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의 복개천
기억과 추억 사이/수필·산문·에세이
2007-03-02 20:25:14
요즘들어 옛날처럼 정감이 넘치는 마을이 과연 몇 군데나 될까. 현대화된 모습으로 말쑥하게 옷을 갈아입은 마을이 생활은 편리해서 좋았지만 옛날의 그 흔적들을 조금씩 지워버리는 현실에 가슴이 아팠다. 꼭 필요한 것은 그냥 둬야 하는데 시대의 변화에 맞춰 달라지는 시골을 보면 꼭 도시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제사를 맞아 겨울의 끝자락에 찾아간 내 고향도 그랬다. 동구 밖 풍경은 그런데도 보기 좋았지만 마을 안길이 문제였다. 콘크리트로 복개된 마을 안길을 볼 때는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마을 한가운데를 흘러내리던 도랑이 이젠 콘크리트로 뒤덮여 아예 주차장노릇을 했다. 겉으로 보면 차량들의 쉼터가 되어 보기 좋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제사를 지내고 다음날 아침 찾아간 도랑의 상류는 예상대로였다. 아직 복개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오염이 심했다. 폭이 더 좁아진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비닐과 컵 등 생활쓰레기들이 이리저리 뒹굴었다. 마을의 윗녁 들판 끝에 있는 저수지가 낚시터로 변해버린 것이 그 원인이었다.
낚시꾼들이 쓰다버린 쓰레기들이 거의 1㎞ 남짓 물줄기를 타고 내려와 마을 한가운데의 복개천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복개천을 상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내 유년의 기억조차 복개천속에 꼭꼭 숨겨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귀에 들리지는 않지만 복개천이 하염없이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둡고 습한 콘크리트 덮개를 걷어내고 희망의 햇살을 보게 해 달라는 간절한 소망처럼 들렸다.
문득 청계천이 떠올랐다. 오랜 세월 동안 콘크리트로 뒤덮인 채 서울의 중심부를 관통하던 청계천이 옛날의 모습으로 복원됐을 때 환호하던 시민들처럼 내 고향의 복개천도 그 옛날의 도랑으로 복원되기를 바라고 싶었다.
그 당시 마을의 한가운데는 비포장된 길옆에 도랑이 반 정도를 차지하여 굽이치며 흐르고 있었다. 어른들이 풀쩍 뛰면 닿을 정도로 폭은 좁았지만 도랑은 늘 수채화 같은 풍경 한 폭을 안겨주었다.
새벽이면 희뿌연 안개가 도랑을 따라 스멀스멀 기어 흐르고 안개를 헤치며 아낙들은 빨래를 빨았다. 집 앞에는 넓적하고 반질반질한 돌로 빨래터를 만들어 놓았는데 아낙들은 이 빨래터에 빨래 한 아름 쏟아놓고 방망이를 두드렸다. 방망이가 둔탁한 소리를 낼 때마다 굴참나무숲이 뒤덮인 동네 뒷산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리에 산비둘기들도 놀라 날개를 치며 날아올랐다. 마치 동네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아이들이 몰려나와 물고기를 잡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자갈과 돌을 뒤집으며 가재와 송사리를 잡으며 웃고 떠드는 소리들이 도랑을 따라 저수지까지 올라갔다. 둑이 터질 듯 푸른 물이 넘실거리던 저수지, 머리를 풀어헤친 버드나무가 술렁이며 늘어서있던 저수지, 여름철엔 아이들이 홀랑 옷을 벗고 미역을 감던 저수지, 농사철이면 들판에 물을 대주며 젖줄 노릇을 해주던 저수지, 그 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도랑이 꿈 속 같은 풍경을 연출하는 것은 여름뿐이 아니었다.
겨울에도 그랬다. 한겨울 맵찬 추위가 몰아닥치면 도랑물은 한 뼘 두께로 얼어붙어 고즈넉한 겨울 속으로 잠겨버렸다. 쉴 새 없이 찰랑이던 물은 물결을 적시던 풀에 고드름으로 엉겨 붙어 지난날의 추억을 아로새겼다. 눈 쌓이고 매서운 겨울에도 아이들은 곱은 손을 호호 불며 스케이트를 들고 나타났다. 얼음이 제법 두껍게 얼어붙은 도랑엔 스케이트 타는 아이들도 붐볐다. 외발 스케이트를 서커스 하듯 신나게 타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스케이트를 이용했다. 날카로운 칼날 두개를 나란히 붙인 사각 철판위에 양발을 올려놓고 얼음을 지치면 스케이트는 찬바람을 가르며 쌩쌩 달려갔다. 겨울이 다 지나갈 때까지 스케이트를 타며 노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배기에 있었는데 어머니는 언제나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언덕아래 도랑물을 식수로 퍼 날랐다. 지대가 높아 펌프조차 설치 할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도랑물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언덕길을 내려갈 때마다 간이 조마조마했다. 언덕길은 너무 가팔라 발을 잘못 디디기라도 하면 낙상하기 십상이었다. 그런 언덕길을 어머니는 하루 한 두 차례씩 오르내렸다.
그것도 양동이에 가득 물을 퍼 담아 머리에 이고 오르는 날이면 주변의 모든 나무와 풀들도 숨을 죽이는 것 같았다. 한걸음씩 뛸 때마다 이마위로 물이 흘러내리고 서커스 하듯 한쪽 손으로 슬쩍 이마를 훔치면 양동이를 꽉 잡은 한쪽 손엔 고달프게 사는 식구들의 아슬아슬한 운명이 걸려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점차 어머니가 늙어갈수록 그런 악다구니 같은 힘도 쑥쑥 빠져나갔다. 너무 힘이 든다며 고향에서 거의 20리 정도 떨어진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갔다. 그곳엔 큰 누님이 살고 있어 의지하는 힘이 컸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아버지가 왜 어머니를 도와드리지 않고 수수방관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갔고 나는 명절이나 제사 때 가끔 고향에 오게 되는 처지가 되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 고향을 찾았던 어느 날, 삭막한 마을풍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감쪽같이 도랑이 사라졌고 그 위를 뒤덮은 콘크리트 포장위로는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졸지에 도랑이 주차장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살기 좋은 세월이 와서 차를 소유한 집이 늘어나고 명절날 차를 몰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도 멀쩡한 도랑을 콘크리트로 뒤덮어 주차장을 만든 것에 가슴이 아팠다. 편해서 좋았지만 먼 훗날 자연으로부터 심각한 재해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불도저로 산천을 훼손한다고 해서 자연파괴가 아니라 비록 어른들이 건너뛸 수 있는 폭 좁은 도랑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보잘 것 없는 도랑에서도 아이들은 꿈을 키우며 희망을 꽃 피우지 않았던가. 아낙들은 빨래방망이를 두드리고 아이들은 물고기를 잡으며 순수성을 가꾸지 않았던가. 비록 어머니가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양동이로 억척스레 물을 이고 나르던 고생스런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꿈같은 추억인가.
첨단문명의 시대에 살면서 자꾸만 마음이 삭막하게 변해갈 때 아득한 시절 내 고향에 도랑 한줄기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속이 확 트이지 않는가. 내 고향의 도랑도 서울의 청계천처럼 언젠가는 복원되어야 한다. 물질만을 쫒고 편리만을 추구하는 습성을 버리고 도랑이나마 옛날의 모습을 되찾을 때 내 고향 풍경도 더 아름답게 변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