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장발장과 소인기小忍飢
제15회 작품상
황옥주
지난(21.11.15) 광주일보의 돌봄 비관이 부른‘3代 비극’이란 기사를 읽으면서 잠시 머릿속이 하얘짐을 느꼈다. 가까운 담양에서 일어난 비극이다. 일부러 굶고자 애를 쓰는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에 누군가는 먹고살기 힘들어 죽음을 택한다. 이런 이율배반적 아이러니가 없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가난의 불행은 가난한 사람 혼자서 책임지고 가야하는 세상이다. 멍에의 무게를 감당치 못하고 하늘이 내린 목숨까지를 버린 사람 한 둘이 아니다.
빈곤이 빚은 비극의 얘기를 읽고 들을 적이면 한 영상이 떠오르곤 한
다. 신부님의 강론대신 보여주신‘현대판 장발장’이다. 장발장이『레 미제라블』의 주인공임을 모르는 사람을 없을 터, 국회의원이기도 한 위고는 등장인물 전부를‘불쌍한 사람들’이라 여기고 이 소설을 썼다 한다.
‘현대판 장발장’은 추운 겨울 인천 한 마트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젊은 아버지가 10여살 넘어 보이는 아들의 배낭에 우유와 사과 몇 알을 넣고있었다. CCTV에 그 장면이 잡혔고 신고 받은 경찰의 등장으로 경위가 밝혀졌다.
아버지는 기초생활수급자, 집에는 어린 아들이 한 사람 더 있단다. 세 가족이 아침밥, 점심도 먹지 못했으니 누구라도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이다. 아무 것도 없는 곳이라면 체념이라도 했겠지만 쌓여있는 먹거리 앞에서의 의지란 힘이 없다. 장발장의 새 판이 150년이 흘러가버린 이 땅에서 벌어진 것이다.
다른 점이라면 장소가 파리의 빈민가에서 화려한 인천의 마트로, 발견 장면은 사람의 눈이 아닌 현대문명의 기계다. 훔친 것도 빵이 우유와 사과로 바뀌고 어린 공모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인간의 가장 본초적 욕구를 해결하지못하면 이런일들은 언제 어디서든 간단없이 일어날 수 있다.
풍요로운 오늘날 먹을 것만 놓고 본다면 훔치지 않아도 살아갈 다른 방법이 있을지 모르나 제3자가 속단하여 판단할 일은 아니다.
장발장은 빵 한 조각으로 19년의 형을 살았다. 한국의 현대판은 마트 주인의 용서, 현장조사를 나온 경찰은 감옥 대신, 주린 부자를 식당으로 데려가 국밥을 사준다. 옆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먹는 일에만 정신이 팔린 부자의 모습을 보면서 호주머니 속의 돈을 꺼내 정을 전하는 경찰 때문에 코끝이 시큰했다.
더 감동적인 것은 그들 곁으로 한 사람이 다가와 봉투를 전해주고 그냥 되돌아나가는 장면이었다. 이름도 말하지 않은 청년의 봉투에는 20만원이 들어있었다. 감동 위에 감동이 오버랩 된다. 그런 경찰, 그런 시민이 있는 한 정치는 갈수록 개판(실례)으로 치달아도 새록새록 정이 솟는 나라다.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어디 한두 가지뿐이랴! 이 간난을 이겨내는 것이 사는 보람이다. 무엇이 어렵고 어렵다 하더라도 주림처럼 견뎌내기 어려운 일은 없으리라. 이유는 너무 명백하고 간단하다. 못 먹으면 죽기 때문이다. 지조도 정의도 의리도 베고픔 때문에 팽개치고 훼절한 사람 많다.
조선 광해군 때의 한 선비의 아내가 남편의 친구들에게 수제비라도 끓여 대접하려고 식칼로 궤짝을 쪼개다가 잘못하여 젖가슴을 찍고 말았다. 비명에 사실을 알게 된 주인선비는 가난이 죄라고 한탄하자 그 말을 들은 한 친구는 가난이 원술 줄 이제야 알았냐며 발길을 끊어버렸다.
가난에 지친 선비는 뜻을 굽혀 벼슬길에 나갔다가 인조반정 때 죄인으로 몰려 죽게 됐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 연을 끊었던 옛 친구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찾아왔다. 끌러가던 선비가 찾아온 친구에게“소인기(少忍飢 조금만 베고픔을 참아라) 소인기 소인기 하라.”했단다. 조지훈의〈지조론〉에 나오는 얘기다.
조양숙 씨는『논어강설』(제1편 270쪽)에 조선 선조, 광해군 때의 권신 이이첨의‘소인기’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이첨은 명문대가의 후손이었으나 젊은 시절은 무척 가난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아내가 벽지의 풀기가 붙은 벽의 흙을 긁어먹는 장면을 목격하고 절치부심 노력하여 선조 15년 생진과를 통해 광릉참봉 말직을 얻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조 능의 위패를 지켜 선조를 감동시켰다.
그 뒤 별시문과, 문과중시에 장원하고 세자 광해군을 가르치며 광해군의 충복이 되었다. 영창대군 탄생으로 영의정인 소북의 유영경과 대립,광해군이 즉위하자 반대파인 유영경 등을 숙청하고 대북의 영수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10년을 재상으로 있으면서 악착같이 재물을 긁어모았다. 가난 시절의 한풀이가 잘못되어 끝내는 역적으로 몰렸다. 죽음 직전에 친지들에게 ‘소인기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영원한 부귀나 영원한 영광은 없다. 사노라면 모든 것은 변한다. 하늘은 끝내 공평하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더라도 훔치는 것에 손뼉치고 두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순간의 잘못으로 저지른 죄에 함부로 붉은 낙인을 찍어서는 안된다. 용서받을 잘못은 누구에게나 있다. 너도 잘못하고 나도 잘못하며 살아간다.
과거는 불문이다. 후반이 아름다우면 잘 사는 인생이다.‘현대판 장발장’의 경찰관, 무명의 청년, 가진 것이 많아서 베푼 것은 아닐 터다. 곧 하늘에서 쫓겨난 눈 내릴 겨울이다. 정이 넘치는 성탄 훈기가 가득한 세모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