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함께> 제5호와 <낙원의 숲>으로 간다.
낙원의 숲
- 고양 북한산 사기막골
차용국
봄날, 북한산 사기막골에 순백純白의 봄빛이 찾아오면, 돌을 스쳐 흐르는 물소리 기운차다. 싱그러운 계곡과 산자락에서 피어나는 산벚꽃은 반딧불처럼 물결 위에, 나비처럼 산길 따라 환한 빛의 세상을 펼친다. 숲은 연초록 새순을 아우르며 환하고, 능선은 개별 수목마다 드러낸 속살의 향기로 환하다. 백운대·인수봉·만경대는 준봉峻峯의 품격 그대로 하늘의 흰 구름과 능선의 꽃구름을 배경으로 환하다. 중생대 쥬라기(1억 8천만 년∼1억 3천만 년 전) 어느 날 땅속 깊은 곳에서 불뚝 솟아오른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는 자연의 풍경을 지키며 사람 사는 세상을 바라본다. 세월을 더해가며 듣고 보는 세파世波의 허물어진 사연에 찡그릴 만도 하건만, 준봉의 맑은 눈빛은 미동도 없이 본래 그대로 환하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초연할 수 없는 산객을 맞아 아무런 말도 없이 수려한 자태 그대로 홀로 우뚝한 준봉이 야속하기도 하건만, 산객은 쉬이 산을 떠나지 못한다. 듣고 보고 생각하고 책을 읽고 글을 끄적거리다가, 그도 저도 시들해지면 멍때리기로 산객의 휴일은 저물고, 노을빛이 꽃잎과 새순 사이를 서성거릴 무렵에야 겨우 일어선다. 도시의 석양夕陽은 한강 하구로 판을 넓혀가는 수직의 빌딩 위에 걸려 붉은빛과 자줏빛과 보랏빛을 난반사하며 흐트러진다. 내가 삶을 짐 지고 살아가는 도시의 빌딩 숲속에서 노을빛은 네온사인 불빛에 섞여 계통을 잃고, 창릉천을 달리는 내 구형 자전거의 흔들리는 핸들에 부딪혀 갈팡질팡한다.
가을날, 효자동 사기막골탐방소를 지나 숲속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세월을 건너며 체득한 새로운 사연을 담아낸 기록의 증표처럼 단풍이 가득하다. 준봉은 여전히 환한 기상과 고상한 품격 그대로 제자리에서 산객을 맞이한다. 나는 산문山門에 들어서며 팔을 활짝 벌려 숨을 깊이 들여 마신다. 그게 내가 할 일의 전부다. 그렇게 출입 신호를 보내면 산과 나의 소통의 경로는 저절로 열리는 것이어서, 나는 언제 어디서나 자유다.
염천炎天의 계절을 견뎌내면서 삶의 언저리에는 출처를 일일이 들추기에도 번잡스럽고, 잘 들리지도 않고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먼지처럼 억눌린 응어리가 쌓이곤 한다. 세속의 던적스럽고 경박스러운 관계망에서 상처받은 기억과 번뇌는 끈질기다. 살면서 사람에게 받은 치욕과 분노의 배설물은 답답하고 무겁게 굳어버린 똥탑처럼 똬리를 틀고 있어서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을 통해 치유할 수 없다. 실망하고 상처받은 마음과 기억을 달래고 잊어버리겠다고, 수직의 도심 지하 공간을 전전하며 술잔을 털어 넣고 악쓰고 허세 부리지 말라고 준봉은 말한다. 감당하지 못하는 허약한 심신을 부추겨 허세의 발바닥을 들썩이지 말고, 예서 갈바람에 흔들리며 물들어가는 노란 솔잎처럼, 그냥 하늘의 흰 구름과 능선의 단풍을 바라보며 머물다 가라 한다. 나는 숲이 내어준 계곡 가에 앉아서 흘러가고 흘러오는 세월의 소리를 떠나보내고 맞이하면서 그냥 오래도록 머무른다.
준봉은 말을 걸지 않고 능선과 숲은 생각에 끼어들어 간섭하지 않는다. 저절로 익어가는 단풍의 천연天然한 모습처럼, 갈바람은 찌든 세월의 틈새와 구부러진 삶의 길목과 그물코처럼 얽혀있는 던적스러운 사람 관계의 습한 늪지를 쓸어가며 정리하지 못한 고비마다 청명한 하늘과 흰 구름을 걸어놓는다. 그림처럼 펼쳐진 파란 하늘을 날아다니는 낙엽의 서정과 세월의 언저리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새로운 삶의 울림은 늘 고요하다. 맑은 물과 바람으로 심안心眼을 씻고 걷는 숲길과 능선은 사색의 길이 되어주고, 준봉에 올라 바라보는 세상은 거침없이 드넓어 잡스러운 기억의 편린片鱗이 들어설 여력이 없다.
사방으로 준봉과 능선으로 둘러싸인 산속에도 마을은 있었고 사람들이 살았다. 그들은 가마를 짓고 사기를 구워 서울과 이웃 마을에 내다 팔아서 호구를 해결하고 긴요한 물품을 조달했다. 이곳을 사기막골이라고 부르는 유래다. 사기막골 사람들에게 산속 마을은 목가적이거나 낭만적인 낙원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그들은 땀 흘려 생산하고 교역하고 부족한 결핍을 인내로 달래며 살았다. 적어도 북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까지 살았던 사기막골 사람들은 변화의 풍랑風浪을 겪으며 그들의 터전과 가마를 자연에 내어주고 떠났다.
만물의 변화는 한시도 멈춤이 없어서 변화의 조류를 외면하거나 거역하면서 살아내고 유전할 수 있는 마법의 열쇠는 없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변화는 일말一抹의 차별이나 존경도 없다. 누구든 동일한 선상線上에서 당대의 변화를 만나고 대응한다. 그것이 변화의 법칙이라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듯싶다. 진화의 역사는 변화를 선택하고 대응하는 유전의 기록이다. 변화는 현재의 주역을 퇴장시키고 새로운 주역을 등장시킨다. 변화는 삶의 방식과 가치와 제도와 같은 정신적·사회적 인식과 의식의 틀과 과학 기술의 이기利器를 바꾼다. 그리하여 변화는 삶의 총체인 문화를 바꾸고, 자연의 풍경을 바꾸고, 마침내 혁명을 완성한다. 진정한 혁명의 완성은 문화가 바뀌는 것이다. 오지의 산속이라도 혁명을 피할 수는 없다.
사기막골 사람들이 돌려준 숲은 자연이 저절로 복원하였다. 이제 숲은 새로운 시대의 낯선 세대를 산객으로 맞이한다. 그들은 삶의 현장을 저 수직의 도시에 남겨놓고 사기막골에 찾아온다. 그들에게 사기막골이 쉼터가 되든, 치유의 숲이 되든, 또 다른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을 맞이하고 안아주는 숲의 가슴과 준봉의 심성은 변함없이 넓고 후덕하다.
사람 없는 숲은 적막해서 숲은 홀로 낙원을 만들지 않는다. 숲이 사람의 낙원을 만들고, 사람이 숲의 낙원을 찾아올 때 숲에서 낙원은 비로소 완성된다. 백운대와 만경대 자락의 크고 작은 바위틈에서 발원한 작은 샘물이 연합한 계곡물은 사기막골을 적시고, 효자2교를 빠져나와 창릉천의 주류를 이루고, 행주산성 아래에서 한강과 합류한다. 내 구형 자전거는 그 물길을 따라 수직의 도시와 낙원의 풍경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