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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장 와신상담
범장천은 잠시도 쉬지 않고 춤을 추다가는 방안을 왔다갔다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에게 수청을 드는 시녀들은 처음에는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나 여러 날이 흘러가자 싫증이 나서 날로 등한해졌다.
범장천은 이젠 개방 총부 안에서는 아주 자유로워져 그 안에서라면 어디든 마음대로 쏘다닐 수 있었다. 개방 사람들은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도 범장천은 자기 방에서 또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동쪽 비탈진 골목길, 골목 옆에 돌다리 있고, 돌다리 곁에……."
노래를 부르고 부르다가 범장천은 일순 얼떨떨해졌다. 주위는 너무나 조용했다. 그는 얼른 바깥으로 나와 보았다. 밖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그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걸었다. 그리고는 삽시에 얼굴이 굳어지며 재빠르게 흑의를 두르고 천으로 얼굴도 가렸다. 철장방 복색이었다. 그는 옷을 갖춰 입자 모기장을 드리워 놓고 그 속에 베개를 놓은 뒤 이불을 덮어 마치 사람이 자고 있는 것처럼 가장해 놓고 총총히 밖으로 나왔다.
범장천의 손자는 작은 방에 들어 있었는데 개방의 두 시녀들이 보살피고 있었다. 시녀들은 범 공자라고 깍듯이 대해 주었다. 그러나 범 공자는 그저 묻는 대로 대답하고 시키는 대로 할 따름이었다. 시간이 흘러가자 이 두 시녀들은 범 공자와 잠을 자려고 한껏 교태를 부리며 그에게 몸을 휘감았다. 그러자 범 공자는 겁이 나서 숨도 바로 내쉬지 못하고 그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몸을 까딱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두 시녀는 그의 곁에 바싹 달라붙어 온몸을
더듬고 허튼소리를 해댔다. 그는 전전긍긍하기만 할 뿐 도무지 취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밤에는 범 공자가 꿈을 꾸었다. 동사조항 골목에 있는 집이 나타나고 온 식구들이 참살당하는 모습이 꿈속에서도 생생하게 펼쳐졌다. 범 공자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는 뛰쳐 나가려다가 옆에 있는 시녀의 품속에 안기고 말았다. 그 시녀는 따뜻한 말로 위안해 주었다. 범 공자는 엉엉 울면서 그때부터 이 두 시녀들한테 꼭 달라붙어 더는 다
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깊은 밤이었다. 범 공자는 한창 젊은 나이라 밤 일을 즐기기 시작하자 이젠 일찍 자는 법도 없었다. 그와 두 시녀가 모두 자지 않고 있는데 삐꺽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쓱 들어섰다. 그는 재빨리 문을 잠그고는 범 공자가 누워 있는 침대머리로 왔다. 그 사람은 밤에 움직이기 수월하라고 그랬는지 온통 새까만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게 가리고 있었다. 손에 오용(烏龍)철장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철장방 사람임에 분명했다.
범 공자가 놀라서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요? 어쩔 셈이오?"
그 사람을 보자 범 공자는 동사조항 골목에서 벌어졌던 그 참상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는 철장방으로 위장하고 끝끝내 자기를 죽이려고 다시 찾아온 것이리라. 시녀들은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며 소리를 질러댔다.
"당신은 철장방 사람이죠? 도대체 어쩔 셈이죠? 구 방주님이 두렵지도 않아요?"
그 사람은 아무 대꾸도 않고 침대머리에 앉더니 오용 철장으로 한 시녀의 어깨를 가리켰다. 눈결같이 새하얀 계집의 어깨에 새까만 오용 철장을 들이대자 소름이 끼치도록 섬뜩했다. 시녀는 겁에 질려 찍소리도 못했다. 그 사람은 급히 두 시녀의 대혈을 눌렀다. 범 공자는 그 사람이 두 여인의 혈도를 누르는 것을 보고 자기를 죽이려는 줄 알고 벌벌 떨며 외쳤다.
"네 놈은 기어코 우리 범씨 가문 가솔들을 다 죽이려 드는구나. 네 놈이 나를 죽인다면 네 놈도 참살을 면치 못하리라."
그 사람은 아무 대꾸도 없이 한 장으로 한 시녀의 사혈(死穴)을 들이치고 다른 한 장으로 다른 시녀도 처치했다. 범 공자는 그자가 지독하게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고 성이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지독한 놈이구나, 죽이겠으면 죽여라. 난 두렵지 않다."
그러나 그 사람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침대에서 범 공자의 의복을 주워 들어 그에게 던져 주었다. 어서 옷을 입으라는 뜻이었다. 범 공자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일단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범 공자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철장을 틀어쥐었다. 그런데 범 공자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은 의외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심 아주 격동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천천히 뜨락으로 내려섰다. 개방 사람들을 만날까 봐 두려워 그 사람은 범 공자의 손을 잡고 벽 쪽으로 바싹 다가가 범 공자를 안고 담벽 위로 훌쩍 뛰어올라 바깥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범 공자를 데리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렇게 뛰었는지 모른다. 사내는 한 자그마한 거리에 이르렀다. 이곳은 바로 일점지 나장태의 구역이었다. 밤이었으나 거리엔 등불이 환히 밝혀 있어 대낮같이 밝았다. 주정뱅이와 도박꾼들이 여기저기서 주사위를 던지거나 환담을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일점지 나장태를 찾아 주시오."
술에 취한 사람은 그 말에 취기가 말끔히 가셨다. 주사위를 던지던 도박꾼도 천천히 주사위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두 사람이 앞뒤로 둘러쌌다.
"그댄 철장방 사람인데, 우리 맏형님을 왜 찾나?"
그러자 그 사람은 매우 다급하게 말했다.
"알릴 일이 있어 그러우! 빨리 찾아 줘요!"
"여섯째, 가서 큰형님한테 알리게. 철장방 사람이 만나잔다고."
한 사람은 먼저 뛰어가고, 한 사람은 이 사내와 잔뜩 겁을 집어먹어 초주검이 된 어린 소년을 데리고 뒤따라갔다. 잠시 후 그 사람은 범 공자를 데리고 일점지 나장태 앞에 섰다. 일정지 나장태는 그들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
"그댄 철장방 사람인가?"
그러자 그 사람은 머리를 끄덕였다. 나장태는 또다시 물었다.
"이 아이는 누군가?"
그러자 흑의의 사내는 말했다.
"이 소년은 범 공자입니다."
"알 만하군. 그대의 철장방에서는 이 아이를 죽여 버리고 싶지만 감히 죽이지 못하겠으니 나더러 죽이라고 데려온 게로군!"
그러자 흑의 사내는 고개를 내흔들었다.
"누가 이 사람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범씨 가문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은 게 불쌍하여 당신에게 구해 달라고 데려온 겁니다."
"그댄 나를 퍽 신임하는구먼."
흑의 사내는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범 공자를 그곳에 남겨 둔 채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발걸음을 뗐다. 그가 문 어귀에 이르렀을 때 홀연 일점지 나장태가 소리쳤다.
"범장천, 그래 이렇게 왔다가 그냥 갈 참이오?"
흑의 사내는 멈춰 섰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일점지 나장태를 이윽히 바라보았다.
"그대는 내가 범장천인 걸 어떻게 아셨소?"
일점지 나장태는 껄껄 웃었다.
"당신은 남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날 속일 수야 없지. 당신은 손자를 나한테 맡기면서 두렵지도 않소? 내가 이 애를 미 방주한테 보내면 어떻게 할 참이오?"
그러자 흑의 사내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장태, 그대가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나도 당신을 알고 있소."
범장천은 나장태와 더 얘기하려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범장천의 손자는 얼이 빠져 있다가 이 흑의 사내가 바로 자기의 할아버지인 것을 알아차리고는 냉큼 뒤돌아서 쫓아가려 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러나 일점지 나장태가 가로막았다. 범 공자는 겁먹은 얼굴로 눈망울을 굴리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일점지 나장태 역시 범 공자를 바라보면서 그저 되뇌기만 했다.
"범장천, 범장천……."
그는 범 공자에게 범장천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즉시 일곱째와 아홉째를 불렀다.
"일곱째, 아홉째, 지난번 그 일로 셋째가 죽었다. 오늘 이 일도 그때처럼 위험한 일이야. 오늘은 자네들이 그 일을 맡아 줘야겠다. 잘못하면 죽게 될지도 몰라. 각별히 조심해야 하네."
그들 두 사람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확연하였다.
"이 소년은 범 장로의 손자인데 자네들이 홍칠공한테 데려다 맡겨야겠네. 그저 맡기고만 오면 되네."
그들 두 사람은 두말없이 범 공자를 데리고 떠났다.
세 사람은 거리에 나서서 발걸음을 다그쳤다. 이곳에서 홍칠이 있는 곳까지는 아주 멀었다. 세 사람이 한참 걸어가고 있노라니 누군가가 뒤에서 쓴웃음을 지으면서 소리쳤다.
"어딜 그리 급히 가나. 밤이 어두운데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그러자 또 한 사람이 소리쳤다.
"유감스럽군. 범장천이 아무리 교묘하다 해도 그 여인의 눈길을 벗어날 수는 없는 거야."
일곱째와 아홉째는 범 공자의 손을 잡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네 놈은 누구냐? 어서 모습을 나타내라!"
"어서 나오지 못할까?"
일곱째가 한마디 외치자 아홉째도 연이어 소리쳤다.
그러자 과연 눈앞에 네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흑의를 걸친 철장방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너희들은 모두 일점지 나장태의 수하이지? 너희들은 순순히 놓아주겠다만, 그 어린 놈은 죽여 버려야겠어! 너희들 두 놈은 알아차리고 어서 썩 꺼져!"
일곱째와 아홉째는 쓴웃음을 지었다. 맏형님이 예측하던 일이 과연 틀림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두 사람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철장방 네 놈들의 거동만 주시했다.
철장방 놈들 중에서 또 한 자가 외쳤다.
"네 놈들이 물러가지 않겠다면 어디 이곳에서 한번 죽어 봐라!"
그자는 소리를 지르면서 일곱째한테 장을 날렸다. 일곱째는 그자가 덤벼드는 것을 보자 급히 맞받아 싸웠다. 그 철장방 놈의 무예는 일곱째보다 좀 못했다. 다른 쪽에서 또 한 놈이 덤벼들었다. 두 놈이 일곱째와 싸우는 것을 보고 아홉째가 노하여 소리쳤다.
"철장방 놈들아, 주먹을 받아라!"
네 사람이 한데 엉켜 결사전을 발였으나 좀처럼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다른 한켠에 있던 두 놈이 징그럽게 웃으며 범 공자한테 다가들었다.
"요 쌍놈의 새끼야, 먼젓번엔 널 놓아주었는데 내가 무예가 모자라서 놓아준 줄 아는 모양이로구나. 그때는 나으리의 명을 받들어 일부러 네 놈 목숨을 건져 준 것이었다. 범장천이란 녀석이 개방을 위해 일을 더 잘하게끔 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렇지 않았던들 네놈도 이미 네 놈 일가와 함께 저승에 가 있을 몸이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팍 하며 장을 내밀었다. 범 공자의 무예로는 개방 중의 보통 거렁뱅이와 싸운다면 그래도 이길 가망이 좀 있지만 이런 고수들과 맞선다면 채 한 합도 겨루기 전에 나가떨어지고야 말 것이었다. 그자가 장을 휘두르면 그대로 얻어맞을 수 밖에 없게 된 형편인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큰소리로 외쳤다.
"냉큼 그 손 놓지 못할까!"
두 사람이 머리를 돌려 보니 뒤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온통 철장방의 흑의를 걸치고 오른손에는 오용 철장을 틀어쥐고 있었다. 철장방 놈들이 대뜸 외쳤다.
"범장천, 네 놈이 감히 나왔으면 다시는 숨어 다닐 필요가 없다!"
그들 두 사람은 눈길을 주고받더니 한 놈은 범장천에게 달려들고 한 놈은 범 공자한테 달려들었다. 철장방 놈들은 악독한 놈들이었다. 그들 두 놈은 일단 범장천이 나타난 이상 버티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먼저 이 범 공자를 죽여 버리지 않고서는 후에 다시 기회를 얻기가 어렵겠다고 타산하여 한 놈은 범장천을 막고 한 놈은 범 공자를 죽이기로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처 달려들기도 전에 범장천이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손에 들었던 암기를 뿌렸다. 암기는 윙윙 소리를 내면서 개중 한 사내의 등허리로 날아갔다. 그자는 멈칫하며 얼른 암기를 피했다. 바로 그 순간에 범장천은 철장으로 놈의 등허리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그러자 그는 땅바닥에 털버덕 쓰러져 버렸다. 범장천은 손자를 향해 소리쳤다.
"빨리 도망치거라!"
그는 고함을 지르는 한편 법 공자한테 달려들려 하는 철장방 놈에게 덮쳐 들었다.
철장방 놈들은 워낙 넷이었는데 뜻밖에도 그중 한 놈이 범장천의 철장에 맞아 상하자 셋이서 법장천, 일곱째, 아홉째를 대적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힘이 부쳤다. 한편 범장천과 싸우게 된 이자들은 바로 그의 가족을 죽인 놈들이었다. 범장천은 방금 이 사내들이 손자에게 그 말을 하는 걸 들었는지라 목숨을 내놓고 결사적으로 덤비고 있었다. 그는 이 세 놈을 마저 죽여 버리고 자기도 함께 죽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범 공자는 범장천의 외침 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도망을 치다가 급히 생각했다.
'내가 이 집에 숨으면 저 놈들이 날 찾지 못할 것이다.'
범 공자는 담장 위로 기어올랐다. 그 담장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그가 오르기엔 버거웠다. 그는 그만 담장에서 발을 헛디뎌 쿵 소리를 내며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누구냐?"
집 안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범 공자는 감히 찍소리도 못하고 살금살금 뒤꼍으로 기어가 까딱 않고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범장천과 아홉째, 일곱째 세 사람은 철장방 세 놈과 백여 합이나 싸웠다. 그쯤 되자 철장방 쪽이 밀리기 시작했다.
"목숨을 내놓아라!"
범장천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맞서 있는 철장방 놈의 어깨를 와락 끌어당겼다. 이 오용 철장은 신축성이 대단하여 일단 그 끝에 그 놈의 어깨가 틀어 잡히자 철장 끝이 안으로 모아지면서 어깨 살속 깊숙이 박혀 버렸다. 범장천은 철장을 잡아당겨 그자를 자기 앞으로 끌어 오는 동시에 다른 한 장을 들어 그자의 어깨를 힘껏 내리쳤다. 어찌나 심하게 내리쳤던지 오용 철장은 그 놈의 어깨에 더욱 깊숙이 박혔다. 범장천은 눈에 불꽃이 튀었다. 눈앞에 동사조항 돌다
리 옆 집이 번갯불 번쩍이듯 언뜻 언뜻 스쳐 지나갔다. 그는 벽력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연거푸 장을 내밀어 그자의 가슴을 가격했다. 놈은 울컥울컥 피를 토하더니 고꾸라지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범장천은 바드득 이빨을 갈며 혼신의 힘으로 그자의 등판을 내리찍었다. 놈은 찍소리도 못하고 사지를 뻗어 버렸다. 범장천은 뻗어 버린 놈에게 침을 퉤 뱉고는 또 한 놈에게 덤벼들었다. 철장방에서 남은 두 사람은 일곱째, 아홉째와 싸우는 것만 해도 힘이 부치는데 범장
천까지 달려드니 사태가 기울어진 것을 깨닫고 도망하려 했으나 도망할 틈이 없었다.
범장천은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마구 덮쳐 들었다. 그는 자기가 얻어맞을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대로 돌진해 들어 갔다. 그러자 철장방 놈들은 당황해서 연거푸 실수를 하였다. 이 두 놈은 그대로 장을 얻어맞아 내력이 상하고 말았다. 뒤이어 일곱째와 아홉째의 주먹질과 발길질에 얻어맞아 땅바닥에 거꾸러졌다. 범장천이 외쳤다.
"저 놈들을 죽여 버릴 테다!"
두 사람이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그는 그대로 달려나가 두 놈들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들이댔다. 그 두 놈은 그 자리에서 널브러졌다. 범장천의 심상찮은 기색에 일곱째와 아홉째는 놀라서 서로 마주보았다. 범장천의 모양새로 봐선 그는 영락없이 실성한 사람이었다.
그즈음, 가짜 미립은 오두마니 등불을 켜 놓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가 황궁에서 성은을 담뿍 받으며 행복하게 지내던 때를 회상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황궁에서 황제가 한창 여아와 놀아나고 있는 장면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구인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이를 두지도 않은 채 점점 더 문 두드리는 소리가 커지자 여인은 퉁명스레 외쳤다.
"들어와욧!"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뛰어들어왔다. 그 사람, 그 사람은 뜻밖에도 실성해서 반병신이 다 되었던 범장천이었다. 그는 흑의를 걸치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여인을 노려 보면서 노래를 불렀다.
"동쪽 비탈진 골목길, 골목 옆에 돌다리 있고, 돌다리 곁에……."
그는 비틀거리며 여인한테로 다가왔다. 거동을 보니 완전히 실성한 상태였다. 여인은 아무 방비도 않고 그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그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녀는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
"범 장로, 절 죽이고 싶으면 그냥 죽일 거지 하필 미친 척할 건 뭔가요?"
그 말에 범장천은 멈칫했다. 그리고는 금세 눈빛을 바꿔 사납게 여인을 쏘아보았다.
"그래 맞아, 난 미치지 않았다. 난 네 년을 죽일 생각으로 매일 밤잠을 설쳤다. 네 년은 오늘 내 손에 죽어 줘야겠다!"
여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웃는 낯으로 범장천을 바라보았다.
"범 장로, 당신이 날 죽이고 싶다 해서 죽일 수 있을 것 같나요? 참말 불쌍하군요. 그대는 이 길로 당장 도망가서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럼 죽음은 면할 수 있지요."
범장천은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네 년은 우리 온 가족을 죽이고서 그걸 홍칠공에게 덮어씌우고, 일점지 나장태에게 덮어씌웠다. 내가 네 년의 껍질을 벗기고 고기를 씹어 먹겠다."
여인은 대수로이 여기지 않고 그를 건너다 보았다.
"역시 빨리 가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나 그는 코대답도 않고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 오용 철장을 치켜 들고 여인의 동가슴을 향해 힘껏 찔러 갔다. 그는 이 여인을 죽일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의 마음속에선 증오심이 활활 불타 올랐다. 바람소리가 허공을 가르자 그 여인도 훌쩍 몸을 피하고는 맞서 대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예로는 결코 범장천을 따를 수 없으니 그녀는 연신 뒷걸음질만 쳤다.
범장천은 미친 듯이 공격만 하였다. 그는 숨돌릴 사이 없이 삼십여 합이나 공격을 들이댔다. 여인은 벽 모서리로 밀려갔다. 이제 철장을 한 번만 휘두르면 그녀의 목숨은 없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범 장로, 이제 그만두세요. 만일 계속 싸우게 되면 당신은 필시 이곳에서 죽게 돼요."
여인은 갑자기 탄식하듯 소리쳤다. 범장천의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철장을 높이 치켜 들었다.
"범 장로, 전 당신이 꼭 오리라는 걸 이미 짐작하고 구 방주님더러 절 돕도록 청해 놓았어요. 그분은 지금 당신 뒤에 서 있어요. 믿어지지 않으면 뒤를 돌아다보세요!"
'이 년은 참말 요사스럽구나. 내가 네 말을 들을 줄 아느냐?'
하지만 범장천은 아주 세밀한 사람으로 일거일동도 신중히 타산하고 행하는 사람이었다. 세밀한 사람들이란 의심이 많은 법이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닌게아니라 정말로 구천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등뒤에 버티고 서 있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은 건 너의 미 방주가 너를 처치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개방에 장로가 둘밖에 남지 않았는데 네가 죽으면 나장태 홀로 남게 되겠군!"
구천인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한껏 이죽거렸다. 범장천은 삽시에 남색이 창백해졌다.
'보아하니 복수하기도 어렵게 되었구나.'
구천인이 이곳에 있는 이상 이 여인이 자기 손에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범장천은 탄식을 하면서 구천인 쪽으로 돌아서서 웃는 낯으로 말했다.
"구 방주님이 오셨으니 내가 그대로 포박을 당하리다."
"암, 그래야지."
구천인은 오만하게 말했다. 범장천은 오용 철장을 땅바닥에 집어 던지고는 천천히 구천인 쪽으로 다가갔다. 구천인을 대적해 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쪽을 택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다소곳이 구천인 쪽으로 걸어가던 범장천은 일순 뒷발질로 오용 철장을 공중으로 퉁겨 올렸다. 오용 철장은 곧바로 범장천의 손으로 떨어졌다. 철장이 손에 잡히자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구천인의 머리를 내리깠다.
"범장천, 네 놈이 나와 싸우려 드니 허튼 짓이 아니고 뭐냐?"
구천인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으나 부릅뜬 눈으로 범장천을 쏘아보기만 할 뿐 팔짱을 긴 손도 풀지 않았다. 범장천이 오용 철장으로 연거푸 예닐곱 번이나 공격했는데도 구천인은 미동도 안 했다. 뿐더러 그의 몸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그러자니 범장천은 그만 투지가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대수로이 여기지 않고 외쳤다.
"구천인, 네 놈을 죽이지 못하고서야 어찌 한을 풀겠느냐?"
그러자 구천인은 웃음을 질질 흘리며 한쪽 손만 내밀어 장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저 살짝 장을 날렸을 뿐인데도 그의 장법은 아주 교묘하여 상대방한테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았다. 범장천은 내밀었던 장을 끌어 당겼다가 다시 공격하려 하였으나 장을 이동시키는 속도가 늦어 구천인한테 철장을 잡히고 말았다.
"손을 놓아라!"
구천인이 소리를 질렀다. 범장천도 맞받아 외쳤다.
"구천인, 내 네 놈과 생사 판가름을 하리라!"
"범장천, 네 놈은 당장 죽게 되었는데도 이다지도 완고하냐? 그럼 어디 죽어 보아라!"
구천인은 한마디 내뱉고는 장을 들어 범장천의 머리를 가격하려 했다. 이 한 장에 범장천의 목숨은 없어지게 될 판이었다.
그때였다. 여인이 갑자기 소리쳤다.
"잠깐만! 손을 멈추시오!"
구천인은 머리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범장천을 죽일 생각이 없음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구천인은 범장천의 혈도를 눌러 놓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여인은 탄식하는 어조로 말했다.
"구 방주님, 당신이 절 구해 준 걸 아주 감사히 생각해요. 제가 범장천과 이야기를 나눠 보겠어요."
구천인은 웃으면서 가 버렸다. 여인은 자리에 앉아 범장천에게 말했다.
"범 장로, 당신이 절 미워하고 죽이려 하는 걸 전 나무라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하필 구 방주와 싸울 게 뭐예요? 당신이 그와 싸우게 되면 죽음밖에 없잖아요? 당신이 동사조항 골목 돌다리 옆집의 가족들이 비명에 죽은 일이 다 내가 한 짓으로 알고 절 뼈에 사무치게 미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하지만 제 보기엔 당신은 이곳을 떠나야 해요. 가서 홍칠공을 찾으세요. 모레 전 홍칠공과 결사전을 하게 돼요. 그때 누가 이기든 간에 승부가 날 테니 더는 범 장로
를 괴롭히고 싶지 않아요."
범장천은 속으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 여인이 자기를 조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이곳까지 찾아 들어 올 때엔 저 여인을 꼭 죽여 버리려고 온 것인데 그런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순순히 놓아 보낼 수 있단 말일가. 여인은 범장천이 자기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가벼운 웃음을 띄우며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시녀 둘이 달려왔다. 여인은 분부를 내렸다.
"너희들은 이 범 장로를 홍칠공에게 모셔다 드려라. 그리고 홍칠공에게 나는 이 범 장로를 해치고 싶지 않다고 전해라."
그 두 시녀들은 명을 받고 범장천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범장천은 혈도가 눌려 꼼짝도 못하고 그저 시녀들이 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은 답답하여 터질 지경이었다.
두 시녀들은 문 어귀에서 범장천을 마차에 부축해 앉히고는 자기들 둘은 나란히 앞머리에 앉았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 사내가 어둠을 틈타 쥐도 새도 모르게 마차 안으로 살그머니 들어갔다가 금세 다시 땅으로 떨어져내려 반대편을 향해 사라져 갔다. 한순간 마차가 덜컹했으나 시녀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시녀들은 마차를 몰고 곧장 홍칠의 거처에까지 당도하였다. 홍칠의 거처에 이르자 개중 한 시녀가 말했다.
"뜨락 안에 있는 분들은 들으세요. 미 방주께서는 범장천을 이곳으로 보내셨어요. 그분은 범 장로를 해칠 생각이 없으시대요."
이 두 시녀들은 마차에서 내려 나는 듯이 도망을 갔다. 무슨 변고라도 생길까 봐 몹시 겁이 났다.
나대통과 노유각이 앞장서서 뛰쳐나왔다. 사람은 간데없고 마차만 하나 달랑 서 있었다. 무슨 계략일지도 몰라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 나대통은 마차를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범장천이 마차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대통은 놀라는 한편 의심되어 크게 소리질렀다.
"마차를 뜨락으로 끌어들여라!"
마차를 뜨락 안으로 끌어들이자 홍칠과 사개 정원, 소미타 추우 세 사람이 달려 나왔다. 나대통이 홍칠에게 사정을 고했다.
"범 장로께서 오셨구먼. 어서 마차에서 내리시도록 하게."
홍칠은 반색을 하며 외쳤다. 나대통, 노유각은 마차 문을 열고 범장천에게 말했다.
"범 장로, 내리십시오."
하지만 범장천은 두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손 하나 까딱 안 했다. 홍칠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범 장로는 미쳤으니 지금 정신이 똑똑하지 못할지도 몰라. 그러니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을걸.'
홍칠은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범장천의 손을 잡고 말했다.
"범 장로, 어서 마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그러나 홍칠이 그의 손을 잡아 끌자마자 그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자세히 보니 범장천은 이미 숨이 넘어가고 난 뒤였다.
모두들 깜짝 놀라며 범장천의 시체를 마차에서 들어 내렸다. 그의 기색을 살피니 적이 격분한 형색이었다. 다시 몸을 살펴보니 가슴에 장을 얻어맞은 치명적인 흔적이 있었다. 범장천이 어찌하여 이처럼 치명적인 일격을 고스란히 받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들 의견이 분분하였다. 나대통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기필코 그 지독한 년 짓입니다. 범 장로를 죽여 가지고 우리 개방에 보낸 거지요. 결전을 앞두고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뜻으로!"
모두들 생각이 그쪽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범장천은 생각이 아주 찬찬한 사람인데 드디어는 이처럼 어이없이 당하고 마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모두들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일점지 나장태는 예의 그 의자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숱한 생각으로 머리 속이 어지러웠다.
"소씨 거렁뱅이는 이상한 사람이야. 하필 이런 걸상에 앉는단 말인가? 그 사람은 이 걸상에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서 이 걸상이 불편하다는 걸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그는 웬지 그것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한순간, 소리도 없이 두 사람이 그 앞으로 다가섰다. 일곱째와 아홉째였다. 일점지 나장태는 묵묵히 이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일곱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맏형님, 그 네 놈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 네 놈이라니?"
나장태는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우리 둘은 범 공자를 데리고 가다가 도중에 철장방 놈들하고 맞닥뜨렸습니다. 그 네 놈들의 무예는 결코 허투로 볼 게 아니라서 우리 둘의 힘에 부쳤습니다. 이때 범장천이 나타나 우릴 도왔기에 그 네 놈을 몽땅 해치워 버렸습니다."
일점지 나장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자네들은 가서 좀 쉬게."
두 사람은 읍을 하고는 조용히 물러나갔다. 두 사람이 나간 후 일점지 나장태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생각을 굴렸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는 내내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한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일곱째와 아홉째가 황급히 달려 들어와 더듬거렸다.
"맏형님, 그, 그녀가…… 옵니다. 그녀가……."
두 사람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인은 벌써 들이닥쳤다.
"나 장로, 듣건대 나 장로 수하에는 형제들이 많고 재간도 퍽 뛰어나다고 하던데 오늘 보니 과연 그렇군요."
여인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들어서서는 나장태 맞은편으로 똑바로 걸어왔다.
"나 장로는 대단히 재미있는 분이군요. 밤에도 주무시지 않고 그 낡아빠진 의자에 앉아 뭘 하시는 건가요?"
나장태는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두 눈을 휘둥그래 뜬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이 여인은 이 늦은 시각에 왜 이곳을 찾은 것일까……."
아무리 해도 짚이는 바가 없었다.
"나 장로, 듣자 하니 소씨 거렁뱅이가 낡은 의자 한 개를 홍안루 주방에 갖다 놓고 거기에 앉아 수십 명 요리사들을 지휘하였다고들 하던데 평소 그는 미치지 않았다면 좀 괴짜 같은 사람이었군요. 후에 들은 바로는 누가 이 의자를 은자 서른 냥을 주고 사 갔다고 하더니만 알고 보니 바로 나 장로이셨군요."
여인은 의자를 가리키며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나 장로가 이 의자를 산 일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나장태는 여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 년이 귀신같이 간사한 년이란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만 이 한밤중에 왜 여기까지 왔는지 정말 모르겠구나.'
나장태는 그녀 뒤에 구천인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구천인은 쌀쌀한 기색으로 방안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여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 장로, 당신이 내 심사를 아신다면 당신은 다시는 그 의자에 앉으려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나장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여인은 또다시 가벼이 탄식했다.
"전 워낙 개방 방주 노릇을 하면 아주 멋지고 위풍이 있게 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정작 해 보니 생각과 다르더군요. 매일 시끄러운 일들이 수도 없는데다가 개방 사람들이란 모조리 게으르고 제멋대로라서 그들에게 말을 듣게 한다는 건 얼마나 힘든지……."
일점지 나장태는 이 여인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더욱이 그녀의 말에 어떻게 대꾸해야 좋을지 정말 알 길이 없었다. 밖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죽이고 엄숙하게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문 가까이에 계집애 열이 저마다 손에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보아하니 그 계집애들은 집 밖에 있는 개방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동안에 많은 개방 사람들이 잠이 깨어 이 집 문 앞에 모여든 것이었다. 집 안에 있는 나장태가 한마디 호령
을 하기만 하면 이 사나이들이 달려들어 열 명의 계집애들쯤은 얼마든지 처치할 수 있었다.
"나 장로, 난 대사가 있어 당신과 상논하러 왔어요. 당신은 수하 형제들을 좀 멀찌감치 물리는 게 어때요?"
일점지 나장태는 쌀쌀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번개같이 한 생각을 떠올렸다.
'이 여인은 계집애들을 데리고, 심지어는 철장방 방주 구천인까지 달고 왔다. 이 여인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필시 날 해치려 드는 것일 게다.'
일단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장태는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
"방주께선 나와 무슨 일을 상논하려는 거요?"
"나 장로께서 저의 생각을 아시게 되면 아주 기뻐하실 거예요. 전 암만 생각해 봐도 제가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야만 하겠어요. 그리하여 다시는 당신네 개방 일에 참견하지 않기로 작심했어요."
나장태는 그녀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개방 방주 자리를 빼앗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 쓰던 여인인데 어떻게 이렇듯 쉽사리 방주 자리를 내놓을 수 있겠는가?
"전 심사숙고하여 이 일을 나 장로한테 말씀드리는 거예요. 전 황궁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것은…… 거기에…… 절 생각하는 분이 있기 때문……."
나장태는 반신반의하였다. 그는 군말하지 않고 그저 여인을 지켜 보기만 했다.
"나 장로, 전 이 녹옥죽봉을 당신한테 드리고 모레 홍칠과 결전을 치르기에 앞서 개방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개방 방주로 정했다고 선포할 참이에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모레 결전을 치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소만, 방주님, 그 말이 참말이오?"
나장태는 깜짝 놀라 외쳤다
"물론 참말이지요. 제가 왜 당신을 속이겠어요?"
그러자 나장태는 즉시 무릎을 꿇었다.
"방주님 은혜에 감사를 드리오. 방주님께서 날 이렇게 도와주신다면 난 영원히 방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거요."
"나 장로께서는 너무 예절을 차리시는군요. 전 참말로 이곳에 있는 걸 바라지 않아요. 전 황궁으로 돌아가야겠어요. 거기엔 참말로 절 아껴 주는 분이 계석요. 전 더 이상 그이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요."
그녀의 얼굴엔 홍조가 떠올랐다. 여인은 내처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다가 구천인의 기침 소리가 들리자 잠시 주춤하며 그 뜻을 알 만하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장로, 저와 구 방주님은 서로 약속한 바가 있어요. 개방은 금후엔 철장방의 분부를 들어야만 하는데 나 장로께선 그걸 원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러자 나장태는 큰소리로 얼른 대답했다.
"그러지요. 그러고말고요."
하지만 나장태는 기실 구천인의 분부를 들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일이 급하다 보니 부득불 일단 그렇게 대답한 것이었다.
"구 방주님, 많이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구천인은 건성으로 코대답을 하였다. 나 장로는 생각했다.
'구천인, 너무 콧대를 세우지 말게. 내가 개방 방주가 되기만 하면 조만간 네 놈을 처치할 테니.'
그는 비록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였지만 겉으로는 구천인의 분부를 잘 들을 것이며 조금도 어기지 않을 듯이 아첨을 하였다.
여인은 곧 소리쳐 사람을 불렀다. 그러자 시녀 하나가 녹옥죽봉을 가져다 여인한테 바쳤다. 여인은 그것을 받아 들고 말했다.
"개방 사람들은 누구나 이 녹옥죽봉을 대단하게 여기더군요. 나 장로, 이젠 당신의 소원대로 되었어요."
여인은 손에 들고 있던 녹옥죽봉을 나장태에게로 가져 갔다. 그런데 나장태는 머리를 낮추 숙인 채 두 손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 들었다가 한순간 갑자기 손을 탁 떨구며 말했다.
"방주님, 이렇게 해선 안 되겠소!"
여인은 의아했다. 그녀는 내심 나장태에게 녹옥죽봉을 건네 주어 모레 있을 홍칠과의 맞대결을 피해 보려던 심산이었다.
"나 장로,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씀이세요?"
"방주님, 이 일은 이렇게 처리해선 안 될 것 같소. 방주님이 이 자리를 넘겨받을 때에도 천하 72개 분타 타주들이 모두 한자리에 있지 않았소? 방주 자리를 계승하는 일은 개방에서 모든 사람이 다 알게 하여야만 하오. 좀더 격식을 차려야만 하겠소."
구천인은 한옆에서 냉소를 쳤다.
"내가 옆에 참관하고 있는데 무엇이 정중하지 않다는 겐가? 그래 그대의 72개 분타 타주들이 나만큼 중요하단 말인가?"
"구 방주님, 당신은 저한테 영광을 주신 분입니다. 하지만 개방 사람들이 선뜻 수긍하지 않으면 방주 자리는 온전치 못하게 됩니다. 게다가 모레 방주께서 홍칠과 결전을 치르신다는데 싸움이 끝나고 나서 방주 자리를 저한테 넘겨주는 게 좋겠습니다."
여인은 냉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나장태의 생각이 갑자기 달라진 원인을 대번에 짐작하였다. 나장태는 모레의 결전이 필시 큰 싸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일 지금 자기가 방주 자리를 넘겨받게 된다면 기필코 홍칠과 대립하게 되어 홍칠한테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방주 노릇이고 뭐고 끝장이 아닌가?
"나 장로의 말씀도 옳은 것 같군요. 그러면 나 장로께서 저의 싸움을 도와주어야겠어요.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방주 자리는 나 장로한테 넘겨드리지요."
"방주님의 생각이 지당합니다. 방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여인은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뜨락 안은 워낙 당장 싸움이 붙을 듯 험악한 분위기였으나 몇 마디 말이 오가고 나자 모든 적의는 사라져 버렸다. 여인은 천천히 걸어 나가면서 뜨락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나장태가 이곳 경도 임안에 거처를 잡고 있는 것이 적이 마땅치 않았지만 더는 아무 말도 않고 고개만 저으면서 가 버렸다.
여인은 방안에 들어와 자리에 앉아서 구천인한테도 자리를 권했다. 구천인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나장태란 녀석은 우리와 한마음 한뜻이 아니오. 그 놈은 그대를 해치려 하고 있소. 방주 자리를 물려받고 싶어하면서도 종당에 가서는 또 주견을 바꾸니 심사가 지독한 놈이란 말이오."
그러자 여인은 쌀쌀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그럼 당신은 제가 그자보다 못하다고 보시는가요?"
구천인은 씁쓰레하니 입맛만 다시며 아무 대꾸도 못했다.
여인은 조용히 탄식을 하였다. 그녀의 눈앞엔 최근에 황궁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황제란 사람이 치신머리없이 한 계집아이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그 계집은 그 노랫소리에 장단을 맞추며 큰 꽃병 위에 올라가 춤을 추던 광경이 선연히 눈앞에 보이는 듯싶었다. 황제가 여색에 빠져 조정의 일에는 관계치 않고 노래나 부르고 춤을 구경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자기는 험악한 강호에 뛰어들어 무엇을 했던가. 그 여인이 황제 앞에서 교태를 부리는 광경이
떠오르자 그녀는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구천인은 여인을 바라보면서 정색을 했다.
"대전이 눈앞에 닥쳤는데 그대는 기분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아 보이는군요. 내 보기엔 그때 구양 선생을 청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 홍칠이 놈과 싸우겠소. 그댄 앉아서 구경만 하시오."
그러나 여인은 머리를 저으면서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홍칠공을 죽이려면 구 방주님도 힘이 들 텐데 제가 제 재간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어요."
"그대가 나장태를 방주로 삼는다면 난 그자를 죽여 버리게 될지도 모르오. 난 그런 간악한 자를 제일 혐오하오."
여인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없었다.
'네 놈은 그자를 간악하다고 하지만 기실 너는 간악한 놈이 아니란 말이냐? 나장태가 방주 노릇을 하면 네 놈이 개방을 삼켜 버리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
하지만 여인은 속심을 털어놓지 않고 담담히 미소만 띠었다.
대전이 임박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무료감을 느꼈다. 홍칠은 집 안에서 내공을 연마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는 강룡십팔장을 능숙하게 터득하였는바, 거침없이 실전에 써먹을 수 있었다. 문 밖에서는 소미타, 사게, 나대통, 노유각 등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홍칠이 한참 내공을 연마하고 있는데 갑자기 휘파람 소리가 들려 왔다.
나대통과 정원이 소리쳤다.
"웬놈이냐?"
휘파람은 두 사람이 불고 있었다. 그 소리는 담벽 안을 오랫동안 메아리 치고서야 멎었다.
"저는 일곱째이고 이 사람은 아홉째입니다."
나대통이 맞받았다.
"무슨 일이오?"
"우리 맏형님께서 방주님을 만나겠다고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벌써 나장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난 홍 방주를 만나야겠소."
나대통과 노유각 등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나 안에서 소리를 듣고 홍칠은 벌써 뜨락에 나와 있었다. 그는 나장태를 보고 미소를 띠었다.
"내가 일찍 나 장로더러 돌아오라고 권고할 땐 대답도 않더니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오셨소?"
"방주께 알려야 할 일이 있소. 그 여인은 황궁으로 돌아갈 모양이오. 황제께서 그 여잘 여전히 총애하고 있는 듯했소."
홍칠은 잠시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안 했다. 나장태가 보니 범장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범 장로가 돌아왔다고 하던데 왜 보이지 않는 거요?"
삽시에 여러 사람들의 기색이 어두워졌다.
"범 장로는 돌아가셨소."
홍칠은 그저 짤막하니 대꾸했다.
"아니 그럴 수가…… 범 장로를 이곳으로 보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죽는단 말이오?"
홍칠은 범장천의 일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나장태는 끝까지 듣고 나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개방에서 일심으로 홍 방주를 도왔소. 노경을 들추어내고 또 범장천을 구해 낸 건 나의 자그마한 성의였소. 그런데 범장천이 이렇게 죽을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어느 놈 짓인지 밝혀 내기만 하면 내 손으로 죽여 버리겠소."
"내 보기엔 기필코 그 년이 한 짓이오. 그 년은 범장천이 일부러 미친 척하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어찌 가만히 놓아두려 했겠소? 범장천은 필시 그 년 손에 죽은 거요."
홍칠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따라오라는 듯 눈짓을 보내고는 앞장서 갔다. 나장태는 그를 따라 영당(靈堂)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처참한 심경으로 범장천의 영구를 바라보았다. 나장태는 개방이 비록 말썽은 많았지만 금의파와 오의파에 장로가 10명이나 되고 인재들이 우글우글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강호의 크고작은 파들이 모두 개방을 업신여기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모가 가장 뛰어나고 재간 있는 범 장로마저 죽었으니…….
나장태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범 장로, 왜 이렇게 죽는단 말이오? 금의파니 오의파니 하는 게 다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이오? 당신이 죽지 않았던들 개방을 위해 큰 공로를 세울 수 있지 않았겠소? 당신이 죽지 않았더라면 개방이 얼마나 흥성하겠는가 말이오!"
나장태는 큰소리를 질렀다. 그는 비 오듯이 눈물을 흘렸다. 범장천이 살아 있을 때 그와 나장태의 사이가 가장 나빴던 일을 모두들 기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걸핏하면 말다툼을 벌이고 방주 자리를 탐내며 서로 끊임없이 아귀다툼을 했었다. 그러나 정작 범장천이 죽자 나장태는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이 아닌가.
나장태는 다소 마음을 가라앉히고 홍칠을 바라보며 말했다.
"홍칠공, 당신이 방주가 되는 걸 나는 원치 않았었소. 하지만 당신이 그 여인과 싸워 이기게 되면 나도 당신이 방주가 되는 걸 원하게 될 수도 있소. 내가 당신을 수긍해야만 이 임안 분타도 당신을 방주로 천거할 수 있게 되는 거요."
사개 정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 장로, 우리도 당신이 수고한 걸 잘 알고 있소. 당신이 출수표 노경의 일을 알려 준 게 우리 개방에 큰 도움이 되었소. 당신도 그 여인한테서 떠나기를 권고하는 바이오."
나장태는 머리를 한 번 굽실 숙였다.
"아니오. 그렇게 해선 안 되오. 사람이 한두 번 잘못을 저지를 수는 있지만 세 번, 네 번 잘못을 저질러서야 안 되는 일이지."
나장태의 얼굴에선 결연한 의지가 감돌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나가다가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오로지 그 결전에다 모든 걸 맡길 뿐이오. 그때 내가 개방 여러분들께 죄를 짓게 될지도 모르는 일, 미리 말해 두는 바요."
나장태는 이 말 한마디만 남기고 표연히 나가 버렸다. 그가 떠나간 후 모두들 안타까운 심정으로 입을 모았다.
"나장태가 저처럼 고집스러운 걸 보면 일심으로 그 여인을 위하는 게 분명하오. 그 여인과 관계가 아주 깊을지도 모르오."
홍칠만이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고심암을 떠올렸으며 그 여인이 하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인은 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미립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했었다. 그 말을 떠올리자 홍칠의 마음은 느닷없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노완동은 너무나도 심심했다. 철장방의 자그마한 초가집에 갇혀 하루 세 끼 식사를 하는 것을 빼놓고는 하는 일이 없었다. 무료함에 견디기 어려워진 노완동은 집 안 땅바닥에 구멍 몇 개를 뚫어 놓고 유리알 치기를 하였다. 혼자서 하는 놀이라 왼손과 오른손을 편을 갈라 놓고 알 치기 시합을 하였다. 그리하여 오른손이 이기면 오른손으로 왼쪽 얼굴을 때리고, 왼손이 이기면 왼손으로 오른쪽 얼굴을 때리다가 중얼거렸다.
"개자식, 왜 이리도 몹시 때려, 자기 얼굴이 아닌감?"
그는 성이 나서 왼손으로 오른손을 때리고 오른손으로 왼손을 때렸다. 노완동이 오른손으로 왼손을 때리는데 오른쪽 장으로 들이치면 왼쪽 장으로 막는 것이었다. 두 장의 힘이 엇비슷한지라 그는 한참 동안이나 씨름을 하다가 제풀에 꺾여 중얼거렸다.
"어느쪽이 이기고 지는 걸 미리 알면야 무슨 재미가 있담?"
노완동은 알 치기에도 싫증을 느껴 이제는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람을 그렸는데 코도 그려 넣고 눈도 그려 넣었다. 그림을 다 그린 다음에는 먼 곳에서 그 그림을 과녘삼아 유리알을 던졌다. 코, 입, 두 눈에 네 개의 구멍이 뚫렸다. 벽에 그린 사람의 이빨이 유리알에 맞아 부서지고 입이 비뚤어지고 코에 구멍이 나고 눈이 뻥 뚫어지게 되니 노완동은 신명이 나서 반나절이나 웃어댔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그는 한동안 침울하게 앉아 이 생각 저 생
각 머리를 굴리다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이리 와, 이리 오라니까, 한 가지 물어 볼 게 있어."
간수가 가까이 다가왔다.
"뭘 물어 보려구 그래?"
"자네들 철장방에 구천인 말고 누가 장력이 제일 센가?"
그 사람은 노완동의 말을 듣고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철장방 사람들이면 누구나 공력이 대단하다. 네 놈이 철장방 맛을 보고 싶거든 어디 나와 견주어 보자,"
노완동은 쾌재를 부르며 품속에서 작은 금덩이를 꺼내 간수한테 보이면서 말했다.
"내가 알려 주지. 난 어디로 가나 이 금덩이를 갖고 다니며 이걸로 내 운세를 점쳐 본다네."
그 간수는 노완동이 금덩이를 들고 있는 것을 보자 욕심이 났다.
"그 금덩이 날 주게."
"자네가 내 팔을 부러뜨릴 수만 있다면 이 금덩일 주겠네."
간수는 금덩이가 욕심이 나 한번 시험삼아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노완동이 옥에 갇혀 있으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자넨 어서 이 옥문을 열게.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시험해 볼 수 있겠나?"
그러자 간수는 냉소를 쳤다.
"노완동, 자넨 대협 왕중양의 사제인데 그 재간을 누가 당하겠나? 자네를 내놓았다간 금덩이를 얻기는 고사하고 내 목숨도 건지지 못할 텐데 실없는 소리 작작 하게."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나?"
노완동은 천연덕스럽게 금덩이를 이 손 저 손으로 옮겨 가면서 가지고 놀았다. 금덩이는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간수는 자꾸만 군침을 삼켰다.
"자네가 팔을 이 창문으로 내밀게. 그래 가지고 내가 시험해 보는 게 어떻겠나?"
간수는 얕은 꾀를 굴렸다. 이 창문에는 창살을 박았고 창구멍도 한 자밖에 안 되니 노완동이 팔을 내밀기만 하면 한 장에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일 자기가 두 손으로 노완동의 손을 잡아당겨 팔을 부러뜨리게 될 지경이면 그가 다급하여 금덩이를 밖으로 내던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간수는 성마르게 졸라댔다.
"자네가 팔을 밖으로 내밀라니깐. 그래서 시험해 보자구."
노완동은 머리를 저었다.
"싫어, 안 하겠어. 내가 팔을 밖으로 내밀면 자넨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씩 내리쳐서 내 팔을 부러뜨릴 속셈 아닌가?"
"정히 그럴 생각이 없다면 관두라구."
간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일부러 장으로 쇠살창을 치는 것이었다. 쇠창살이 쾅 하고 울렸다. 노완동은 다시 간수에게 말했다.
"좋아! 그런데 자네 조심해야 하네. 한 번이라도 내 팔을 격중시키면 시합은 그것으로 끝난 것으로 치잔 말야. 어때?"
"그래, 좋다!"
노완동은 과연 천천히 한쪽 팔을 밖으로 내밀었다. 그 팔은 보기가 구차할 지경으로 더러웠다. 그러자 간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단 한 장에 네 놈의 팔을 맞히지 못한다면 네 놈은 팔을 걷어들이겠지? 그러면 난 금덩이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차라리 저 놈의 팔을 꽉 틀어잡고 부러뜨리자. 그러면 금덩이를 안 내놓고는 못 배길 거다.'
간수가 이런 꿍꿍이를 구미고 있는데 노완동은 안달이 나서 재촉했다.
"자넨 왜 손을 안 쓰나? 한 번밖에 못 친다고 하니까 그러나? 한 장에 끊어 버리지 못하면 지게 되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 이제부턴 그 무슨 철장방이라고 자랑이나 하지 말게."
노완동은 있는 대로 비꼬았다. 그러자 간수는 바싹 약이 올라 노완동의 팔을 잡아 비틀려고 두 손을 내밀었다. 순간 노완동의 팔이 미꾸라지처럼 미끌하더니 도리어 간수의 팔을 꼭 틀어쥐는 것이 아닌가. 노완동이 힘을 쓰자 간수의 팔은 뚝 하고 부러져 버렸다. 노완동은 기뻐서 환호성을 울렸다.
"자네가 내 팔을 부러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나한테 팔이 부러졌단 말씀이야. 자네가 먼저 나쁜 마음을 먹었으니 날 탓하지 말게! 어서 열쇠를 내놔! 이곳에선 아무 재미도 없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