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06. 14
두산이 잘 나간다. 현재 2위다. 꼴찌후보로 꼽혔던 팀이다. 지난해 7위였던데다 주전 외야수 정수근까지 자유계약선수로 팀을 떠났다. 거물급 외국인선수가 보강된 것도 아니고 대형 신인이 입단하지도 않았다. 눈에 띄는 전력 상승요인이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야구 관계자가 두산을 하위권으로 여겼다.
삼성도 당장 하위권으로 떨어질 것 같았던 팀이다. 타선의 간판이었던 이승엽과 마해영이 팀을 떠나 무게가 허전해진 느낌을 줬다. 지난해 성적으로 따져 홈런 94개(이승엽 56, 마해영 38), 타점 267개(이승엽 144, 마해영 123)나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4위를 달리며 비교적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상위권으로 꼽혔던 기아(5위)와 SK(7위)는 부진하다. 지난해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었던 두 팀이다. SK는 한국시리즈까지 올랐던 전력에 이상훈을 보탰고, 기아는 지난해 정규시즌 2위의 전력에 마해영.심재학 등 대형타자들을 보강했다. 그런데도 눈에 띄는 전력 상승효과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쯤에서 "야구는 이름으로 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되새기게 된다. 스타플레이어가 많다고 팀 성적이 꼭 좋으란 법은 없다는 의미다. '나'를 앞세우는 경향이 팀 분위기를 주도할 때, 개인성적은 어떨지 몰라도 그 팀의 성적은 아래로 곤두박질치게 된다는 것을 곱씹게 된다. 그래서 메이저리그의 명장(名將) 토미 라소다는 "관중을 의식하고 야구를 하면 얼마 가지 않아 관중석에 앉아 야구를 보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두산의 신임사령탑 김경문 감독은 지난해 말 지휘봉을 잡자마자 팀 분위기를 해쳤던 두명의 주전급 선수를 '정리'했다. 지난해 경기 도중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더그아웃에서 치고받았던 선수들이다. 김 감독은 "당시 코치로서 두 선수의 행동을 볼 때 결코 팀에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우수한 선수라도 팀을 위해 참아야 할 상황이었다. 지금은 그때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다른 팀에서 열심히 뛰고 있어 다행"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을 정리하면서 두산의 팀 분위기는 달라졌다. 나를 앞세우면 팀을 떠나야 한다는 경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남은 선수들은 팀을 떠난 두명처럼 스타는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를 배려하고, 팀을 위해 희생하면서 자연스럽게 뭉쳤고 팀 순위는 올라갔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명문구단 뉴욕 양키스 유니폼에는 등번호만 있을 뿐 선수들의 이름이 없다. 전통의 줄무늬 홈 유니폼에 새겨진 글씨라고는 뉴욕을 상징하는 이니셜 'NY'가 전부다. 유니폼에 이름을 새기지 않은 것이 전통이 됐고, 팀의 상징이 됐다. 양키스가 고수하고 있는 그 '이름 없는 정신'은 '우리는 내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뉴욕을 빛내기 위해서 뛴다'라는 무언의 메시지일 수 있다.
전쟁은 지략가와 장수가 이끌지만 싸움은 전장의 무명용사들이 한다. 그리고 무명용사를 자청하는 사람이 많을 때 그 전쟁을 이길 수 있다. 올 시즌 두산과 삼성이 보여주고 있는 호조는 그런 무명용사 정신의 발현이다.
이태일 / 야구전문기자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