이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깥이 깨끗게 하십니다. (사1장18)
하나님이 오셔서 내 안에 넘어진 양심, 화인맞은 양심을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슬린 나무, 타다 남은 나무, 쓸모없는 나무!
아궁이에 타다가 남은 조각! 같은 그을린 우리네 양심!
이런 양심을 하나님은 간섭하셔서 닦아서 맑은 것 한 조각이라도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더럽기에 예수께서 우리위해 피 흘리신 것입니다.
진정 우리 주님을 생각한다면 우리 더러워진 양심을 씻어야 합니다.
유다의 죄악을 제하기 위해 가마솥, 맨 솥을 달굽니다.
솥이 녹이 슬대로 다 슬어서 다른 것으로는 깨끗게 할수 없기에 불에 달구어 정하게 하십니다.
가마솥에 붙은 녹덩이처럼 죄인된 몸인데도 잘 살고 있음은 하나님의 오래참는 인자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언제까지 우리를 살려 주실까요?
하나님이 이제 그만이다 하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 감사한 것입니다.
이보다 귀한 시간 이보다 귀한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나를 생각할 때 좀 더 낫고 좀 더 높은 것 같지만 십자가를 보시면 인생의 마음이 악함에서
건지시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이제라도 주께서 돌아보시고 이제라도 주께서 인정하시는 신앙을 해야 될 것입니다.
요엘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돌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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