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당신의 성전에서
설교 중심 사상: 예수님은 죄로 인해 더러워진 사람의 마음 성전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
제 어머니는 시장의 노점에서 양말 장사를 하셨습니다. 어머니를 찾아갈 때마다, 시장은 활기가 넘치는 곳이라는 인상을 받곤 했습니다. 상인들은 물건을 팔기 위해 애를 썼고, 손님들은 더 싸게 사기 위해 흥정을 했습니다. 때로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지만 시장에서는 그게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시장이 아닌 곳이 시장처럼 변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보신 광경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A. 예수님이 정결하게 하신 예루살렘 성전
요한복음 2:13-14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유월절이 되면 팔레스타인 전역과 외국에서 많은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성전까지 희생 제물을 가져올 수 없었기에 그곳에서 구입해야 했습니다.
상인들은 이 점을 악용해 희생 제물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팔았고 그 과정에서 부정과 부패가 만연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20세가 넘는 성인 남자에게 해마다 부과된 반 세겔을 성전세로 바쳤습니다. 당시 통용되던 돈은 로마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어서 성전에서 사용되던 돈으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동전을 환전하는 일에도 부정이 개입되었습니다. 당시 성전의 바깥뜰은 시장처럼 변해 버렸습니다. 희생제물을 사고파는 흥정 소리, 가축들의 울음소리, 짤랑거리는 동전 소리가 뒤섞여 그곳은 소란한 가축 시장과 같았습니다. 성전 뜰이 그렇게 변한 것은 이권을 위해 제사장들이 상인들과 결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룩한 직분을 위해 구별된 자들이 돈을 사랑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돈은 바닥이 없는 바다와 같다. 양심도 명예도 빠져서 떠오르지 않는다." 요즘 많은 사람이 돈 때문에 명예를 잃고 양심도 버립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제사장이 돈 때문에 양심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도 버렸습니다. 그 결과 성전은 더러워졌고, 그곳에서 행해지던 희생 제사는 본래의 목적에서 한참 벗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광경을 준엄하게 지켜보셨습니다. 그분의 얼굴에 거룩한 분노가 나타났습니다. 그분의 신성이 인성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 분노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분과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도 점차 그분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서 할 말을 잊었고 하던 행동을 멈추었습니다. 마치 도미노 핀이 옆의 핀을 계속 넘어뜨려 가듯이 사람들의 침묵은 삽시간에 퍼져나갔습니다. 마침내 성전 바깥뜰 전체가 침묵에 빠졌습니다. 이 짧은 시간의 침묵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길게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침묵을 깨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 그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사람들을 내쫓고, 동전이 쌓여 있던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전에 보여 주지 않던 과격한 행동을 하셨지만, 아무도 그분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손에 들린 단순한 노끈 채찍은 마치 화염검과 같았습니다.
B. 예수님이 정결하게 하실 마음 성전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것은 그분이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셨던 물리적인 성전은 사람의 몸 된 성전을 상징합니다. 시대의 소망 161페이지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세 전부터 광명하고 거룩한 스랍천사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을 창조주께서 내재하시는 성전이 되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향해 한 목적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죄로 인해 망가졌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심으로,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물리적인 성전은 잘 관리했지만, 마음 성전은 돌보지 않았습니다. 세속적인 거래로 더러워진 성전 뜰은 이기심과 탐욕으로 가득 찬 그들의 마음 성전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날도 그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 작가였던 정채봉 씨가 마음을 찍는 사진기」라는 글을 썼습니다. "어느 마을의 시장에 사람의 마음을 찍는 사진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유명한 정치가를 찍었더니 돈다발이 찍혔습니다. 돈 많은 사장님을 찍었더니 술과 여자가 찍혀 나왔습니다. 어떤 남자는 늑대가 찍혀 나오고 어떤 여자는 여우가 찍혀 나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에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틀림없이 무시무시한 흉기가 찍혀 나올 거야!' 사나이가 카메라 앞을 지나갔습니다. 방긋 웃는 아이의 얼굴이 찍혔을 뿐, 사나이는 단지 미역 한 꾸러미만을 들고 시장을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마음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을 찍는 사진기가 있다면 과연 무엇이 찍혀 나올까요?
한번은 비가 많이 왔을 때, 살던 집의 하수구가 막혀 물이 역류한 적이 있습니다. 싱크대 배수구에서 물이 솟구쳐 오르며 그 더러운 물과 악취를 처음으로 경험했습니다. 결국 거실까지 오물이 들어왔고, 몇 시간 동안 치우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그날 저는 오물과 쓰레기를 보며 제 마음도 그와 같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속화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마음 성전에서도 욕심과 악한 습관을 제거하고 깨끗하게 하실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지금 하늘 지성소에서 행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시대의 소망」 161페이지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도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악한 세력들을 혼자서 내쫓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만이 영혼의 성전을 정결하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강제로 들어가지 않으실 것이다.”
아무도 스스로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마음을 정결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옛날 성전에 들어가셨던 것처럼 쉽게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마음에 초청해야만 그분이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부 어거스틴이 한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주님, 저를 순결하게 만드소서. 그러나 아직은 마옵소서." 신자들 역시 자신의 마음이 깨끗하지 않음을 알고, 예수님이 마음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음도 잘 압니다. 그러나 당장은 원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죄가 주는 즐거움과 유익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조지 나이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문제는 내가 아직 그 승리를 열렬히 갈망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나의 죄악적 생각이나 행동을 딱 한 번 더 맛보고 싶은 것이다. 너무도 자주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시기를 아직 원치 않는다. 내가 바로 지금 나의 생애의 주님으로서 그분을 원치 않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제쳐놓고 나의 죄악적 생각과 행동이나 행위를 선택해 왔다."[조지 R. 나이트,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완전 손윤호 역 (서울: 시조사, 2015), 231-232].
오늘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으로 인해 깨끗해지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을까요? 그렇다면 지금 결단하고 예수님의 도움을 요청합시다. 내일은 그러한 기회를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D. L. 무디 목사님이 스코틀랜드에서 집회를 마친 후, 한 소녀를 만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라고 소녀가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 좋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배우지 못해 글을 읽지 못한다고 답했습니다. 이어서 그녀는 절박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제 모습 이대로 예수님께 가면 그분이 받아주실까요?" 이 대화를 지켜보던 찬양대원 엘리자 해밀턴이 그 장면을 글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무디와 함께 사역했던 찬양 대장 아이라 생키는 그 글에 곡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내 모습 이대로>라는 찬미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1절 가사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하시 사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받으옵소서.“
당시 더러워졌던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던 예수님은 더러워진 우리의 마음성전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축복은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고 고백하며, 예수님께 나와 그분을 마음에 모셔 들이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날 예수님이 성전에서 분노하실 때, 두려워 도망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아프고, 마음이 아팠으며,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도망친 자들이 성전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벙어리가 말을 하고 눈먼 자가 보게 되며 저는 자들이 걷고 뛰었습니다. 그들은 온 마음으로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날 성전에서 예수님은 신성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결과 한 무리는 예수님의 권위를 두려워하여 도망쳤고, 다른 이들은 그분 앞에 나와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 광경은 마지막 때의 심판을 미리 보여 줍니다. 심판 날에 예수님은 본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며, 그분 앞에서 모든 사람은 둘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한 무리는 그분의 영광이 두려워 피할 것이고, 다른 무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고 감사와 찬송을 드릴 것입니다.
도망갔다가 돌아온 무리가 예수님이 성전에서 그런 일을 행할 권위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해가 생길 것을 알면서도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이를 오해하여 예수님을 정죄하는 데 사용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셨을 때 그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피했던 자들이 그분이 누구신지 알았더라면 그분께 나아가 더러워진 마음을 깨끗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마음의 성전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죄로 인해 더러워져 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순결하고 깨끗할까요? 우리 마음의 성전을 진지하게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예수님만이 우리 마음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나가 우리 마음의 성전을 깨끗하게 해달라고 간구합시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깨끗하게 해 주신 마음의 성전을 가지고 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