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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가족과 몸은 비현실 하나님은 현실>의 줄거리: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무턱대고 나서기 전에 끝까지 따를 수 있을지를 반드시 먼저 따져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좀 의아합니다. 예수 따름에 뭐 그렇게까지 심각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 가족과 내 몸은 비현실이 되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은 현실이 되시는 뒤바뀜을 각오하지 않으면 못 가는 길이기 때문이랍니다.
가족과 몸은 비현실 하나님은 현실
(누가복음 14장 25절~32절)
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가족과 몸은 비현실 하나님은 현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가족과 몸은 비현실 하나님은 현실’
앞서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초청을 받으시고 식사 자리에서 많은 말씀을 해주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에서는 식사를 마치시고 나오신 예수님을 수많은 무리가 따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망대를 세우는 비유와 전쟁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망대를 세울 때는 공사비용이 충분한가부터 확인하기 마련입니다. 무턱대고 시작했다가 공사비용이 부족해서 중단된다면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도 싸워 이길 수 있는 길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적이 이만 명인데 아군은 일만 명밖에 없다면 싸워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화친을 청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입니다. 무턱대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싸우다가 다 죽는다면 더 큰 낭패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에도 이러한 확인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끝까지 따를 수 있는 자들이라고 여기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따름의 의미에 대해 비유를 통해 묻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자발적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관심을 떨쳐내시고자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목회현장에 비교하자면 예수님께 모였던 무리들은 새신자입니다. 목회현장에서는 새신자를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는지 모릅니다. 행여나 낯선 예배모습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을까봐 수준에 맞춰 교재를 준비하고, 일상생활과 교회생활이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많은 애를 씁니다. 그런데 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새신자와 같은 사람들을 향해 다짜고짜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십자가형을 받은 죄인이 오징어처럼 말라 죽어가는 것을 실제로 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차라리 예수님께서 아무리 힘들어도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고 말씀하셨다면 무리는 환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새신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져야 한다며 겁을 줘서 떨쳐내시려는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마음 또한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태로는 당신을 따름에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망대를 세우려다 도중에 중단하고 이기지도 못할 전쟁을 시작하여 망해버리는 것처럼 무리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마음가짐으로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상태를 보셨기에 이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없다고 느끼셨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겁을 주셔서 떨쳐내시고자 하신 것일까요? 이들에게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무엇을 현실로 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에게 현실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으로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 없으니 포기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으면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이 현실이 아니게 된다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잘 따져보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에 혹해서 무턱대고 믿어봤자 천국에는 갈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 소중히 여기던 가족부터 비현실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실현가능성이 없는 일들을 비현실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비현실적인 대상들에게는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기대도 하지 않고 관계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엄연한 현실로 느껴지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도 비현실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래도 예수를 믿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던 무리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닌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따져보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던 수십 년 세월이 어떠했는지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수십 년을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면서도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이 비현실로 느껴진 적이 없다면 여전히 예수를 믿은 것은 아닙니다.
본문 26절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미워해야 한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가족은 물론이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몸이 없으면 관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목숨은 곧 몸으로 관계하는 모든 대상들을 포함합니다.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도 몸으로 관계하는 대상이기에 결국 목숨에 포함이 됩니다만 이를 강조하시기 위해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 즉 ‘그 정도가 아니라 몸으로 관계하는 모든 것을 미워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편 미워함에는 무조건적으로 싫어하는 혐오가 있고 마음에 담은 대상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애증이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애증관계입니다. 마음에 담은 대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면 좋은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좋아서 마음에 담았지만 결과적으로 괴롭고 힘든 것이 애증관계입니다. 본문에서 미워하라 언급하신 대상은 바로 이러한 애증관계에 놓여있는 대상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마음에 좋아하고 사랑해서 들여놓은 대상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면 잘됐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 쫓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남편의 마음에는 아내가 들어와 있을 수 있고, 아내의 마음에는 남편이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에는 자녀가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미워한다는 것은 이렇게 마음에 들어온 대상들이 배우자든 자녀든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워함은 달리 말하면 없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미워한다는 것은 내 마음에서 배우자라는 존재가 담겨있는 것이 싫었는데 없어지게 되었을 때 기뻐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미워한다는 것은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를 보고 자녀가 내 마음에서 완전히 사라져서 죽은 것처럼 되면 좋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녀가 죽어도 평생토록 부모 마음에 담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자녀를 미워한다는 것은 결국 자녀가 살아있음에도 마음에서 없어지는 상태를 좋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배우자나 자녀뿐만 아니라 몸으로 관계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니 벌써 마음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잘 따져보고 따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기에 이렇게 사는 것이 싫게 느껴진다면 예수를 따라서는 안 됩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께서도 이것을 진즉에 따져보실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새신자들에게도 이것은 제시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전할 때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 당신이 마음에 담고 있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는 물론이고 몸으로 관계하는 돈이나 승진을 비롯한 모든 일들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마음에서 사라지는 것을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결심이 전제될 수 없다면 믿음은 시작될 수 없으며 믿는다고 말을 할지라도 가짜 믿음입니다. 실제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믿음의 진보나 영적인 발전이 없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짚고 넘어간 적이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별세를 목표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중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별세는 말씀드린 대로 탈출을 뜻하는 엑소더스(ἔξοδος)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탈출을 통해서 가시고자 한 목표지점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보좌 우편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마음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공생애 때의 제자들과 같이 몸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몸은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에 의하여 도구로 사용되고 예수님의 장갑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이르게 되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는 몸으로 관계할 수 있는 대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좌 우편에는 부모도 없고 배우자도 없고 자녀도 없고 돈 문제나 승진 문제도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에 이러한 대상들을 담고 있는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따라 보좌 우편을 향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고자 그것들을 마음에서 버릴 수 있겠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면 우리도 마땅히 이것을 알려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정작 말씀을 전한다는 사람들조차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못합니다. 마음이 세상에 남은 채로 부모를 담고 있고 배우자를 담고 있고 자녀를 담고 있고 몸으로 관계하는 것들 중에 좋다고 여겨지는 대상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예수도 믿으면서 전도를 하고 설교도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으니 새신자들에게 예수 따름의 진정한 의미를 물을 수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무턱대고 믿겠다고 달려들었으니 믿음이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믿음의 진보는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예수 따름은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도달하는 마지막 지점에는 부모도 없고 처자도 없고 형제나 자매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려주어야만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채로 살 수 있겠느냐고 물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미워함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미워하게 된 대상들은 현실에서 비현실로 변하게 됩니다. 마음으로 배우자를 미워하는 것은 배우자를 비현실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로 여겨지는 일들만을 마음에 담고 살아갑니다. 비현실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현실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먼저 사실이어야 합니다. 다만 존재하는 모든 사실이 나의 현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사실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과 결합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나의 마음에 닿고 나의 마음에 들여놓는 사실들이 나의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현실로 여겨지는 대상들을 신경 쓰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시는 미워함은 신경 쓰이는 대상들과의 애증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접촉을 끊어버리고 아예 없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현실로 삼고 살아가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자 한다면 배우자를 미워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마음을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는 곧 마음이 하나님과 접촉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우자를 현실로 여긴다는 것은 곧 마음이 배우자와 접촉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배우자의 기운에 물든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의 접촉은 불가능합니다. 예수 따름은 하나님과의 접촉을 위한 것이기에 하나님과 접촉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는 예수 따름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접촉이 가능한 상태가 될 수 있을 때에 예수 따름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알고 이제 배우자가 내 마음 안에서 없어지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배우자는 사실로 존재하지만 더 이상 현실이 아닌 비현실로 느껴지게 됩니다.
부모나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현실로 느껴지던 대상들이 비현실로 느껴지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미워함입니다.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에서 내놓은 대상들은 비현실이 됩니다.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세상 모든 대상과 마음의 접촉을 끊는 것이 미워함입니다. 마음과 떨어뜨리고 없어지게 할 때 현실로 느껴지던 세상의 일들은 비현실로 느껴지게 됩니다. 심지어는 내 몸까지도 예외가 없습니다. 마음의 접촉이 끊어질 때 몸과 몸으로 관계하는 모든 일들이 비현실이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세상을 비현실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과 접촉하여 그 기운에 물들고 오염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의 접촉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교리를 통해 배웠고 이론적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는 것은 이론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현실로 느낄 수 없는 이유는 나의 마음이 하나님과 닿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닿을 수 있다면 현실로 느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실의 차원에서 벗어나서 현실로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우자나 자녀나 나의 몸을 비롯한 세상의 대상들을 현실로 느끼는 동안에는 하나님은 사실일 뿐이지 나와 관계된 현실이 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실감은 내 마음 안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셨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어디까지나 이론과 교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느끼고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세상을 탈출하여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내 마음을 하늘로 끌어가고자 하십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과 접촉하고 하나님을 현실로 느낄 수 있는 길이 되시고자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27절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서 비현실로 만들 수 있는 길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자기 십자가 지기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외의 대상과 접촉하고 있는 마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배우자와 자녀와 몸에 접촉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배우자를 현실로 느끼는 나, 자녀를 현실로 느끼는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떠올리면서 십자가 죽음의 이유를 나에게서 찾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만들어 가면서 마음에서 현실로 느끼던 세상의 모든 대상들을 비현실로 만들어 갈 때 하나님만이 현실로 느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현실로 느낀다고 해서 배우자나 자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와의 관계는 여전히 사실로써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상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관계할 수 있을까요? 비현실이 된 대상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품고 계신 뜻이 전달되게 됩니다. 나의 현실이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배우자와 자녀와 관계해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배우자를 현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배우자를 현실로 삼고 계십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현실이신 배우자와 관계하게 하십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현실이신 자녀와 관계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순간에도 내가 현실로 삼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어야 합니다. 배우자가 나에게 친절하든 자녀가 나에게 고마워하든 나에게는 비현실임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배우자나 자녀의 반응이 좋아서 다시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십자가 바라봄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나는 배우자에 대해 죽은 자다. 나는 자녀에 대해 죽은 자다.”라고 되새기며 배우자도 자녀도 비현실로 미루어두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을 쓰지 않는 비현실적인 사실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생각을 가지고 계시고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현실이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관계를 이룰 때에 진정한 부부관계는 이루어지고 진정한 부모자녀관계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진짜 방식입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따져보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현실이 되실 때까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내 마음에 그동안 현실로 느껴지던 대상들을 비현실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로 여기던 대상들이 비현실로 바뀌게 될 때 신경 쓸 일도 없고 관심 둘 일도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될 것을 알고도 예수를 믿을 것인지 물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자기 십자가를 질 때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만이 나의 현실이 되십니다. 오직 내가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쓸 대상은 하늘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참여한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만 관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내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 전체가 마음과 접촉이 불가능한 비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프랑스 파리는 엄연한 사실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살면서 프랑스와는 연고가 없는 나에게 파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현실로 작용하지 못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아무런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세상과 나의 관계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파리의 자리에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와 내 몸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몸으로 만나는 소중한 대상들을 그렇게 여기겠다는 각오를 하고 십자가 생활화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나에게 아내는 프랑스 파리입니다. 내 남편도 프랑스 파리입니다. 자녀도 프랑스 파리입니다. 사업도 프랑스 파리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자신이 있어야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자녀가 가있거나 해서 도무지 그러한 생각이 들지 않으시는 분이라면 아무런 연고가 없는 다른 지역을 생각해보시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부터 비현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유일한 현실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며 관계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믿음의 의미임을 알고 오늘 비유의 말씀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망대를 세우는 자가 예산을 따지고 전쟁하는 자가 군인의 숫자를 따져보듯이 예수 믿기는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통하여 부모님과 배우자와 자녀와 나의 몸까지도 프랑스 파리로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에게는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나의 현실이 되게 해주시고,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는 나의 현실이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관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