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박봉애( 朴奉愛) - 세상 것 돌아보지 않고 2. 민족 해방과 여성해방
1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이 왔을 때 그 벅찬 감정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으랴! 나는 얼마 동안을 고심했다. 이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보다 보람 있는 일이 될 것인가고. 나는 길을 정한 후 교직을 그만두고 사회에 뛰어들어 부인회 활동을 시작했다. 2 무질서가 질서를 대신하는 해방 후의 한반도는 혼돈,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박순천 선생, 황신덕 선생들과 같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여성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특히 남로당 계열인 여성동맹과 싸울 때는 수차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하늘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나를 희생시키지 않았다.
3 사상과 주의가 난립하고 테러와 질시 반목이 날로 성해져 가는 한국사회! 나는 가만히 앉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정계에 발을 딛기로 결정한 것이다. 1948년 4월, 대한민국의 제헌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의 열기가 전국에 번지고 있을 때 나는 대한 부인회 총무로서 경기도 양주군에서 국회 의원에 입후보했다.
4 타고난 특유의 회화술로 촌촌 마을 마을을 누비며 정치연설을 하였다. 그러나 대변자의 자격이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봉건적 사고방식이 엄존하는 당시 주민의 인색한 선택 때문인지 모르나 아무튼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5 1950년 공산주의자들의 남침에 의한 6.25가 터졌다. 동족상쟁의 처참한 전연(戰煙)이 3천리 강토를 뒤덮었다. 우이동(牛耳洞)에 살고 있던 나는 이리저리 숨어 다니며 피난처를 찾았다. 여성운동과 반공 계몽운동에 앞장 섰던 나는 미처 피난 갈 기회도 놓쳐버린 채 아는 집 문을 두드렸다.
6 그러나 자기 아들을 마루 밑에 숨겨두고 남편을 친정에 감추어 둔 형편에 누가 내 숨을 곳을 제공해 주겠는가, 동생 집으로 친지 집으로 숨어 다녔으나 마땅치 않아 잠깐 집에 들러 간다는 것이 그만 발각이 되어 인민군에게 잡혀 창동지서를 거쳐 의정부까지 30리 길을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7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끌려간 의정부 국민학교 운동장에는 4천 8백 명이나 되는 남자들이 붙잡혀 와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나 혼자뿐이다. 모든 것을 체념한 나는 담담한 마음으로 하늘 앞에 기도하며 운명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8 남자들의 취조가 끝난 후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왔다. 평양 사투리를 쓰는 스무 살이 약간 넘어 보이는 인민군 상위 계급장을 단 예쁘장한 장교 앞에 끌려갔다. “아주머니가 박봉애씨요?” 그는 나에게 동무라 부르지 않고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것이다.
9 다른 인민군과는 달리 친밀감 느끼게 한 그는 내 조서를 다 읽은 후에 왜 국회의원에 입후보했느냐고 묻는 것이다. “여성의 법적 권리를 찾기 위해 국회에 들어가 싸우려 했소” 하고 대답했더니 “돈은 얼마나 썼느냐”라고 다시 묻는다. “30만 환 썼다”라고 했더니 “3백만 환 써야 할 것을 30만 환 썼으니 안 된 거요. 조금 후 8·15 남북 총선거를 할 때 나가면 문제없이 당선될 것이오” 하고 말을 받는다.
10 “그것 모르고 한 번 할 것이지 알고 두 번 할 것은 못된다”라고 웃으며 말했더니 “우리 인민공화국에서는 아주머니 같은 사람은 문제없이 당선된다”라고 하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죽음에서 벗어난 그날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11 그때 붙잡힌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학살 당하고 또 납북되어 갔기 때문에 나는 이날을 두 번째 태어난 날이라고 이름 지어 회상해 보곤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인민군 장교는 기독교 가정에서 할 수 없이 끌려 나온 기독신자였으리라고 생각한다.
12 그렇지 않고야, 어찌 그들의 반동분자를 살려 주었겠는가. 하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보다, 인간의 뜻은 하늘의 뜻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느껴 보았다. 13 집으로 돌아온 나는 삼선교에 있는 친척 집으로 피난처를 옮겨 성명을 갈고 무식한 사람이요, 병자인 양 행세하면서 숨어 살았다. 삼베 치마 하나로 3개월을 살다가 그해 12월에 피난민 속에 끼어 인천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때 같이 간 분이 김순화 부녀국장과 김주화 씨이다. 순식간에 변해 버린 세태(世態), 인생의 허무를 마음껏 체휼했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