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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얻는 의와 거듭남] 곽성길 목사
오늘 말씀의 주제는 믿음으로 얻는 의와 거듭남에 대해서 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늘에 관한 유일한 한 가지 조건이 있죠.
그게 뭐 하는 거죠? 거듭나는 거죠. 요한복음에 보면 니고데모가 참 훌륭한 교인이었는데 예수님께 갔을 때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한 말이 있죠.
너 하늘나라 가면 가려면 뭐 해야 되겠다 거듭나야 되겠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니고데모는 참 훌륭한 교인이긴 했는데 뭐 하지 않았다는 얘기예요?
거듭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교회 안에 제가 참 교회 안에 싫어하는 메시지가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 우리 다 구원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저는 아주 싫어합니다. 교회인이라고 다 구원받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교인이라고 다 거듭난 것도 아닙니다.
그거는 우리 교인들로 하여금 깊이 잠들게 하는 거짓 기별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진정으로 내가 거듭났는지를 내 자신을 시험하고 또 확정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정말 거듭났는가
나는 정말 하늘 갈 준비가 됐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봐야 됩니다.
제가 이것도 참 많이 언급하는 내용인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절이 아니라 로마서 6장 1절 주의 말씀이에요.
복음 성경에 있습니다.
<산채로 장사된 사람들>
거듭남은 우리 시대에 좀처럼 보기 어려운 진귀한 경험이다.
이것이 교회 안의 어려운 일이 그토록 많은 이유이다.
교회 안에 어려운 일이 많나요? 참 많죠. 교회가 싸우고 그렇죠 상처 주고 그런 일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그래서 막 두쪽이 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성화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 참으로 적대요.
많대요. 많대요. 교회 안에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이 말씀을 보면 더 뭐한 것 같아요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들은 뭘 받았어요? 침례까지 받았어요. 그런데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침례를 받았지만 산 채로 장례를 치루었다.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생명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침례는 받았는데 침대는 무슨 외식이냐 하면 죽고 장사 지내고 다시 사는 경험이죠.
그런데 생물학적으로 육체적으로는 침례는 받았는데 마음은 뭐 한 거예요?
안 죽은 거예요. 이제 좀 우스개 얘기로 우리 재림 교인들 왜 그렇게 말이 많냐 왜 교인들이 이렇게 말이 많냐 그것은 침례 받을 때 목사님이 수건으로 입을 가려서 그렇다 그래서 입이 안 죽어서 그렇다 그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입을 막지 말고 그냥 물에 담갔으면 말이 없을 텐데 입이 죽어가지고 그런 우스개 얘기가 있어요.
그러니까 침례는 받았는데 뭐는 안 죽었냐 하면 자아는 안 죽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 하는 말씀이 있는데 침례는 받았는데 예수님의 죽음과 뭐 하지는 못했어요?
합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내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하는 게 다 같은 말이죠.
네 그래서 거듭남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과정이다라고 하는 이런 말씀들이 있습니다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침례도 받았고요. 우리 진리를 사랑하시나요? 네 진리 사랑하죠.
나름 신실하게 종교 생활 여러분 아십니까? 11조 잘 들리시나요?
교회 출석도 잘 하시고 오늘 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많은 분들이 못 나오셨다고 하지만 교회 출석도 잘 하시고 또 봉사도 잘 하시고 그렇죠 또 교회 직분도 잘 행하시고 기도하시고 말씀 보시고 또 건강 개혁도 하시고 옛날에는 고춧가루도 안 먹는 분들이 많았죠.
전도도 하고 그러나 이런 것으로 뭐는 될 수 있어요?
교인이 될 수는 있는데 이런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이것들은 다 하죠.
그러나 이것들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죠? 아니에요. 많은 교인들이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얘기해요. 거듭나야 됩니다. 그러면 아니 내가 지금 이렇게 교회 잘 다니고 11조 잘 드리고 교회도 이렇게 봉사하고 그러는데 뭘 또 거듭나야 되냐 이런 분들이 많아요.
그렇죠 많은 교인들이 교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신앙 고백을 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행하면 이것이 마치 중생의 경험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피상적인 거짓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하늘의 능력을 경험한 적은 없습니다.
이게 사실이에요. 어떤 우리 교인이 예를 들어서 일요일 교인 개신교 교인들에게 안식일이 일요일이 아니고 토요일입니다.
토요일이 맞습니다. 그래서 공경 공부를 가르쳤어요.
이 사람이 일요일 교회를 버리고 우리 교회로 왔어요.
그럼 그 사람이 구원받은 건가요? 아니에요 그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이해가 되시죠 교리를 인정하고 교리에 동의하고 교회를 옮겼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 다 구원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우리 다 하늘 갈 겁니다.
저는 이런 얘기 싫어한다 그랬죠 이런 얘기를 자꾸 하면 사람들이 피상적인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그럭저럭 살아가요.
내가 이렇게 살다 보면 구원받겠지 하고 살아가는데 삶은 변화되지 않은 분들이 참 많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거듭나면 뭘 얻는 거라고요? 우리 교과시간에 했죠.
의를 얻는 거예요. 성경의 총 주제가 뭐냐 하면 그리스도 우리의 의 그게 성경의 총 주제예요.
그리스도 우리의 의 그게 성경의 총 주제예요. 이게 또 나오네요.
자
이 말씀 앞에 봤던 말씀인데 여기는 주혜라고 제대로 돼 있네요.
이거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보면서 제가 여러분께 질문 하나 드릴게요.
거듭나무는 우리 시대에 좀처럼 보기 어려운 진귀한 경험이래요.
그죠? 여기 지금 뭘 다루고 있는가 하면 거듭남에 대해서 다루고 있죠 그렇죠 네 사람들이 교회는 다니는데 성화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고 교회에 오면 막 성질 부리고 그죠?
집에 가면 남편한테 아내한테 함부로 막 하고 그렇죠 아이들한테도 버럭버럭 소리 지르고, 그리고 한 번 그러고 나면 또 우리 부인이 뭐라 그러죠?
아이고 주제의 장로라고 아이고 그래 니가 뭐 별 수 있겠어 그러면 그런 얘기도 들을 수 있어요.
그렇죠 장로뿐만 아니라 목사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침례는 받았지만 산 채로 장례 치렀어요. 그러면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생명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그랬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생명으로 일어나는 것 자체가 사실 거듭남이에요.
그죠? 거듭남이에요. 그러면 여기에 거듭남이 뭐와 아주 깊이 연관돼 있다고 보이나요?
너무 어렵지는 않나요? 그러면 이 말씀을 우리가 자세히 한번 연구해보면 뭐 하면 거듭난다는 얘기예요.
그렇죠 그렇죠 우리가 하늘을 가려면 유일한 한 가지 조건은 거듭남이에요.
그죠? 그럼 여기에 이 말씀을 가만히 보면 들여다보면 보여요.
거듭남은 뭐 함으로 이루어진다? 자아가 죽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그렇죠 자아가 죽음으로 자아가 죽으면 거듭남이 이루어져요.
교회 안에 어려운 일이 참 많습니다. 그렇죠 직업에서 싸우고 참 어려운 일들을 많이 들리잖아요.
그죠 이유는 중생의 경험 즉 거듭남의 경험이 없는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 많기 때문에 그래요.
침례는 받았습니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습니다.
자아가 안 죽었어요. 그러므로 거듭 남은 자아의 죽음과 뗄 수 없는 관련이 있습니다.
거듭나려면 자아가 죽으면 돼요. 살아가는데 불안하죠.
요즘 참 경기도 어렵고 그렇죠. 불안하고 어렵고 근심도 많고 고민되는 것도 많고 성질 나는 것도 많고, 참 그런 것들이 많아 번잡스러워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이걸 한 방에 해결하는 게 뭔지 아세요? 거듭남이에요.
의가 들어오면요. 이런 게 다 사라져버려요. 우울증 조급증 다 사라져버립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져서 아예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좀 제가 너무 또 오버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말로 거듭남은 곧 자아의 죽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여러분 거듭나려면 뭐만 죽으면 돼요? 자아만 죽으면 돼요.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생명으로 일어나지 못했대요.
그러면 자아가 죽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생명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죠. 그러면 자아가 죽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생명으로 일어난다.
그랬으니까 아까 여기 보니까 믿음으로 얻는 의와 믿음으로 얻는 생명, 믿음으로 얻는 품성 구원 사랑 순종 이게 다 같은 거죠.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생명으로 일어난다는 얘기는 거듭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듭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주신다는 뜻인가 하면 그분의 의를 주신다는 거예요.
이 의를 예수님께서 만드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잖아요.
그죠. 그러면 이 의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본질적으로 우리를 부활시키려고 예수님께서 지금 준비하고 계셔요.
그죠 그러면 우리가 본질적인 부활 즉 이 의를 받고 생명을 받으려면 뭐만 하면 되는가 하면 자아만 죽으면 돼요.
그러면 뭐 할 수 있다고요?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의를 받으면 품성도 변화됩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아까 우리 성령의 9가지 열매는 따로따로 열리는 열매가 아니라 이 의 안에 다 있는 열매예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사랑은 있는데 온유함이 없다 이게 맞는 말이에요.
틀린 말이에요. 틀린 말이죠.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온유하지 않다.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절제하지 않는다. 이거는 틀린 거예요.
하나 안에 다 있는 거예요. 의 안에. 그래서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지 못했다 하는 이야기는 죄를 많이 지어서 구원 못 얻는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죄를 100가지 지은 사람이 있고 여기 한 가지 지은 사람이 있어.
그럼 이 사람은 지옥 가고 이 사람은 천국 가나요? 똑같이 멸망받아요.
그죠? 그러면 이 죄를 10가지를 지은 사람은 회개하고 의를 받았어.
근데 죄를 한 가지밖에 안 지은 사람은 나는 죄 별로 없어 그러면서 의를 안 받았어.
그러면 누가 한을 가요?
죄 많이 지었지만 의를 받은 사람이 하늘나라 가는 거예요.
그렇죠 그래서 하늘나라를 못 가는 이유는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뭐가 없기 때문에 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즐겨 자아를 굴복시키는 이에게 의를 주셔요.
그러면 의를 어떻게 얻는가? 여러분 자아를 굴복시키고 포기하기로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가요?
내가 해야 하는 일인가요? 물론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가능해요.
그거 틀린 말 아니에요 우리 스스로는 이것도 못해요.
그래서 그 말씀이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자아를 굴복하기로 선택해 주는 것은 누가 하는 일이에요?
자기가 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의를 주시는 거는 인간이 하는 일이에요.
하나님이 하는 일이에요. 하나님의 일이에요. 그러면 내가 의를 어떻게 봤나 의를 어떻게 내가 얻을 수 있지 이런 거 염려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필요 없어요. 뭐만 하면 돼요? 자아만 굴복시키면 돼요.
이게 성경의 총 주제예요.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면 다 이 이야기로 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인간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그 하나님의 일이 뭐냐 바로 우리에게 뭘 주시는 거예요?
의를 선물로 주시는 거예요. 이걸 해주신다는 말이에요.
인간은 뭐만 하면 된다고요? 자아 굴복 자아 죽음 자아 포기만 하면 돼요.
그러면 여러분 자 자아 굴복이 도대체 뭐냐 이걸 알아야 알아야 되겠죠.
그죠? 그럼 자아 굴복이 뭔가 자아가 뭐죠? 자아 보세요?
교회 증언 5건 310쪽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생각이 잘못되면 뭐도 잘못된다고요 감정도 잘못될 것이다.
그리하여 생각과 감정이 합하여 도덕적 품성을 이룬다.
내 자아는 내 품성이죠. 그렇죠 그래서 내 생각과 내 감정이 곧 뭐예요?
내 자아예요 내 자아 교회에 와서 이렇게 앉아 있는데 옆에 있는 어떤 사람이 꼴보기 싫어 뭐예요?
감정이죠. 그죠 내가 제가 옛날에 목회하던 어떤 곳에 어떤 장로님이 이런 말씀하세요.
그 집에 방문 갔더니 그 집사님이 문에 목욕 바구니가 이렇게 있어요.
그래서 집사님 목욕 바구니가 여기 이렇게 문 앞에 목욕 가세요.
그랬더니까 자기는 목욕 바구니를 항상 여기 문 앞에 놔둔대요.
왜 그러세요? 그러니까 장로님이 그 집사님 보고 그러니까 부부 사이에 같이 여보 목욕 갑시다 이랬는데 여자들이 같이 이렇게 나가려고 그러면 여자들 꿈불거리잖아요.
그러시죠 답답하죠. 많이 답답하죠. 여자들은 뭐 꾸미고 나오고 하다 보면 막 천불 나요.
빨리 안 나와 정말 여자들이 원래 그래요. 그렇죠 이 장로님은 여보 목욕 갑시다 이래가지고 차에 딱 나왔는데 즉시 그 집사님이 안 오면 그냥 가버린대요.
그래서 그 집사님은 목욕 갑시다 그러면 얼른 그거 들고 나오려고 문 앞에 딱 대기시켜 놓는데 예를 들어서 여보 목욕 갑시다 이랬는데 밖에 나와서 차를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 빨리 안 나와 그때 무슨 생각이 들죠?
이 여편네는 뭘 하는데 이렇게 꿈을 그게 뭐예요? 생각이죠
보세요. 생각이 잘 된 거예요. 잘못된 거예요. 잘못됐죠.
제가 이런 말 하면 좀 그런데 여러분은 하셔도 괜찮아.
이 여자가 지금 빨리 안 나오고 뭘 하느라고 하여튼 생각이 잘못됐죠.
생각이 잘못되면 뭐도 잘못된다고요 감정도 따라와요.
성질 나죠. 짜증이 올라오죠. 들어가서 한마디 하죠.
뭐 하는 거야 지금 그걸 품성이라고 해요. 여러분 거듭나는 게요.
무슨 외국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막 순교하고 그래야 하늘나라 가는 거 아니죠?
품성이 변화된다는 건 아주 작은 것에서 변화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여보 목욕합시다 이래가지고 밖에 나와서 기다리는데 여자들은 뭘 치장을 해야 돼?
그냥 못 나와 거울도 봐야 되고 옷도 이걸 입어야 되나 저거 입고 가야 되나 막 그러잖아요.
그때 다른 생각이 딱 들어올 때 이 편 하는 생각이 들어올 때 좌굴복이 뭐냐 하면 그 생각을 어떻게 하는 거냐 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그 순간에 기도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지금 이상한 생각이 들어옵니다. 저의 이 생각을 주님께 드립니다 하고 내 그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요?
내가 바꿀 수 있어요? 바꿀 수 있어요. 그리고 생각을 바꾸는 건 쉬운데 생각이 잘못됐을 때 감정이 팍 따라와서 이렇게 속이 뒤집어질 때 그 감정을 억누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냐 하면 그 감정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예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저의 이 붕괴한 감정과 이 나쁜 생각을 주님께 드립니다.
아버지 이거 가져가시고 저에게 당신의 그 의를 저에게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하는 거예요.
되게 쉬울 것 같죠? 그렇죠 되게 쉬울 것 같죠. 되게 쉬우면서도 이것만큼 어려운 게 없습니다.
한번 열받아보셨죠? 그렇게 붕괴함이 이렇게 머리에 확 올랐을 때 기도한다는 것은요.
정말 어렵습니다. 기도가 안 나와요. 성질머리 날 때는 기도 자체가 안 나와요.
그럴 때는 뭘 이용을 해야 되냐면
지성을 이용해야 됩니다. 뭘 이용한다고요? 지성요 지성으로 내 감정을 내 육신을 무릎을 꿇리는 거예요.
오늘 이 말씀 잘 들으셔야 됩니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짜증이 불같이 막 올라올 때는 그냥 폭발시켜버리고 싶어요.
그렇죠 그냥 가서 한마디 해주고 싶고 한번 지워 바꿔버리고 싶고 할 때 기도는 거의 불가능해요.
안 나와요. 기도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저 우주만큼 달아나버리고 없습니다.
그럴 때 이 말씀 거듭남은 자아의 굴복을 통해서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자아를 굴복시킬 때 하나님께서 의를 주신다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 강제로 무릎을 꿇리는 거예요.
내 지성으로요. 그리고 내 감정과 생각을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고 그분께 드리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이것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 제가 지금 생각이 잘못되었고 제가 감정이 나서 제가 지금 들어가서 마누라를 한 대 주어 팰 것 같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 감정과 이 생각을 다 주님께 지금 드립니다. 아버지 이거 가져가시고 저에게 평화를 주시고 당신에게 의를 저에게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즉시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이 기도 응답이 지연될수록 좋은 거예요.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몇 바퀴 돌았죠?
6일 동안은 한 바퀴 돌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째 날에는 7바퀴 돌았죠 총 몇 바퀴 돌았어요?
13바퀴 도는 거예요. 그 한 바퀴 도는 거 하나하나가 다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냐 하면 저 굴복을 상징해요.
여리고가 뭐예요? 내 자아예요. 여리고 한 번 돌 때 이게 무너졌나요?
안 무너졌죠? 두 번 돌 때요 안 무너졌죠? 세 번 돌아도 안 무너졌죠.
나만 장군이 요단강에 몇 번 들어갔죠? 일곱 번 들어갔죠 그 한 번 들어가고 두 번 들어가는 그 하나하나가 다 뭐냐 하면 좌굴복이에요.
들으신 분도 아시겠지만 저도 그런 경험을 저는 세 번 만에 했고 어떨 때는 한 번 만에 했고 그런 경험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내가 참 붕괴한 마음이 일어나서 하나님 제가 이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저에게 평화를 주시고 이 마음을 가져가시고 저에게 의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안 들어주세요.
다시 또 도전해요. 두 번째 세 번째 물론 한 번 만에 될 수도 있어요.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때가 있어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고 드릴 때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그에게 뭘 주시냐면 평화를 주세요.
조금 전까지 그 붕괴한 마음 다 사라져버리고요. 마음이 한없이 평화로워져요.
그걸 의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죠.
근데 그 갈릴리 바다에 뭐가 일어났죠? 풍랑이 일어났죠 갈릴리 바다가 뭘 상징하냐면 우리 마음을 상징해요.
뒤집어지는 거예요. 남편이 꼴보기 싫어가지고 저 인간을 정말 저는 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무슨 말을 했냐면 저희 어머니가 항상 아버지한테 맞아가지고 막 여기 멍이 들고 그랬거든요.
계란 가지고 이렇게 비비고 그랬어요. 저희 어머니 가끔 이런 말씀하셨어요.
소리 안 나는 총이 있었으면 소리 안 나는 총이 있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그런 격한 감정이 올라올 때 그걸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하고 그걸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뭘 주시냐 하면 평화를 주세요.
그걸 의라고 하는 거예요. 풍랑이 일어났죠. 그 풍랑이 일어나는 게 우리의 뒤집어진 마음을 상징해요.
근데 제자들이 물을 퍼내도 이 물이 아무리 퍼내도 이게 되나요?
안 되나요? 안 되죠. 이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님께 우리 살려달라고 빌죠.
간구하죠. 그때 예수님께서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죠.
우리가 이 생각과 감정을 하나님 앞에 완전히 굴복시키고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바다에 오셔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말씀하셔요.
그때 우리의 마음이 한없이 평화로워져요. 천천해집니다.
그걸 구원이라 그러는 거예요. 그걸 의라고 하는 거예요.
날마다 날마다 그렇게 살으라는 거예요. 매 순간마다 오늘 한 번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계속해서 내 자신을 굴복시키고 살아가라는 거예요.
그게 거듭남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거듭남은 한 번의 일이 아니라 날마다 날마다 거듭나는 거예요.
그것을 사도바울은 뭐라고 표현했는가 하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위대한 사도바울도 자아가 있었을까요?
자아가 있었어요. 충동하고 올라오는 그런 것들이 있었단 말입니다.
잘못된 생각과 그로 인해 생기는 잘못된 감정을 즉시로 주님께 드리고 그분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내 불 같은 그걸 가져가시고 그분이 의를 나에게 주셔요.
그러면 내 마음이 평화로워져요.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미웠던 내 마누라가 내 부인이 어떻게 보일까요?
불쌍해 보여요. 사랑스럽게 보여요. 내 남편도 제가 어떤 이야기를 들었냐면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이 말씀을 듣고 실천한 어떤 분이 자기 남편과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가 지금은 자기 남편을 너무 사랑하게 됐다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실천해보면 이 의가 삶 속에서 경험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근데 교회를 다니면서 뭐 부활이 어떻고 뭐 죽음이 어떻고 아무리 공부해도요.
이 자아 굴복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분명히 깨닫고 삶 속에서 이것을 실천해보고 하늘에서 오는 그 능력
내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성난 갈릴리 바다같이 풍파가 있는 내 마음을 하나님께서 잔잔하게 해주시는 그 하늘의 능력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안에 문제가 많이 생기고 불화가 많이 생기고 내 아이들이 나를 보고 떠나가고 남편과 아내가 싸우고 이런 일들이 그래서 생긴단 말이에요.
내 자아만 죽으면 내 가정에 뭐가 임할까요? 평화가 임해요.
교회 안에도 보면 괜히 쓸데없이 막 이렇게 한마디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자아가 굴복되지 않아서 그래요. 자아가 굴복되면 네 그냥 의는 온유 사랑 평화, 구원, 생명 영광, 성품 이 모든 것들이 다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로의 계단에 있는 말씀을 잠깐 볼게요. 선과 성결에 대한 욕망은 좋기는 좋으나 만일 그것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저 정말 착해지고 싶어요. 저 구원받고 싶고 저 성품이 변화되고 싶어요 하고 기도하는 거 좋아요.
좋아요.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로 그친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희망하고 소원만 하다가 어디 들어간다고요?
멸망에 들어간대요. 왜 멸망에 들어가는가 하면 저들은 저의 마음을 하나님께 뭐 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아요 바치는 데까지 이르지 않는대요.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나의 어떤 잘못된 생각들과 나의 감정들이 있잖아요.
막 이렇게 올라오죠. 그러면 그것들을 즉시 하나님께 뭐 하는 게 자굴북이라고요?
바치는 거예요. 하나님 저의 이 참 이 성질머리를 주님 앞에 바칩니다.
저의 끌어오르는 감정을 주님 앞에 바칩니다. 하나님 이거 받아주시고 저에게 의를 주세요.
그걸 안 한다는 거예요. 그걸 그래서 오늘 우리 부안교장님도 그 기도하신다고 그러는데 그 기도 참 좋아요.
그 기도하셔야 돼요. 그런데 그 기도를 하시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 응답을 어떻게 해 주시냐 하면 그 기도한 날 열받는 일을 하나님께서 주세요.
아 그래 니가 참 그렇게 온유하고 싶어 하는구나 알았다.
내가 너의 기도를 응답해 줄게 하고
누구를 보내는가 하면 속을 싹싹 긁는 사람을 하나님 옆에 보내줘요.
그럼 그게 기도 응답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늘 내 기도 응답을 이제 해주시려고 이 사람을 보내셨구나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그러한 사람으로 변화되려면 기도만 한다고 변화되지 않고요.
그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어떤 그러한 온유를 믿음으로 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세요.
그러면 그때에 이것이 기도 응답이라는 것을 알고 그 속이 속을 빡빡 긁어가지고 속이 싹 뒤집어지려고 할 때 그걸 하나님 앞에 바치고 하나님 앞에 드릴 때에 그때 사람이 변화된다는 거예요.
그죠 그래서 어려운 일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고 열받는 일이 생길 때는 뭐라고 생각하셔야 되는가 하면 아 하나님 오늘 제가 변화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저에게 주시는군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뭐 하면 되는가 하면 마음을 하나님께 뭐 하면 돼요?
여기 말씀대로 받치면 돼요. 그러면 돼요.
마음을 바치는데 참 안 될 때가 있어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끝까지 포기하자고 그러니까 7번 들어간다는 얘기는 완전하게 굴복한다는 얘기예요.
그렇죠 완전히 그걸 주님 앞에 들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십.
정로계단 43쪽에 온 마음을 반드시 하나님께 먹어야 하나님 바쳐야 하나니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그 변화가 우리에게서 결코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 이 자아 자아 굴복이라는 말씀을 모르고 이 말씀을 읽으면 아니 마음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게 무슨 뜻이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야 어떻게 해야 내가 마음을 바치지 모를 수 있거든요.
근데 이 마음을 바친다는 뜻이 바로 자아 굴법을 말해요.
비단 성질머리만이 아니라 이런 것도 있어요. 교만한 생각들이 있죠.
남의 이렇게 업수이 여겨지는 생각이 있죠. 나보다 못한 어떤 사람이 나한테 와서 이렇게 충고할 때 우리 무슨 마음이 생기죠?
별것도 아닌 게 와가지고 무슨 값을 떨고 있네 하는 마음이 싹 생기죠.
그렇죠 그럴 때 그걸 하나님 앞에 바쳐야 돼요. 하나님 제가 지금 교만한 마음이 저에게 들어왔습니다.
이것을 제가 주님 앞에 드립니다. 하나님 저보다 한참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 사람을 제가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 의를 저에게 주십시오.
하나님 그 의를 저에게 주세요. 그게 자골복이에요.
그걸 그런 걸 안 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자꾸 그렇게 문제가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는 거예요. 근데 이 자신을 바치는 일은 여기 밑에 보니까 고투가 예고된대요.
고2가 뭐예요? 어려운 투쟁을 요구한단 말이에요.
참 힘든 일이에요. 자 굴복은요 참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거듭남은 정말 정말 간단하고 쉬운 일이에요.
뭐만 하면 된다고요? 고2 예 자아 굴복만 하면 돼요.
자 굴복 그것만 하면 돼요.
그런데 그 자아 굴복을 하기 위해서 내 성질 머리를 주님께 바치는 그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내가 이것을 주님께 바 나는 잘못한 게 없어. 나는 잘못한 게 없어.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한테 막 뭐라 그래 그 순간 우리에 팍 올라오죠.
한마디 해주고 싶죠 그렇죠 마디 팍 해주고 싶어요.
근데 한마디 진짜 안 해주면 내가 억울해서 잠이 안 올 것 같아.
그런 경험 있죠? 내가 꼭 한마디 해줘야 돼. 내가 한마디 안 해주면 저 인간이 나를 앞으로 어떻게 생각하겠어 내가 이번만큼은 내가 한마디 해줘야 되겠어 그런 생각이 들 때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고 아무 소리 안 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정말 괴롭습니다.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아요. 그럴 때 그것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이 마음을 주님 앞에 바칩니다. 그래서 그게 고투가 요구되는 거예요.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이것은
어떤 싸움보다도 어떤 인간들이 더불어 싸우는 전쟁보다도 가장 큰 싸움이 바로 이 자아를 굴복시키는 이 싸움이에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 싸움 하나님께서는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뭐 연평도에 포격이 일어나고 이런 것도 물론 하나님께서 저거 하시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귀중하게 보시는 싸움은 바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아무도 모르게 내 안에서 일어나는 바로 이 자아와의 투쟁 이걸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보셔요.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두 가지로 이루어져요.
하나는 자아의 굴복 하나는 그리스도의 의 이게 성경 전체의 주제예요.
전체예요. 이게 1번은 누가 할 일이라고요? 내가 해야 될 일이에요.
1번은 2번은요. 이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그래서 이거는 내가 관여할 거 없어요. 나는 뭐만 하면 돼요 자아 굴복만 하면 돼요.
내 성질 머리 내 교만 남을 없어 여기는 거 한마디 해주고 싶을 때 이게 꾹 참는 게 아니에요.
꼭 잡는 게 아니에요. 꼭 참으면 이렇게 눌러놓으면 여기는 누를 것도 없는데 꾹 눌러놓으면 이게 이렇게 눌러가 있다가 나중에 뭐 해요?
뻥하고 터져버려요. 이게 아니라 그걸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하늘의 능력을 경험을 해야 돼요.
경험을 해야 돼요. 하늘의 능력을 내가 마음이 완전히 조용해지고 평화로워지는 그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이게 나 아자거든요. 자 이게 나예요. 나 근데 이 한문이 가운데를 딱 자르면 이게 두 글자가 합해진 거예요.
나 아자가 왼쪽에 있는 건 손수자고요. 오른쪽에 있는 건 청 과자예요.
그래서 내가 누구냐 하면 손에 뭘 들고 있는 거예요?
창 들고 있는 거예요. 이게 참 기가 막힙니다. 그러면 의는요.
위에 이렇게 된 거는 양양자예요. 그죠? 그 밑에는 또 내가 있어요.
나 나 그렇죠 창을 들고 있는 나의 모습이 있어. 그러면 창을 들고 있는 나의 모습을 누구한테 바치면 어린 양 대신 예수님께 뭐 하면요?
받치면 그분이 나에게 뭘 주셔요? 의를 주셔요. 한 분이 기가 막혀요.
이게 한문이 성서적인 지식 기본적인 성서적인 바탕 위에서 만들어진 게 한문이에요.
왼쪽에 있는 창 든 사람은 사울이고 이 사람은 다윗이거든요.
사울이 다윗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했을 때 사울 왕의 마음속에 뭐가 올라왔어요?
질투 남자의 질투는 정말 무섭습니다. 이게 자아예요.
아 그러니까 보세요.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고 나는 무시를 당할 때 속에서 뭐가 올라와요?
질투 참 무섭습니다. 질투 그 질투가 막 올라올 때 나를 버려야 돼요.
하나님 제가 무시당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내 친구는 높임을 받는데 나는 지금 무시를 당하였고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지만 아버지 나를 내 영광을 주님 앞에 던져버립니다.
이것을 주님 앞에 버립니다. 하나님 내가 영광을 받고자 하는 이것들 다 주님 앞에 버립니다.
하나님 이걸 가져가시고 내가 하나님의 하늘의 그 의를 나에게 주시옵소서 이것도 자아 굴복이에요.
그렇죠 질투 이 질투를 처리하지 못하니까 결국은 뭘 들었어요?
자기보다 더 높임을 받고 자기보다 더 영광을 받는 다윗을 뭐 하려고 그런 거예요?
죽여버리려고 그런 거예요.
여기 나오잖아요. 여러분 힘들지 않으세요? 괜찮나요?
목사에게 보내는 권면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게 뭐냐 그것은 인간의 영광을 어디 속에 묻어버리고 티끌 속에 묻어버리고 인간이 자기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인간을 위해 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였다.
말이 조금 어려운 듯한데 녹색 글씨는 누가 하시는 일이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그렇죠 그러면 붉은 글씨는요.
내가 해야 할 일이에요. 이걸 안 해 가지고 사울이 결국 죽었어요.
그렇죠 나보다 누가 더 영광을 받아요? 지금 다윗이 더 영광을 받아 전쟁해서 돌아왔는데 여인들이 청화하면서 자기는 왕인데 자기는 영광을 천밖에 안 돌리고 자기 신하인 다윗에게는 영광을 얼마나 돌려요?
만을 돌려 질투가 팍 끌어올랐어. 여러분 사울이 왜 죽었냐 하면 이것 때문에 죽은 거예요.
이때에 이 질투심 이 자아를 하나님 앞에 바치기만 했더라면
사울은요. 계속 왕위에 있었을 것이고 그의 아들이 왕이 됐을 거예요.
그렇게 했더라면 그러니까 이 자아를 굴복시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마음을 다 하나님께 바칠 때에 평화와 기쁨과 사랑이 샘솟고요.
이것을 의라고 하고요. 이 상태를 순종이라고 합니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는 이 경험이 경험되어집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경을 읽는데 이게 나하고 아무 상관없는 달나라 이야기같이 느껴진다.
그게 왜 그런가 하면 경험이 안 돼서 그래요. 그러면 이게 달라라 얘기예요.
나와 상관없어요. 다른 말로 하면 그렇게 성경이 읽혀진다면 구원받은 게 아니에요.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 성경에 있는 말씀이 내 경험과 같다는 걸 아는 사람이에요.
경험적으로 그게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럼 그런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아느냐 자아 굴복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평화와 의를 경험해 봤다는 뜻이에요.
그게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합니다.
매 순간 자기를 굴복시키고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고 자기 생각과 감정을 즉시 하나님께 드리면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투쟁이 요구되지만 하나님께서 의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고 이게 거듭남이에요. 거듭나 경험하는 게 어려운가요?
쉬운가요? 그러니까 복잡한가요? 간단한가요?
간단해요. 아주 아주 간단해요. 구원받는 게 복잡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시골 할머니들도 구원받을 수 있어요. 그렇죠.
글자 하나도 몰라도 구원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하버드 신학과를 나온 신학자는 구원 못 받을 수도 있어요.
쉽죠 간단하죠. 근데 뭐가 어려워요? 그걸 굴복시키는 것 자체가 정말 고통스러워요.
그러나 지성을 이용해서 자기를 뭐 시키기로 결정해줘야 돼요.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을 드리기로 결정하고 선택해주고 기도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들 때까지 이걸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거 가져가시고 평화와 의를 주신다는 거예요.
이게 성경 전체 주제예요.
오늘 이 놀라운 의가 날마다 충만한 우리 옥천 교회 성도님 되시길 바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https://youtu.be/O-V37o_Ob0Y?si=RQoLZ5Z6aQ_LBqv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