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온 글
입력 : 2012.05.22 22:58
[일제강점기 고래잡이 중심지였던 대청도]
1920년대 '고래 파시' 형성, 사람 몰리고 돈 넘쳐나
가장 몸집이 큰 대왕고래, 대청도에서만 잡히기도
세계경제공황으로 된서리… 선착장 등 시설 남아 있어
송창식이 부른 노래 '고래사냥'에는 '자~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라는 후렴구가 있다. 동해를 끼고 있는 울산 장생포와 포항 구룡포에서는 매년 고래축제와 고래 문학제를 개최하고 고래 박물관과 고래관광 유람선을 연중 운영하는 등 노래 가사처럼 '고래 신화'를 좇고 있다. 이처럼 고래 하면 자연스럽게 동해가 생각나지만 사실 우리나라 포경(捕鯨) 역사에서 서해의 옹진군 대청도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상업적 고래잡이 포경업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에 의해서다. 1882년 수신사 고문으로 일본에 가 있던 그는 나가사키에서 포경업이 성행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곳에서는 고래를 대량으로 잡아 훌륭한 양식으로 삼았고 석유 대용 기름과 양초, 윤활유 등 수백 가지의 공산품을 만들어냈다. 조선 연안에도 고래가 많다는 것에 착안, 그는 포경업을 새로운 부국강병의 한 방안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갑신정변의 실패와 함께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우리의 고래잡이 수준은 해변으로 몰아서 잡거나 간혹 기력을 잃고 떠내려 온 놈을 생포하는 그야말로 '수렵 수준'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 산업화된 포경업은 제국주의의 침탈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1899년 러시아는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해 포경특허계약을 맺었고 장생포 등지를 어업기지로 삼아 동해에서 대규모 포경사업을 벌였다. 바로 뒤이어 1900년 일본도 포경계약을 따내고 러시아와의 고래잡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한반도 연안의 고래를 독식했다.
동양포경주식회사 포경선의 고래 포획 장면(왼쪽)과 대청도에 있던 동양포경주식회사 사업장. /유동현씨 제공
1909년 일제는 동양포경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울산·대흑산도·거제도 등에 사업장을 설치했고, 이어 1915년에 옹진군(당시는 황해도) 대청도 선진포에 어업기지를 확장했다. 대청도에는 고래잡이배들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방파제와 선착장이 만들어졌다. 이 시설들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1920년대 말까지 대청도에는 '고래 파시(波市)'가 형성됐다. 매년 포경선 대여섯 척이 대청도 선진포에서 출항했는데 서양인 전문 포수를 고용한 포경선도 3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일본포경협회 통계부에 의하면 1926년 조선에서 참고래(Right Whale) 122마리를 포획했는데 대청도에서 60마리를 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지구상의 생물체 중에서 가장 몸집이 큰 대왕고래(Blue Whale)도 주로 대청도 인근에서만 잡혔다. 그만큼 대청도는 우리나라 포경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포경업은 고래를 잡는 것만 얘기 하는 것이 아니다. 옹진군지(誌)에 의하면 '포경장(捕鯨場)'이라 불리던 작업장에는 인양장, 해부장, 제유장, 염장장, 오물처리장, 냉동·냉장 시설, 기관실 등을 비롯해 사무실, 숙사, 창고 등이 한데 모여 있어 하나의 공장 같은 모습을 띠고 있었다. 여기에 포경선에 연료와 식료품을 납품하는 가게들이 선진포 주변에 즐비해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고 돈이 넘쳐났다. 특히 11월에서 4월까지의 포경기에는 120~130명의 일본인과 조선인이 대청도로 들어왔다. 이들과 함께 웃음과 몸을 파는 게이샤들도 따라 들어왔다고 한다.
1920년대 참고래 가격은 1마리에 최소 5000원이었다. 이는 당시 쌀 300가마 정도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고래 한 마리면 선원 열두 명의 1년치 임금과 배 기름값을 제하고도 선장은 커다란 돈꾸러미를 어깨에 메고 집에 돌아갈 만큼 풍족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고래는 '바다의 로또'다.
흉어기일지라도 전국 고래 포획량의 20%가량을 차지했던 대청도의 어획량은 30년대 중반부터는 10% 아래로 급격하게 떨어졌다. 숫자만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가격도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이는 남획으로 인한 어획량 감소뿐만 아니라 석유개발과 세계 공황의 여파로 고래 수요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대청도의 포경업도 된서리를 맞았고 결국 포경회사는 주력 기지를 대청도에서 대흑산도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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