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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기지 않는 영생
본문<요10:26~39>
요즘 뜨는 드라마가 뭔지 아세요? 요즘 핫한 드라마가 네플릭스에서 방영된 ‘폭싹 속았쑤다’랍니다. 얼마 전에 종영 되었는데, 한국 최고의 드라마 혹은 최고의 인생 드라마라는 타이틀이 붙을 정도로 평들이 좋아서 저도 보고 있습니다. 제목 ‘폭싹~속았쑤다’는 제주도 방언인데 뜻은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이랍니다.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가난 속에서 철없는 자녀들을 키워내는 부모의 희생적 사랑을 그려내는 드라마이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진짜 이유는 이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남자 주인공(박보검)의 순애보적 사랑이라는 겁니다.
10살 때부터 이웃집 한 살 어린 애순이(아이유)를 풋사랑하기 시작해서 한 번도 한눈팔지 않고 그저 늙어 줄을 때까지 한 여인을 묵묵하게 죽도록 사랑한 그 스토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볼 수 있지요. 애순이는 그 남자를 무쇠라고 애칭 합니다. 무쇠 반대말이 냄비지요..결혼만 하면 변심해서 금방 딴 여자 처다 보는 남자들의 지조 없는 냄비 속성이 아닌 무쇠사랑.. 얼마나 멋집니까? 오직 애순이만 향한 변치않는 사랑에 대한 순정적인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지요.
그에 비하면 애순이는 이기적이고 철딱서니 없는 여자입니다. 항상 투정이고 불만이고 제멋대로인데, 그런 애순이를 전혀 탓하지 않고 결점마저도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 어찌 여인네들이 빠져들지를 않겠습니까? 이상형이죠, 비록 돈은 없지만 나만 죽도록 사랑하는 남자, 백마탄 왕자님? 그런 남자는 세상에 없거든요. 소설과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사람일 뿐이지요. 그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어떤 상황에서도 ‘only You~’를 외치는 남자의 순애보가 이 드라마의 백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순정적인 남자의 사랑을 작가가 성경에서 카피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사랑이 성경의 주제 아닌가요?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ㅎ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음을 통과한 십자가 사랑 말이에요..
롬5:8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ㅎ님의 자기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죄인을 위해 죽는 그런 사랑 있나요? 혹시 착하고 훌륭한 사람을 위해서, 혹은 나라를 위해서, 혹은 정의를 위해서 죽는 자는 있어도 죄인을 위해 죽는 이는 없지요. 그것도 창조주 ㅎ님이 피조물이며 죄 밖에 나오지 않는 그런 무가치하고 파렴치한을 위해 죽으시다니요..얼마큼 사랑했다구요? 자기 목숨을 대신 내어주기까지 사랑했다구요..
게다가 주님의 그 사랑은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사랑입니다. 요13:1절을 보면, ‘주께서 죽으실 때가 가까이 온 줄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래서 베드로처럼 주님을 3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어도,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 때 다 도망쳤어도 부활하신 후에 끝까지 쫓아가 그들을 만나서 용서하시고 안아주시잖아요? 어떤 실패와 어떤 죄를 범해도 다 십자가용서 안에서 품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이것을 아주 잘 표현한 성경이 ‘아가서’입니다. 솔로몬이 무수리 같은 여인 슬람미를 사랑한 러브 스토리가 아가서이지요. 아가서란 ‘노래 중의 노래’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노래가 많지만 그리스도가 성도를 사랑한 이야기가 가장 고귀한 ‘최고의 노래’(아가)라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누구 입니까? 당대 최고의 권세와 부와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린 절대군주 아닙니까? 그 주변 나라들이 그에게 복종하는 의사 표시로 자기 딸들을 정략결혼을 시켰는데, 무려 천명의 여인을 첩으로 둔 자였습니다. 그 여인들이 얼마나 스펙이 뛰어 났겠어요? 절세미색은 기본이고 학문에 교양까지 두루 갖춘 여인들이겠지요. 그런데 솔로몬은 오직 한 여인 슬람미 여인에게만 마음이 갔습니다.
어떤 외적인 조건이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얼굴이 거무스름하고 모습은 게달의 장막같이 거칠고 까칠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야말로 타고난 촌뜨기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 여인이 그리도 좋다고 고백합니다. ‘당신은 어여쁘고 어여쁘다, 흠이 전혀 없다. 오, 나의 신부여 나의 누이여..’ 아가서 전체에 이같은 사랑의 고백이 넘쳐 납니다.
그런데 슬람미는 아까 애순이처럼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여자입니다. 자기가 불편하면 언제든지 토라지고 냉담해지고 차갑게 변심하는 여자이지요. 한 번은 밤늦게 솔로몬이 밤이슬을 맞아가며 찾아왔는데, 슬람미가 문전 박대를 해서 쫓아 버렸어요. 자기는 이미 발도 씻고 침대에 누워 쉬려는데, 에이 귀찮아라..하면서 문을 안열어 주니까 할 수 없이 뒤돌아 갔지요.
그럼에도 솔로몬은 아무런 섭섭함도 없어요. 여전히 슬람미를 향해서는 ‘나의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예루살렘 같구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구나’라고 하며 사랑의 찬사를 쏟아 냅니다. 이것이 성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신앙은 이같은 ㅎ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나 같은 무지랭이를 사랑하시다니요. 세상에 세상에 ㅎ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감사 합니다-하며 ㅎ님의 사랑을 영접하는 게 신앙이라니까요.
주님은 우리를 흠이 없고 완전한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못 믿습니다. ㅎ님은 나를 흠이 없다고 하는데, 완전하다고 하시는데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인간 내가 뭔가를 실천해서 ㅎ님의 눈에 들어야 ㅎ님이 나를 사랑하실 거라는 생각을 버리지를 못해요. 문제는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알지를 못해서 그럽니다. 이게 인과율로 조성된 세상 영이고 마귀의 영입니다. 내가 어떤 공을 세워야 ㅎ님이 인정하실 거라는 선입관을 갖고 ㅎ님을 대합니다. ㅎ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게 죄이고 악입니다.
ㅎ님의 사랑은 아까 롬5장에서도 확인했지만, 요일4:9절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ㅎ님의 사람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우리 죄를 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아들 예수를 죽이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애당초 죄인을 위하여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우리가 죄 가운데서 넘어질지라도 그 사랑을 취소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한없이 무능하고 연약한 존재인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거듭났어도 여전히 죄인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변한 게 하나도 없어요. 구원받았다고 개과천선 게 아닙니다. 슬람미 여인처럼 내세울 게 하나도 없지만 왕의 조건없는 사랑을 받아 왕의 신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자가 왕에게 잘 보이려고 무언가를 꾸미고 가꾼다면 그게 왕의 순전한 사랑을 모독하는 꼴이 되는 겁니다. ㅎ님의 사랑에 걸맞는 사람이 되겠다고 종교적 행함을 찾아 열심을 내는 게 신앙이 아니라 불신앙이 되는 겁니다. 기도해야 하는데, 성경 읽어야 하는데, 전도, 선교, 충성봉사, 헌금 등이 있어야 ㅎ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숙제로 신자들을 몰아간다면 이게 ㅎ님의 사랑을 깎아 내리는 짓이라니까요.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하는 거랑 ㅎ님께 점수 따고 인정받고자 하는 것과는 딴 판입니다.
성경에서 ㅎ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 내가 완전하니 너도 완전하라..’라는 말은 명령이 아니라, 너는 이미 나의 거룩에 참여했고 나의 완전함에 참여했으니 이것을 확인하고 살라는 은혜의 말씀이지 숙제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주시는 완전하고도 영원한 용서의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달리 해야 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누리고 살면 되는 겁니다.
<엡1:3~7> ‘3절~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ㅎ님의 아들이 됨/by IX십자가 피로)
‘4절~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심(십자가의 용서의 세계 안=IX안)
‘6,7절~구원의 목적(창조의 목적)=은혜의 영광을 찬양(이것이 ㅎ님이 바라시는 것)
요14:1절에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다 되면 너희를 영접하여 나와 함께 있게 하리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19절에 가면,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 하십니다. 결국 처소를 예비한다는 말은 부활 승천하여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말씀이고, 그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가 한몸, 한영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즉 한 처소에서 연합된 자로 한 운명체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노력으로 ㅎ님과 한영이 된 게 아니라 ㅎ님의 택하심의 사랑과 IX의 십자가 은혜로 ㅎ님과 한 처소에서 거하는 자가 된 겁니다. 통상 친한 관계를 ‘케미’라고 부르지요? 케미란 영어 케미컬의 약자입니다. 물리적 결합이 아니라 화학적(케미컬) 결합이라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의미입니다.
영원전부터 ㅎ님과 주님의 관계가 그러했는데, 지금은 우리까지 포함하여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가 한 운명체가 된 것입니다. 케미가 되었다니까요. 그런데 거기에 무엇이 부족하다고 여겨서 우리의 행함을 보탠다고 나댄다면 그게 불신앙이지요. 이 사랑이 아가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아3:1~5> 읽고..
‘1절~밤에 침상에서~이게 중요한 단서를 주는 용어입니다. 밤이란 어둠이고 육신의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영의 생각을 대적하고 ㅎ님과 원수가 되며 ㅎ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정신사고입니다. 무엇일까요? 인간 자기가 무엇인가를 행해야 ㅎ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이건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주의 신앙을 말합니다. 이게 빛 되시는 ㅎ님을 모르는 어둠이라는 것이지요.
지금 슬람미는 어디에 있다구요? 왕의 침상에 있어요. 즉 솔로몬의 사랑 안에 있는데, 왕이 지금 눈에 안보인다고 갑자기 불안함이 몰려와서 두려워합니다. 왕이 어디갔지? 나를 떠났나? 나를 미워하나? 그럼 내가 왕을 위해 화장을 고치고 좀 더 좋은 옷을 입을까? 이런 치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지금 왕의 침상에 있다는 것은 왕과 한 처소에 머무는 놀라운 신분인데 이것을 모르고 자꾸 육신적인 행함을 보태서 왕의 사랑을 받으려는 생각이 곧 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밤에 일어나 성안을 헤메다가 순찰자들을 만나 묻습니다. 왕을 보았느냐구요. 그런데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왕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성을 순찰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철저한 율법 행함이 있어야 왕을 만날 수 있다는 사고체계를 가진 자들입니다. 이들은 용서와 긍휼을 조건 없이 베푸는 왕의 사랑을 전혀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떠나보내자 왕을 만났다는 말은, 왕은 사람의 율법적 행함이 바탕이 되어 만나는 분이 아님을 새삼 발견했다는 말이고, 그걸 깨닫자 왕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육신의 행함으로는 ㅎ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말씀을 지켜내고 윤리 도덕적으로 반듯한 삶을 살아야 ㅎ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는다는 육신의 생각은 십자가 사랑을 모르는 밤에 속한 자들이고, 이들을 밤에 성을 순찰하는 자들로 비유한 것입니다. 밤에는 쉬어야 하는데, 안식과 평강이 없이 쉬지 못하고 순찰을 돈다는 것은 육신의 열매를 맺기 위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종교적 행함을 말합니다.
그들을 떠나 왕을 만나서 어미의 집으로 갔습니다. 어미의 집이란 시51편에 나오는 비유로서 자신의 출생의 근본을 돌이켜 본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모두 어미의 태로부터 죄악 가운데 태어나는 자들입니다. 모태로부터 죄 가운데 태어나는 자들이 ㅎ님을 기쁘시게 할 무슨 행함을 할 수 있느냐는 반문입니다. 슬람미처럼 성도는 오직 십자가로 베푸시는 용서의 세계에서 ㅎ님과 화목한 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 은혜를 알면 감사와 찬송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러한 ㅎ님의 사랑과 IX의 십자가 피로 주어지는 영생인 사랑에 대한 말입니다. ㅎ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영생인데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나의 죄와 허물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취소가 불가능합니다. 또한 사단이 조성한 어떤 상황이나 공격으로도 불가능 합니다. ㅎ님이 주시는 영생은 영원하고 견고할 뿐입니다.
<요10:28~29>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미 ㅎ님과 아들과 한 처소에서 거하는 케미 관계이기 때문에 분리가 안됩니다. 죄란 ㅎ님과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먹고 에덴에서 쫓겨남이 죄의 결과). 다시 십자가 피로 에덴에서 같이 사는 자가 된 자들이 성도들입니다.(아3장1절: 왕의 침상에 있음)
(롬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악한)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은 ㅎ님은 아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자기의 뜻이 있으나 자기 뜻을 완전히 접고 오직 ㅎ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셨습니다. 이게 아들 예수님의 위대함입니다. 우리와 성정을 가진 육신을 입었으나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지 않고 오직 영을 따라 의의 삶을 살아내셨습니다. 그래서 요5장을 보면 ㅎ님이 예수님께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증거 합니다. 죄를 이긴 분이시기에 죄인을 심판하실 수 있는 정당성이 확보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계20장의 백보좌 심판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요10:31~33> 읽고..
여러 가지 선한 일이란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것을 각종 병자들을 고치는 것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병의 원인은 죄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병을 고쳤다는 것은 죄인을 용서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대표적으로 중풍병자를 고칠 때 곁들어서 ‘네 죄가 사해졌노라’라고 말하심으로 병고침의 실제 내역을 밝히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모르고 오늘날 단순히 육신의 병을 고친다고 나대는 목사들이 즐비한 것은 모두 성경을 모르는 무식한 일들이지요. 더불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축사 운동이나 장풍 운동 등은 거짓 영에 속는 일들입니다. 김기동 목사나 이초석 목사 같은 이는 감기가 들려도 귀신이 붙은 거니까 쫓아내야 한다고 야단법석을 떱니다. 그런 자들 앞에서 머리 조아리며 복채를 내미는 자들이 누구겠습니까? 주님의 양들이 아니기에 가라지는 가라지끼리 묶이는 겁니다. 심판 날에 단으로 묶여서 한꺼번에 불못에 들어갈 것입니다.
33절을 보면 선한 일로 인해 돌로 치려는 게 아니라 참람함을 인하여 죽이려 한다고 합니다. 아니 얼마 전에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고쳤는데, 바리새인들이 왜 시비를 했습니까? 안식일을 안 지켰기에 트집을 잡았고, 마침내는 소경에서 눈떠진 자를 출교까지 시켰습니다. 그만큼 선한 일을 선하게 보지 못하고 율법을 어겼다는 일로 주님도 죄인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는 말은 갑자기 거짓말로 바뀌어서 행한 일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동안 문제 삼았던 안식일 어긴 것은 아무 것도 아닐 정도로 더 치명적이고 심각한 죄를 발견한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ㅎ님과 하나라고 했으니 이거야 말로 절대로 피해갈 수 없는 사형감입니다. 유대인들은 ㅎ님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지를 못했어요. 심지어는 서기관들이 성경을 필사하다가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여호와라고 안 쓰고 ‘주님(아도나이)’이라고 썼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ㅎ님에 대해서 경외심이 대단했는데 알고보면 이런 사상은 두려워하는 종의 영에 불과 합니다. ㅎ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주종관계의 영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고 하니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는 미친놈이지요. 미치지 않고서여 어찌 사람이 ㅎ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더 나아가 ㅎ님과 자신이 하나라고 하겠습니까? 대놓고 ㅎ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이것은 절대로 용납도 용서도 안됩니다. 당장 군사를 불러 체포해야 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다음처럼 말씀을 합니다.
<요10:34~36> 34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주님이 대답하신 35절의 ‘ㅎ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ㅎ님)이라 하셨다’는 말씀은
시82:6절에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시82:!~8> 읽고,
1절을 보면 재판관들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6절에서 언급하는 '너희'는 단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재판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재판장을 두고 신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재판장은 백성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억울한 자가 없도록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때 재판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해야 헸습니다.
이처럼 비록 재판은 사람이 하지만, 자기의 생각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였기 때문에, 결국 판단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ㅎ님이 하시는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재판장을 신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재판장이라는 사람 자체가 신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이 신적인 일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신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판장이 하는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보여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판장이 사사로이 자기 유익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준으로 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재판장이라는 것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라는 말을 합니다. 악인의 낯을 본다는 것은 재판을 할 때 악인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엉터리 재판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로 인해서 돈없고 힘없는 약자들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82편의 마지막 구절은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판단하소서 모든 열방이 주의 기업이 되겠음이니이다"로 끝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지존자의 아들의 역할을 하고 신의 역할을 하라고 세운 재판장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익을 따라서 뇌물을 받으며 잘못된 판단을 하는 이 세상에 이제 ㅎ님이 일어나서 판단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삽의 말대로 세상을 판단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시고 말씀만을 기준으로 해서 세상을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진정한 지존자의 아들임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ㅎ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다는 예언은 구약 성경 곳곳에 계시되었습니다. 가령 창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이 장차 뱀의 후손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다(원시 복음). 이 언약이 사7장에 가면 보다 더 선명하게 말씀합니다(계시의 점층적 기법: 계시가 점점 더 드러남).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의미입니다. 눈에 안보이는 ㅎ님이 우리 곁에 함께 계신다는 성육신 약속이 아닙니까?
사9장에 가면 더 확실해 집니다. ‘한 아기가 탄생하는데, 그 이름이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ㅎ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하심)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탄생하신 예수님이 ㅎ님을 품고 오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아바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씀하신 거지요.
그리고 사53장에서는 모든 구원의 비밀을 담아 놓았습니다.
<사53:1, 4~6, 10>
‘1절~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ㅎ님의 구원의 팔이 곧 IX이시다는 말)
‘4,5,6절~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대속의 경륜/ 다 이루었도다)
‘10절~장차 IX의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이 곧 ㅎ님의 영원하신 뜻
이처럼 구약에서부터 ㅎ님의 구원은 ㅎ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이루시고 그 의를 자기백성에게 전가해서 주어지게 된다는 것을 곳곳에 계시해 놓았지만, 율법에 눈이 먼 자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고 자기 열심과 정성으로 구원을 쟁취하려고 동분서주하니 은혜로 구원하시는 ㅎ님의 뜻을 박차고 만 것입니다.
ㅎ님은 인간의 행함을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 가운데 태어난 자들이기에 어떤 일도 ㅎ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예 인간의 의에 대해 기대 자체를 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이 슬람미 여인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한 것처럼, 죄인들을 조건 없이 부르시고 십자가 피로 의롭다 하시고 ㅎ님의 자녀라는 영화로운 구원을 주시는 겁니다.
성도는 이미 은혜로 받은 구원이라는 영생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ㅎ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ㅎ님이 변치 아니하시듯이 이 사랑 역시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주었으니 걸 맞는 삶을 보이라는 과제도 없습니다. 그 과제도 할 수 없음을 잘 아시기에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걸 맞는 삶을 살겠다고 팔 걷어 부치고 나서는 그 자체가 ㅎ님의 사랑을 모르는 일이고 오히려 훼손시키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ㅎ님이 바라시는 오직 하나는, 받은 그 은혜와 사랑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단은 성도로 하여금 율법에 매이고 행위에 열심을 내도록 미혹하여 ㅎ님의 은혜를 삭감시키려고 부추깁니다. 이것과 싸우는 것이 선한 싸움입니다. 따라서 나를 부인하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 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구원 받지 못할 자가 ㅎ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영생의 존재가 되게 하신 ㅎ님의 아름다운 덕을 전하며 사는 일, 그게 성도의 본문입니다.
...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
첫댓글 저 정회원으로 올려주세요. 나이가 들어서
어디다 올리는지도 모르고~~
말씀이 성경내용과 같아서 안심하고 공부하고 싶어요
정회원으로 되셨습니다.
감사 합니다
열심히 예수그리스도를 알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