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5 “복이 있도다! 온유한 자여! 너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II. 어떻게 할 때 온유하게 되느냐?
1. 그럴 수도 있지 할 때 온유해 집니다
우리는 때때로 억울한 일, 말도 안되는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내 의도는 순수한데 사람들에게 매도당해서 오해를 받아 너무 억울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신문에 내서 모든 사람에게 나의 결백을 밝히고 상대방의 악함을 세상에 공개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 때는 내가 공격적이 됩니다.
이 때 온유한 사람은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우리가 정당한 평가를 받기를 원하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당연히 모함도 당하고 억울한 일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재심을 통해 최종적인 판결이 이루어 집니다.
정당한 평가는 우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앞에 가서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이 세상 법정 즉 유대인의 산헤드린 법정과 빌라도 법정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여 사형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늘 법정에서는 예수님의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삯인 죽음이 더 이상 예수님을 구속할 수가 없어 풀어주게 되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법정을 바라보며 세상 법정에서 일어나는 억울한 판결에 대해 “그럴 수도 있지”하고 그냥 넘어가는 믿음의 삶이 온유한 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도 있지”하고 받아주고 이해하고 용서했을 때 우리는 온유를 빼앗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한경직 목사님이 계십니다.
한 목사님은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지으신 분이라 얼굴만 봐도 은혜가 되었습니다. 살아 계신 동안에 한국 기독교계에 선한 영향력을 많이 끼치신 분입니다.
생전에 LA에 집회를 오셨습니다.
그 때 LA에 계신 몇 몇 목사님들이 호텔밖에서 “한경직 목사 물러가라”는 프랭카드를 들고 대모를 했습니다.
당황한 주최측에서 한 목사님에게 “어떻게 할까요?”하고 물으니 한 목사님께서 “내 버려두세요. 저분들이 서운한 것이 있어서 저럽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 가셨다고 합니다.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극단으로 흐르면 안됩니다, 온유를 빼앗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 당시는 무슨 큰일 난 것처럼 난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온유를 빼앗기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2. 온유의 천적은 분노입니다.
우리 마음안에는 분노가 숨어 있습니다. 노출되지 않은 분노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내 마음에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들이나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평상시는 온유하다가도 그 사람, 그 사건 이야기가 나오면 과거의 기억이 성처를 건드려 마음에 숨어 있는 분노를 자극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 온유를 잡아먹어 버립니다.
3. 분노의 천적은 긍휼입니다.
분노하게 만드는 대상을 그냥 보면 분노가 일어나는데 “참 불쌍한 사람이다” 안경을 끼고 보면 분노가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그래 저 사람은 저 수준이구나. “하나님 저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축복해 주소서”하고 기도하면 그 순간 분노는 사라지고 온유한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됩니다.
가정에서 부모 자식간에 부부간에 형제간에 가까운 일가, 친척, 친지, 친구간에 교회에서 동역자, 성도들 간에도 상처를 주고 받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때 온유를 잃어버리지 않는 방법은 부모님들을, 아내를, 남편을, 자녀들을, 형제, 자매들을, 이웃들을 교인들을 불쌍히 보아야 합니다. 그때 내 마음에 분노가 사라지고 온유한 마음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럴수도 있지”와 “긍휼”로 분노를 잠 재우고 항상 온유한 마음을 유지하는 우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