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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 롬 15:1-13
어느 공장에서 서로 밀고 당기며 노사간에 협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노조측은 20%의 임금인상을 요구했습니다. 회사측은 경영사정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맞섰습니다. 노조측도 양보할 수가 없어 결국 교섭과 조정이 결렬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양측이 회의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 갑자기 폭우와 함께 천둥과 번개가 치기 시작했습니다. 양측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침묵이 흐르는 사이 공장 회의실의 지붕 틈에서 빗물이 쏟아져 흘렀습니다. 사장의 머리와 옷에도 빗물이 쏟아졌습니다. 그걸 바라본 노조 위원장이 얼른 일어나 자신의 웃옷을 벗어 사장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들 때문에 이런 봉변까지 당하시게 돼서” “아니오. 정말 고맙소. 난 당신이 회사와 나를 적으로 생각하는 줄만 알았소. 당신들의 진심을 알았으니, 요구한 것을 내 그대로 받아들이리이다. 합의서를 이리 주시오.” 사장이 주머니에서 도장을 꺼내 찍으려는 순간, 노조 위원장이 이를 막았습니다. “사장님, 아직 도장을 찍지 마세요. 저희들도 내심 양보하려는 선이 있었습니다. 순간적인 감동으로 도장을 찍으시면 회사의 경영이 어려워집니다.” “아니오. 내가 양보할 차례입니다. 20% 그대로 인상합시다.” “닙니다. 사실은 15%도 과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대하는 사람은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이나 이 본문이 교회내의 갈등의 문제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본문은 일찍이 로마교회 안에서 대립적인 두 그룹간에 있었던 갈등 관계를 전제로 한 바울의 구체적인 권면 내용입니다. 본문을 보다 바르게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문의 내용이 쓰여지게 된 역사적 상황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역사적 상황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갈등의 문제가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주요한 목적중의 하나입니다. 이 문제를 말씀드릴려고 할 때 자연히 로마 교회의 기원 문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로마 교회를 누가 개척했는지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개척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단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로마에 이주해 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해서 기독교 복음이 자연스럽게 퍼지게 되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어서 로마교회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로마교회가 바울이 활약했던 주후 50년대 초기에는 영향력있는 교회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핵심 세력은 유대인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던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로마내에 유대인들의 폭동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문제 때문에 유대인들 사이에 종교적 논쟁이 심화되어 이것이 폭동으로 까지 확대된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시 로마 황제였던 클라디우스가 49년도에 유대인 추방령을 내려서 로마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로마 교회에서 중심세력을 형성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로마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났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이 칙령으로 말미암아 로마를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떠난 로마교회는 자연히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후 로마 교회는 수적으로 계속해서 성장하였고, 제국의 수도에 있는 교회였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날로 커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후 54년에 네로 황제는 이 칙령을 폐지하고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용했습니다. 로마 교회로 다시 돌아온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누렸던 기득권과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자 여기서부터 갈등은 시작이 됩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주장하고,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수적인 우세를 힘입어서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이 로마교회내에서 사사건건 문제를 야기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바울로 하여금 로마서를 쓰게 한 주요한 동기 가운데 하나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로마서 14:1-15:13까지의 본문은 이방인(강자)과 유대인(약자) 사이의 갈등을 전제로 하고 있고, 그 갈등의 내용은 음식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로마교회 내에서 약자의 부류에 속해있는 유대인들은 신앙이 비교적 보수적이고, 강자의 부류에 속해 있는 이방인들은 자유주의적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신앙입장은 자연히 실제 생활면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경우 그들은 깨닫지 못하는 죄를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 전혀 고기를 먹지 않고 야채만을 먹었고,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안식일과 금식일에 관한 습관과 관련지어 날들 가운데 특별한 날들을 구분지어서 지키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자유로웠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한 면에 있어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두 집단 사이에는 비판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믿음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과의 갈등입니다. 바울은 14장 전체를 할애해서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유치한 문제인데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렇게 유치한 문제가 신앙의 본질보다 더 심각하게 교회 공동체를 흔들 때가 많습니다. 로마 교회에서 믿음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음식에 대한 태도에 있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아무 음식이나 먹었지만 약한 사람은 가려서 먹었습니다. 14:2절의 설명에 따르면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전형적인 채식주의자들입니다. 14:21절에 따르면 그들은 고기도 먹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 이유는 긴 설명이 필요 없겠지요. 로마 기독교인들 중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대개 신전에 바쳐진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부정한 음식으로 판단하고 거절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모두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이미 고전 8장에서 우상 앞에 놓였던 음식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상이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상 앞에 놓였던 고기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우상 앞에 놓였던 게 아닙니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14장에서도 바울은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먹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먹는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서를 답니다.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하며, 또한 자신의 행동으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14:2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를 죄짓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고기를 먹는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그 밖의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바울이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일까요? 음식 문제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기독교인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취향에 속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성도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향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하는 게 핵심입니다. 그래서 그는 삶의 태도와 가치관이 자기와 다른 형제와 자매를 음식문제나 절기문제로 비난하거나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4:3절에서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은 가려서 먹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가려서 먹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습니다.”라고 가르칩니다.
1절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14장에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런데 15장에서는 더 적극적인 권고를 합니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약자의 약점을 담당해 줄 수 있을까요? 갈 6:2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어떻게 하면 짐을 나눠질 수 있을까요? 우선은 내 마음만이라도 알아주면 좋겠지요. 누가 내 마음을 제일 잘 알아줄까요? 내 입장이 되어본 사람이 잘 알아 줄 수 있을 겁니다. 사도 바울의 근사한 고백입니다. 고전 9:22절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그러면서 로마 교회에게 부탁합니다. 롬 12: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약자의 약점을 담당해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강자가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하면 자기는 기쁩니다. 그러나 약자는 슬퍼집니다. 강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자기는 기쁩니다. 그러나 약자는 괴로워집니다. 강자가 자기 편한 대로 하면 자기는 기쁩니다. 그러나 약자는 불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집안에서 강자가 어떻게 약자의 약점을 담당해 줄 수 있을까요? 강자와 약자가 함께 TV를 볼 때는 약자에게 리모콘을 양보해야 합니다. 강자와 약자가 함께 식당을 갈 때는 약자에게 메뉴 선택권을 양보해야 합니다. 강자가 자기를 기쁘게 하면 나머지 식구들에게서 기쁨이 사라집니다. 강자의 힘은 자기를 기쁘게 하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약자를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아는 사람은 아는 것으로 모르는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부자는 있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막 10: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불로 주려 함이니라.” 2절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강자가 약자의 약점을 담당해 주되 기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잘못하면 약점을 담당해 주면서 무시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약점을 도와주면서 상처도 함께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실수를 흔히 하게 됩니다. 기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기분 좋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조심할 게 있습니다.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기분만 좋게 해 주는 게 아닙니다. 선하게 해야 합니다. 유익이 되게 해야 합니다. 믿음이 성장하도록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기분 좋게 해 주되 해가 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기분 좋아지라고 하는 일 중에 제일 많이 하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술 마시는 거겠지요? 기분도 그런데 한 잔 하자고 합니다. 다른 인심은 박해도 술 인심은 후합니다. 약을 먹는다고 해도 마시라고 하고, 운전을 해야 한다고 해도 마시라고 합니다. 기쁘게 해 주되 신앙 성장에 유익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왜 약한 이웃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합니까? 예수님이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3절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게 해주시려고 자기의 기쁨을 포기하셨습니다. 눅 22:42절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를 기쁘게 하시려고 우리 대신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대신 채찍으로 맞으셨습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 53:4-5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대신 담당해주고, 기쁘게 해 주려면 고생을 좀 해야 합니다. 지치기도 합니다. 왜 나만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그때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4절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섬기다가 시험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참고 버텨야 합니다. 약1:2-4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으려 하지 마세요. 더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을 붙잡으면 하나님이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으로 마음을 만져 주십니다. 그러면 넉넉히 참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본받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런 교회는 믿음이 강한 성도와 믿음이 약한 성도의 갈등이 사라질 것입니다. 서로 한 마음이 됩니다. 한 마음 한 입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5-6절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중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합창단이 합창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전주에 여러 합창단이 있는데 대부분 교회와 관련된 합창단들입니다. 이 합창단은 노래를 좋아하는 분들이 모였습니다. 프로도 있고 아마추어도 있습니다. 악보를 보면서 노래를 합니다. 악보대로만 노래하면 됩니까? 지휘자를 보면서 지휘하는 대로 노래를 합니다. 또 신경을 쓸게 있습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옆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 목소리와 화음을 이루도록 내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냅다 내 목소리만 크게 내면 화음이 깨져 버립니다. 얼마나 연습하고 또 연습을 해서 마침내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냅니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교회에서도 각자 예수 그리스도를 잘 바라보고 따라가면 조화로운 소리와 아름다움이 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5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는 것을 말하고, 6절에서는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언급하며, 7절에서는 “서로 받으라.” 합니다. 모두가 같은 생각, 같은 의견, 같은 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뜻이 같고 마음이 같으며 서로 다른 상대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도록 힘써 노력하십시다. 간절히 사모하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보시면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9절하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시 18:49) 10절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신 32:43) 11절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시 117:1).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이 바울의 표현을 눈여겨보십시오. 우리는 영혼이 즐거울 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만을 향합니다. 그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불문하고 모두를 창조하시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자녀로 삼았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겁니다. 입으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깊은 생명인 영혼으로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찬양을 부르는 사람은 음식을 먹니 안 먹니 하는 문제가 너무나 사소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에 당연히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입니다. 그런 차이를 아예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유명가수의 라이브콘서트 장에 가보십시오. 그곳에서 열광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가졌던 모든 차이를 뛰어넘습니다. 오직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에 심취해서 모든 사람과 하나를 이룹니다. 세상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7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사람들은 약점이 있으면 잘 받아주지 않습니다. 학교는 불합격 시킵니다. 회사는 짜릅니다. 부부는 이혼을 하기도 합니다. 약점을 받아주는 게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서로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뭘 보고 우리를 받아 주셨습니까? 좋은 성품입니까? 훌륭한 인격입니까? 뛰어난 능력입니까?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게 많아서 입니까? 그냥 받아 주셨습니다. 약점 투성인데 그냥 받아주셨습니다. 그 수많은 죄와 악을 그냥 십자가의 보혈로 덮으시고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로마교회 안에 유대인 신자도 있고, 이방인 신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받아주시려고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유대인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방인도 구원받아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실 것을 이미 구약에 약속하셨습니다. 시 18:49절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신 32:43절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시 117:1절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사 11:10절 “이생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열방은 모든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엡 2: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열방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8-9절상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는 할례의 수종자가 되심으로써 할례자인 유대인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 조상들과 맺으셨던 언약을 신실하게 성취하시기 위해 주님은 유대인으로 태어나셨고 유대 율법에 속하는 할례도 받으셨으며 먼저 그들을 위해 사역하셨습니다. 이후에 이방인들에게는 긍휼을 베풀어 받아들이셨습니다.
열방을 받아들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고 그들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모든 열방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구약에 여러 번 예언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예언을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12절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사 11:10).
구원자는 유대인 이새의 혈통으로 오시지만, 구원자의 다스림은 열방을 포함합니다. 그러니 교회는 먹고 마시는 사소한 문제로 갈등할 것이 아니라 열방을 다스리시려는 왕의 원대한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후에 구원자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자칭 구원자라 하는 자들이 혼란한 시대마다 많이 등장하지만, 그들에 관한 어떤 약속이 기록되고 성취되었습니까?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될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기록된 말씀을 모두 신실하게 성취하시면서 언약을 견고하게 하신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열방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도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만백성의 유일한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있습니다. 연약한 자가 비본질적인 사안까지 내 의견대로 따르는 것이 소망일 수 없습니다. 강한 자가 내 뜻을 수용하는 일이 소망일 수도 없습니다. 사도는 각자 자기의 사소한 소망을 내려놓고 예수님만 소망하는 중에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13절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신령한 기쁨과 평강은 믿음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소망도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야만 참 소망입니다. 그런데 현실의 교회는 늘 믿음도, 성령의 능력도 부족해서 슬픔과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럴지라도 주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열방의 교회가 마침내 믿음 안에 함께 있을 것을 소망하면서 기쁨과 평안을 맛보게 하십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소망하며 살게 하십니다. 지금은 여러 방면에서 부족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도우셔서 우리 주님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맞이할 수 있게 하실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약점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일을 잘 합니다. 그래서 자기 약점을 감추려고 합니다. 포장을 합니다. 포장을 했으니 진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를 알아주는 친구가 없습니다. 외롭습니다. ‘아웃사이더’의 ‘외톨이’라는 노래 가사입니다.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 어디 없나. 가만히 놔두다간 끊임없이 덧나. 사랑도, 사람도 너무나도 겁나. 혼자인 게 무서워 난, 잊혀 질까 두려워. 언제나 외톨이 맘의 문을 닫고, 슬픔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바보,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막고, 캄캄한 어둠 속에 내 자신을 가둬, 365일, 1년 내내.’ 우리 안에는 약점이 많습니다. 약점을 거부당한 상처가 많습니다. 또 거부당할까 미리 거부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약점을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인 우리 교회는 우리 안에 있는 서로의 약점을 받아주기를 사모하며 힘쓰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강한 자의 사명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인 줄로 압니다. 하나님, 저희들이 주의 이름으로 강한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이웃을 돕고 섬기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 사람들로 세상은 아름답게 변화될 줄로 믿는데, 오늘 머리 숙여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복음을 전하였노라! / 롬 15:14-21
2020년 2월 16일 오후예배 설교를 한 후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예배를 멈추었다가 2년 5개월만에 오후예배를 드리게 되어 설교를 합니다. 아직 코로나가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닙니다. 지난 5월부터 소강상태로 있다가 7월부터 확진자가 증가하여 염려하는 중에 있습니다. 상황을 봐서 오후예배가 다시 멈출 수도 있습니다. 2년 전 오후예배 때 로마서를 설교하였는데 15:1-13절까지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은 로마서를 이어서 설교하겠습니다.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소련의 반체제 운동가라는 죄명으로,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에 들어가, 하루에 12시간씩 노동을 강요당했습니다. 가족까지 잃고,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그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들고 있던 삽을 집어던지고 털썩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신음하며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 자기 곁에 다가선 것을 느꼈습니다. 전혀 본적이 없는 노인이었고, 그후에도 다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노인은 막대기를 가지고, 솔제니친 앞에 있는 모래밭에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그 십자가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보는 순간에, 그는 세상에 있는 어느 권세보다도 강한 하나님의 능력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 능력이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는 1년 후 석방되었고,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후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생명을 소생시키는 힘입니다. 어떤 길이 생명의 길입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길입니다. 고전 1: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제 로마서의 강해도 서서히 끝이 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12:1-15:13절까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는 윤리면과 실천면을 말하고, 본문 14절부터 16장까지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마감하면서,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왜 편지를 써서 보내기를 원했는지 그 이유를 다시 한번 설명하고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려고 이 서신을 쓴 것입니다.
14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로마의 교회와 성도들이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들임을 칭찬’하면서, 바울이 확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서로 진리를 가르치고 권하면서, 선량한 마음으로 서로 이해하고 포용하면서, 예수님을 잘 믿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그들의 신앙을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이웃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더 잘하고 자신 있어지고, 자기 목숨까지도 바치는 충성심과 희생정신이 발휘됩니다. 우리는 80년대의 장세동씨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호남사람으로 영남사람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위해, 굳은 일을 도맡아 해낸 전 안기부장 출신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욕하기도 하지만, 그의 충성심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어떤 잡지사 기자가 그에게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전두환 대통령에게 충성합니까?’ 물었더니, 그 사람은 ‘전두환 전대통령은 나를 인정해 주십니다.’라고 짧게 한마디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인정받을 때, 인정해 주는 사람들에게, 몸을 던지기도 하고 생명을 걸기도 합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의 성도들을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들 언제 정신을 차리겠느냐?’ 이런 꾸중이 아니라, ‘너희들은 생각보다 좋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너희는 선한 사람이다’라고 인정해 주고 있고, ‘너희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했고, ‘너희는 능히 서로를 세워 줄 수 있는 믿음이 장성한 성도들로 자랐다’고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 성도들은 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선함’은 ‘마음과 생활의 착함’을 나타내는 말로써, 그들이 서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지식’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으로써 성경을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왜 지음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선한 일을 하라고 지음을 받았습니다. 엡 2:10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선한 일은 ‘하나님이 보시고 옳게 인정해 주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사명인줄 믿습니다. 딤전 1:12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지식이 충만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삼박자가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하자’입니다. 카톨릭을 구교라고 하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신교라고 합니다. 소위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르기도 하고, 개신교, 개혁교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성경을 그대로 믿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개혁교회는 세 가지의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첫째,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봅니다. 곧 신구약 66권만이 우리 믿음과 생활의 표준입니다. 그러니까 66권 성경 외에 다른 것을 믿게 하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개혁교회가 아니고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둘째,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주제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고, 그 십자가의 사건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엡 2:8-9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셋째, 만인 제사장입니다. 16절에서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다 제사장입니다. 이것은 ‘봉사론’입니다.
이 세 가지를 더 쉽게 표현하면, ‘믿음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성경’입니다. 그 기준을 볼 때 ‘생명은 어디서 얻느냐?’ 구원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는 성경 해석을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못합니다. 해석을 하면 원칙적으로 파문 당합니다. 해석을 함부로 못합니다. 성경을 공개해서 읽게 한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에는 평신도들은 성경을 전혀 읽지 못했습니다. 기도문도 받아 읽고 따라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교회가 다른 점은, 성경을 나누어주면서 ‘성경을 직접 잃어라! 많이 일어라! 성경을 묵상하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을 직접 해석해 볼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모든 성도가 각자 깨달은 만큼 성경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만인제사장’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열심히 말씀대로 봉사하는 자’를 말합니다. 모든 섬김의 도리를 감당하는 자입니다.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리고,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리고, 예수님이 명한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고, 기타 성경 속에 제시한 봉사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만인 제사장의 직분입니다.
여기 ‘모든 지식이 차서’란 말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워서, 그 지식이 넘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로마교회 성도들의 신앙수준이 대단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서로 잘 믿자고 권하는 자가 되라’고 이 서신을 쓰고 있습니다. 하반절에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권면해서, 예수를 잘 믿도록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권사님들은 정신 차려야 합니다. 원래 권사는 성경에 보면 ‘권위자’입니다. ‘권면하고 위로하고 섬기는 자’입니다.
어느 성도가 교회를 잘 나오다가 무슨 이유인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권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왜 교회에 안 나오십니까?’ ‘저는 교회에 안 가겠습니다. 이유는 생각보다 위선자들이 많습디다.’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이때 권사님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선자는 천국에 못 갑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안 나오는 당신도 위선자가 가는 지옥에서 그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보지 마시고 나오십시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그런 위선자인 가룟 유다가 있었는데, 그도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 불에 떨어졌습니다.’ 이 소리에 이해가 되어, 다시 교회에 나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교회 직분자들은 이런 일을 해야 합니다. ‘쉬고 있는 사람, 낙심에 빠져 있거나 시험에 빠진 자에게 권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권면하는 자가 가져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첫째, 권면할 때, 그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저주가 아닌 사랑으로 해야 하고, 미움이나 분노가 아닌 동정심, 그리고 눈물의 기도가 권면하는 자에게 있어야 합니다. 둘째, 권면하는 자는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확신 없는 믿음을 가지고는 남을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15절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바울이 이 서신을 쓰게 된 원인은, ‘이 서신을 읽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생각나게 하려고’ 썼다는 것입니다. 롬 1:11-12절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곧 나는 가르치는 입장이고, 너희는 배우는 입장에서 나를 따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령한 그 어떤 것을 나누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개인적인 은혜를 서로 교환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게 주신 은사도 있고, 그들에게 주신 은사도 있으니, 서로 같이 돕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혜를,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신앙생활하면서 도움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은혜’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값없이 엄청난 선물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자기가 자격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 자격이 없는데도, 너무 과분한 것을 공짜로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하나님 앞에 발견한 은혜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구원받은 은혜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았다’는 이 감격을 사도 바울은 여러 번 말하고 있습니다. 롬 3: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도 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또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란 ‘은혜에 개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도, 은사도, 개별적인 것으로,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의 은사를 받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기도에 은사를 받습니다. 또 구제하는 은사도 있고, 권면하는 은사도 있고, 은사가 다양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런 은사를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안 나타나는 것은 개발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할 때 나타납니다. 전할 때 나타납니다. 그래서 행함이 살아있는 믿음의 근본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목사는 말씀을 잘 전하는 은사, 말씀을 잘 가리키는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본문의 사도 바울이 받은 은사는, 특별한 은사로 신학적인 말을 빌려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율법적 해석의 은사’라고 말한 분도 있습니다. 또 하나 바울이 발견한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자기를 불러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에게 전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도라는 직분을 주신 은혜입니다. 곧 사도로 부름 받은 은혜를 1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6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자기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세움 받은 사도’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의 사명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느끼며, 특별히 로마의 복음화를 소원했습니다. 물론 바울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자기 동족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 노력했고, 하나님께 애원하되 자기의 이름이 생명록에서 지워지는 일이 있더라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달라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전도의 활동무대는 대부분 이방세계였습니다. 그 당시 바울은 로마의 복음화를 소원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세계를 장악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세계를 통한다.’고 했기에, ‘로마의 복음화가 곧 세계의 복음화의 첩경’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에 대해, 위대한 애정과 영광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라는 직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귀한 직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귀하게 여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감투는 이 땅에서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직분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인정받게 될 줄 믿습니다.
바울은 일꾼이었습니다. 누구의 일꾼입니까?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본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의 일꾼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전 4:1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란 말의 의미는, ‘배 밑장에서 노를 젓는 일꾼(노예)’이라는 말로, 우리는 ‘벤허’라는 영화에서 배 밑장에서 노를 젓는 노예들의 모습의 비참함을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복종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일꾼’이란 영어 성경에는 ‘목사, 성직자’라는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 정부의 장관을 뜻하기도 하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원래 의미는 성직을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결단코 하찮은 것 아닙니다.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요, 복음을 전하는 일은 거룩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한 것입니다. 찬송가 508장의 ‘카셀’은 이런 찬양시를 썼습니다.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 전하는 일은, 하늘의 천사도 부러워하는 일이라고 그는 노래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일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이고, 큰 은혜입니까? 천사가 흠모할 일을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 만큼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의 직무를 하게 하사’ 무슨 말입니까? 복음 전하는 일은 아주 신령한 제사라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려면 제사장이 있어야 합니다. 제단에 제물 바치는 일을 제사장이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은 바로 여러분이요, 제물은 불신자, 이방인을 말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말씀까지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십니다. 복음입니다.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이 그 길입니다.’라고 하면서, 그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이 전도입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이웃을 전도하여 교회에 데리고 왔다면, 그래서 그 사람이 믿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제일 좋은 제물로 제사를 드린 것이 됩니다. 불신 남편을 아내가 열심히 전도해서 예수 믿게 했다면, 아내는 그 남편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전도하여 주님께로 인도했다면, 그 아들은 아버지를 제물로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는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제사장은 아무나 할 수 없었습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만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높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는 직분입니다.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부르신 사람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벧전 2:9절 이하에 우리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신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복음을 전하라고 왕 같은 제사장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너무나 고귀한 직분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우리를 세워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빼앗기지 말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런 제사장이 되었다는 의식이 투철할 때, 전도의 열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전도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므로 은혜’라고 했습니다. 제사라고 하는 것은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로 신을 섬기며, 그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제단에 제물을 바치는 일은 제사장이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을 제사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도해야 그들이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롬 12: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일꾼이 가져야 할 태도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빚진 자의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롬 1:14절에 ‘내가 빚진 자’라고 하여 ‘구원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빚진 자로써 채무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둘째, 자기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딤후 2:4절에 전쟁에 나간 군사가 자기를 돌아보고, 가정을 돌아본다면 싸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영적 전쟁에 나간 십자가의 군사로써, 자기를 돌아보지 않아야 됩니다. 딤후 2:4절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셋째, 절대 복종만 있어야 합니다. 일꾼은 주인에게 절대 복종하듯, 군인은 사령관에게 절대 복종하듯, 그리스도의 일꾼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절대 복종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넷째, 절대 헌신과 충성만이 일꾼의 바른 자세입니다. 계 2:10절하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왜 전도가 은혜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자가 성령의 능력을 가장 많이 자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7-18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을 말과 행위로’
사도 바울은 지금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울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기에 대하여 바울은 절대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랑할만한 것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자기 자랑은 절대 하지 않고, 오직 자기를 통하여, 곧 하나님이 주신 사도직의 행사를 통하여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고 있습니다. 구원운동의 성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는 갈 6:14절에서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19절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의 첫 전도의 출발지는 다메섹이요, 선교사로 출발한 곳은 안디옥교회입니다.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는 로마 제국내의 전도 여행이 가능한 전체 지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편만하게 전했다’는 말은, 그 지역 모든 곳과 모든 사람에게 다 전했다는 뜻이 아니고, 자기의 임무를 다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삼일만의 부활하신 복된 소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복된 소식인 십자가의 생명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해야 할 사명과 책임이 있습니다. 롬 10:15절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그런데 복음을 전할 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20절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쉽게 표현하면 다른 사람이 전도한 곳에 들어가서는, 절대로 전도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남의 터 위에’란 쉽게 표현하면, 다른 교회 나가는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단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남의 터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여호와 증인이나 신천지들은 오직 기성교회 성도들만 공략합니다. 또 우리나라 교회의 문제는 큰 교회에서 이런 짓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미 세워진 교회 옆에다가 교회를 또 세우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교회에 개척을 많이 하다보니, 한 건물에도 여러 교회가 들어서고, 마주보고 들어서고 그럽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입니다. 바울사도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고린도에서도, 빌립보에서도, 에베소에서도 그는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개척자의 삶을 산 것입니다. 바로 사명자의 삶을 산 것입니다.
21절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 52:15절의 말씀을 인용한 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되어 있지 않으냐?’고 하면서, 절대로 남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거나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가서 전할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선언입니까?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질서는 기본이고 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초신자들을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그런 위대한 일에 앞장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과 구별된 존재로 부르심을 받은 주의 백성답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향기로운 산 제물로 날마다 바쳐지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이방인을 구원할 제사장의 직분을 주셨으니, 그 귀한 사명을 감당한 이들을 더욱 붙잡아 주시고, 감당하지 못했으나 주님을 향한 열정을 가진 이들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셔서, 주님께 헌신하고 충성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바울의 소망인 로마 진출 / 롬 15:22-33
옛날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중에 “처음부터 호랑이를 그리려고 해야 고양이라도 그리지, 처음부터 고양이를 그리려고 하면 쥐새끼도 못 그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곧 큰 꿈을 가지고 시작해야 작은 꿈이라도 이루게 된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너무 작은 꿈을 가지면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옳을때도 있지만 그 말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 최초로 온 선교사는 언더우드입니다. 그분이 한국에 와서 교회, 학교, 병원, 고아원을 세우고,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힘쓴 결과, 오늘날 한국에는 800만명이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한국에 처음왔을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겠다는 큰 꿈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닙니다. 원래 인도선교사가 꿈이었는데 인도로 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선땅에 어둠과 고통속에서 살아가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하면서, 작은 일부터 성실하게 감당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꿈을 하나씩 하나씩 키워주시고 이루어주셨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유럽 복음화의 기초를 세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바로 그렇게 큰 꿈을 꾼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감옥에 가두고, 죽게 만든 교회의 원수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열심과 열정을 가진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바로 그때 유럽복음화의 큰 꿈을 꾼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게 되자 단지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리스도인이 되자, 이제는 자신이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맙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고향인 터키의 다소라는 곳으로 가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가 자신의 고향에서 유럽복음화의 큰 꿈을 구상하고 계획을 세웠겠습니까? 그는 평범한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살았을 뿐입니다. 그 이후 바나바에 의해서 안디옥교회의 사역자로 부름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로 하자면 부교역자로 초청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교사로서 충성을 하게 됩니다. 그때도 그는 선교사가 되겠다는 무슨 큰 꿈을 꾼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교사로 충성을 다할 때, 하나님은 비로소 그를 선교사로 부르시고 선교지로 파송을 받게 됩니다.
그럼 이제 그가 선교사가 되자마자 유럽복음화의 큰 꿈을 비로서 마음속에 품었겠습니까? 그들이 제일 먼저 선교를 떠난 곳은 선교팀장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라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은 다시 바울의 고향인 터키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머리속에 생각한 꿈은 먼저 자신들의 고향땅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머리속에 유럽의 복음화라는 거대한 꿈이 아직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근거가 되는 말씀을 행 16:6-7절을 통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행 16:6-7절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바울은 유럽이 아닌 아시아지역에 복음을 전할 계획을 가지고 그쪽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란 인도나 중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터키의 다른 지역을 가리킵니다. 아무튼 바울의 꿈은 터키에서 복음을 계속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그러한 꿈이 꺽이게 됩니다. 예수의 영, 곧 성령께서 바울이 아시아쪽으로 가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곧 바울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울의 꿈과 하나님의 꿈이 서로 달랐습니다. 그 사건이후 밤에 바울에게 특별한 환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행 16:9-10절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그때까지 바울의 계획과 꿈속에 아직 유럽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의 원래 계획을 막으심으로, 마게도냐 곧 유럽에서 복음을 전할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있는 곳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자, 하나님은 바울에게 새로운 꿈과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한때 자신의 고향이 있는 터키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다가, 유럽으로 건너가서 동유럽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유럽의 서쪽 끝인 스페인 지역까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새로운 꿈과 비전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수백명 수천명 수만명 앞에서 멋진 설교를 하면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때 어떤 자세로 임했습니까? 고전 9:22절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바울의 머리속에는 몇 백명 몇 천명이 아니라 항상 몇 사람이라도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허세를 부리지 않았고 처음부터 허황된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했습니다. 오늘 만난 한두 사람에게 복음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전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꿈을 주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22절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본문에서 바울이 얼마나 로마교회를 방문하고 싶어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롬 1:13절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사도바울은 개인적으로 로마에 가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길이 막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에 여러 번 가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이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이 가장 좋은 때, 가장 좋은 방법으로 보내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교회사에 보면, 바울이 이 서신을 써 보내고 난 후, 3-4년 후에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그렇게 로마에 들어갑니다. 그 때가 주후 62년경입니다. 들어가서 3년 가까이 머물면서 감옥에서 지내기도 하고, 풀려나기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여러 번 막혔더니’ 우리나라처럼 3,8선이 가로막혀 건너가지 못함을 말함이 아닙니다. 또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지금과 같이 비자를 못 얻어서 못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의 인도하심을 허락지 아니하셨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선교지를 떠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하지 안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소아시아 지방으로 내려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영이 예수 전함을 막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꿈에 코가 큰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서 ‘나를 도우라’는 것입니다. 마게도냐는 지금 그리이스인데, 그 당시 알렉산더 대왕이 다스렸던 그 지방을 마게도냐라고 합니다. 바울은 즉시 성령의 인도를 깨닫고, 보따리를 싸고 바다를 건너, 유럽 땅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막혔다’는 말은 소위 사람이 다니는 길이 봉쇄되어 못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계획을 세우지만, 그 계획을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루시고 그 계획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으로는 로마로 가서 큰 환영도 받고, 거시서 요즘 같은 대형 집회를 열고, 많은 로마의 지식층과 권력층을 모아놓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보내지 않고, 죄수의 몸으로 밧줄에 묵혀서 갔습니다. 이 사건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그러나 죄수의 몸으로 갇혀서 간 것도, 결국 알고 보니 하나님의 뜻입니다. 죄수의 몸으로 잡혀갔기 때문에, 그가 어디로 갔느냐 하면, 로마 황제가 살고 있는 시위대 안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시위대는 지금 우리나라 수도경비사령부 정도가 되는, 그 당시 왕실을 지키는 부대입니다. 바울이 그 부대 안에 갇힌 이유는 바울을 정치범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위대 안에는 대게 황족들이 드나드는 곳이요, 로마에서 가장 높은 원로들이 드나드는 곳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그냥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안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빌립보서 마지막 장에 보면, ‘가이사의 집 사람 중에 몇이 예수를 믿었다’고 나옵니다. 황족 중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나왔고, 또 원로 중에서도 나왔고, 또 고급 군인 중에서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사실 주후 313년경에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했고, 그후 12년 뒤 325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변해갔던 것은 어떤 한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벌써 황실 속에까지, 시위대 안까지, 원로들까지 복음이 들어갔기 때문에 로마가 기독교국가가 된 것입니다.
23-24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받은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선교의 최후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서바나입니다. 28절에서도 보면 서바나에 가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서바나는 지금 스페인을 말합니다. 그 당시 스페인 반도 전체를 서바나로 불렀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스페인을 문명세계의 끝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땅 끝으로 본 것입니다. 바울이 소아시아로부터 시작하여 마게도냐인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유럽의 가장 서쪽에 붙은 땅이 바로 스페인이기 때문에, 스페인 하면 그때 당시로는 땅 끝으로 여겼습니다. 그때는 콜럼버스가 북미대륙을 발견하기 전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를 거쳐 땅 끝인 서바나로 가겠다는 것은, 어떤 인간적인 욕심이 아닙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일념입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기서 ‘이제’란 제3차 선교여행의 종착지인 고린도를 비롯하여, 소아시아, 마게도냐, 아가야 지방에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제 선교지를 서바나로 옮겨야 되겠다는 각오도 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해 전부터 로마를 통해서 가기를 원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교회에 들어가 예수 안에서 교제를 좀하고, 그러니까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도 하면서,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했다는 말입니다.
‘얼마간 기쁨을 받은 후에’란 말은, 오래 동안은 못 머물러 있다는 뜻으로, 원래의 뜻은 잠깐 동안이라는 뜻입니다. 로마교회에 가서 잠깐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도 하고 교제를 한 다음, 그 다음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왜 가고자 하는가’를 쉽게 말하면 너희와 신앙 안에서 교제를 나누고, 그 다음에 너희의 도움을 받아 서바나로 가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선교비를 좀 지원하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 로마는 세계를 정복한 나라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돈은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한국 돈을 가지고 외국에 나가는 것 보다, 미국 돈인 달러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 훨씬 쓰기가 편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유대사람들이 헌금을 해서 저 스페인까지 보내려면 아주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로마 교인들이 힘을 합하여 스페인에 보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는 말씀은, 재정적인 후원도 중요하고, 기도의 후원도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25절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무슨 말씀입니까? 세계선교를 열심히 하고자 하는 그 아름다운 소원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더 급한 것은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돕는 것이 더 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계선교도 귀한 일이지만, 바로 내 이웃이 굶어 죽어가고 있고, 영혼이 지옥 불로 떨어지고 있다면, 그런 영혼들과 육신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모 교회입니다 만은, 박해가 너무 심하고, 거기다가 또 흉년이 겹쳐서, 아주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는 곳마다 ‘형제들아, 도우라! 사랑을 실천하자’고 외치므로, 많은 성도들의 참여 속에 거액의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교회로 갑니다.
지금 바울이 섬김을 받고 대접을 받으려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섬김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신앙생활은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주의 종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고, 이웃을 바로 섬기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본문의 바울은 자기가 가진 돈이 없었습니다. 돈 가지고는 못 섬겼지만 말씀을 가지고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우리들은 무엇이 없어서 못 섬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가지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주님도 이 땅에 섬기려 오셨습니다. 마 20: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섬김의 최고봉은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주신 사랑입니다.
26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마게도냐의 대표적 교회는 ‘빌립보교회’였고, 아가야 지방의 대표적 교회는 ‘고린도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들이 예루살렘의 모 교회를 돕기 위하여, 헌금하여 바울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그들이 헌금한 것이 억지로나, 마지못해서 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했다는 것을 밝힙니다. ‘기쁘게’란 말씀이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기쁘게 동참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동참했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마게도냐나 아가야 성도들이 생활이 부유했느냐, 그러니까 잘 살았느냐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못살았습니다. 고후 8:1-2절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그들은 환란도 많고, 시련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동참했습니다. 극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헌금을 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가난함으로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희생하면서도 도왔습니다. 부자라고 돈이 있다고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의 여러 가지 어려운 처지를 알아야 도울 수 있습니다.
27절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루살렘교회가 선교사를 보내 주어서, 저희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도록 복음을 전해 주었으니, 빚진 자의 마음으로 물질이라도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다’는 말은 복음을 나눠 가졌다는 말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분입니다. 이 복음의 구원의 역사는 원래 유대인들에게 주신 것인데, 그들이 거부함으로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미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최고의 가치인 생명을 나눠가졌으니, 빚을 감는 마음으로 구제하라는 의미입니다. 갈 6:6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말씀을 받은 자(성도)들은 말씀을 전하는 자(주의 종)들에게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것’은 ‘옳은 것’이라는 말로, 주의 종을 섬기는 것은 옳은 행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받은 만큼 다른 사람을 도와줄 때에, 우리의 은혜의 생활과 감사의 생활이 더 넘치게 될 것입니다.
28절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바울은 그가 이방인 교회에서 모은 헌금을, 직접 예루살렘에 가지고 가지 않고, 그의 동역자를 통해서 대신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가면, 생명의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이번에 올라가서 체포되어 로마에 잡혀가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가고자 했던 이유는, 기독교의 중심지인 그곳에 가서, 그의 선교사역을 낱낱이 보고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확증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뜻에서 보면 이방인의 헌금은 복음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씨를 뿌린 결과, 그 보답으로 얻게 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확증한 후에’ 확인의 도장을 찍었다는 의미로, 구제헌금을 확실히 전달한 후임을 의미한 말로, 어떤 대표성을 띤 말로써, 어려운 선교 여행 중 값진 열매를 보고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원했습니다.
29절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바울 사도는 그가 로마로 행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간다고 했습니다. 주의 종에게는 축복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축복하면 사업이 잘 되고, 아들을 낳고, 시험에 합격하고, 문제가 풀리는 것만을 축복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축복은, 그런 육적인 축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우리가 새롭게 눈을 떠야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축복 그 자체입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천국 가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잘 믿으면 이 땅에 살면서도 영육 간에 복을 받습니다.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를 잘 믿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다 있습니다.
3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이제 30-33절까지는 한번도 대면한 일이 없는, 생면부지의 로마 교인들에게 기도해 달라고 SOS를 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권면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해야 합니까? 요 14: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롬 8: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다 들어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할 바를 다 간구해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권하노니’의 원어의 뜻은 ‘시간이 급합니다. 재발 기도해 주십시오. 간절히 소원합니다.’라는 의미가 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얼마나 팽팽한 긴장감과 강한 요청이 그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까? 본문 속에 또 다른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울은 ‘나와 힘을 같이 하여’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 성도들이여, 나는 지금 서바나 선교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전력을 다하여 생명을 걸고 씨름하듯이 기도합니다. 여러분들도 나를 위해 기도할 때, 나와 같은 태도로 기도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힘을 같이 하여’란 말은 전투적인 용어로써, 사생결단을 하려는 사람처럼, 전력을 쏟아 기도하는 태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이런 기도를 부탁합니까? 31-32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31-32절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만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생명의 위기 앞에 드린 기도부탁입니다. 그 당시 상황을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은, 사자 굴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생명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바울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유대교의 열심분자들이 도처에 깔려있는 곳입니다. 바울이 활동하고 있는 소아시아 지역은 로마의 법 아래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안에만 들어오면, 바울 그까짓 놈 하나 죽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참 많았습니다. 왜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악을 쓰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설교의 주제가 예수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구원받기를 원하십니까? 죄 사함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은 아무리 지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예수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이를 갈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저놈 보아라, 하나님의 율법을 안 지켜도 된다고 가르치고 있네! 저 놈을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되겠다. 큰 일 나겠다.’고 아우성들입니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의 심정을 행 20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행 20:22-24절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일사각오를 봅니다. 이것이 쉬운 일입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심정을 안고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또 구제헌금을 전달하는 일이 잘못되지 않기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만하게 하고’ 헌금 전달이 잘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32절에 예루살렘에서 있을 일을 잘 마치고, 로마로 가서 성도들과 좋은 시간을 갖고 싶은 소원이 있기 때문에, 그 일을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편히 쉬게 하라’는 말은 일을 잘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교제하고 친교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기도의 부탁은 ‘자기 개인의 소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허락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33절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평강을 축복하므로 15장의 결론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로마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과 함께 해 주시기를 축원한 것입니다. 그 축원은 첫째,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바울 사도는 축도에서 ‘평강의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평화가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시기를 빌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주님이 주시는 평강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요 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둘째, 사람과의 화목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이룬 사람은 사람과 화목을 이룹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주지 않고는 내가 기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평화를 주지 않고. 내가 평화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고통을 줄 때, 나에게 미움과 시기가 가득 차게 되어, 내 안에 기쁨이 없고 평화가 없게 됩니다. 셋째, 이 평강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평강을 구해야 합니다. 빌 4:6-7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때에, 환난의 때에, 절망의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인간의 고뇌와 아픔을 넘어서 하나님의 평강을 맛보게 됩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 사도바울의 축도가 여러분들에게도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나의 계획이 내가 원하는 때에, 당장에 이루어지 않는다 할지라도 낙심하기 보다는, 한쪽을 막으시면 다른 쪽의 더 좋은 길을 열어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의 주어진 작은 일에 겸손과 순종으로 충성을 다하며 살게 하옵소서. 오늘도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저희의 삶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또한 저희에게 주신 물질과 시간과 은사를 하나님께서 오늘 맡겨주신 일에 사용하는 복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