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농이야기를 시작하며....
처과 딸둘을 둔 40대후반의 가장입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 20여년(1981년-2002년)과 음식장사를 7년(2002년-2009년)정도 하다가,
각박한 도시생활을 벗어나, 자연과 함께하는 노후를 위해 충북 보은(09.8월)으로 귀농하게 되었습니다.
보은에선 대추농사를 계획하고 있구여.....
요즘 각 지자체에서는 지자체별로 특산물을 선정 집중지원 한답니다.
충북보은에서는 대추를 집중지원 하더군여...
저는 보은에 토지가 생겨 지역을 선택할 여지없이 보은으로 내려왔지만,
귀농을 계획하시는 분들은 하고자하는 품목 선택후, 지역을 선정해서 내려오는것두 한방법일듯.......
앞으로 귀농하면서 배우는것과 귀농생활에 대해 틈틈히 블러그에 남겨 보렵니다.
3년전부터 산행을 시작 산행후 산행후기를 정리하며, 블러그를 시작했는데,
기록하고 나중 뒤돌아 보는것두 의미있고 잼나더군여..
더구나 별도의 공간 마련없이 사진들을 저장할수 있는 공간두 되구여...
귀농한지 3개월이 지났지만
문득,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기록하며 남겨 보는것두 나름 의미있는것 같아 귀농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앞으로 귀농을 계획하시는분 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더욱 좋겠죠....ㅎㅎ
간략하나마 8월부터 지금까지의 제생활을 올려 봅니다..
8월초 보은군 산외면에 거주지를 구하고, 처와 애들은 처가집으로 저는 보은으로 이사했답니다.
일단 대추농사을 지을 목적이 명확하기 때문에 보은군청과 면사무소, 농업기술센타등을 다니며,
대추농사에 대한 정보수집을 했구여...
근처 대추농사를 짓고 계시는 농장주들을 찾아다니며, 자문도 구해봅니다.
근래 도시민들이 귀농에 관심이 많다보니 귀농하시려는 분들에 대해 교육도 시켜주고
정보도 주는곳들이 많이 있답니다.
인터넷을 잘 활용하면 매우 유용한 정보을 얻을수 있답니다.
농업기술센타에서 상담하다 우연히 9월 3일-4일
충청북도 자치연수원에서 농기계교육이 있다는 정보를 얻고,
군청에 무작정 전화걸어 신청해 봅니다. 이미 교육인원이 다 마감 되었다는군여...
그냥 포기할순 없죠, 자치연수원에 전화거니 자리 만들어 줄테니 군청에 신청하라 합니다. ㅎㅎ
교육이 있는경우 자치연수원에서는 언제든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며, 교육도 시켜주지만,
군청을 통해 신청하면 교통비도 지원해 줍니다.
1박2일동안 콤바인과 트랙터 교육을 받았는데, 농기계를 1박2일 교육으로 얼마나 배우겠습니까..ㅋㅋ
하지만, 좋았던건 귀농하시려고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얻은 유용한 정보와
현재 농사를 짓는분들에게 듣는 농촌의 실정과
재배하는 작물들에 대한 정보였지요...
여기서 천안연암대학 귀농지원센타에서 (여기클릭) 귀농자들에 대한
교육프로그램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구여..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100시간 교육이수를 하면 정부에서
우선적인 지원혜택도 있다는 정보를 얻었답니다.
츺처 : blog.naver.com/jmuns
귀농은 왜 하는가?
귀농은 농사짓는 법, 유기농 작물재배법, 집짓는 법,
이런 것들보다 교육을 제대로 보는 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다.
그래서 첫 번째로 말씀드린 것이 교육이었고 번외편을 진행하면서도
다시 이 부분을 강조해서 말씀드렸다.
교육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죽을 용기를 다 짜내서 귀농해서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결국 귀농자가 늙고 힘이 없어질 때
그 귀농지는 다시 죽음의 땅으로 되돌아갈 뿐이니까.
생태도 네 번에 걸쳐 말씀을 드렸다. 무엇이 생태인지,
생태를 실천하자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를 아파트를 통해 들여다보자고 말씀을 드렸다.
우리 의식 속에 있는 아파트는 사실 집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 사는 집을 살림집이라고 불렀다.
살림집. 사람을 살리는 집이란 뜻이다.
그러나 아파트는 생명을 살리는 집이 아니고 죽음을 부르는 장소일 뿐이다.
아파트는 욕망의 덩어리 그 자체다.
이런 아파트의 기억을 우리 머리 속에서 몰아내지 않는 한,
귀농을 한다 해도 생명의 땅에 죽음의 집을 만들고 결국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허무한 결과를 만들 것이라는 다소 섬뜩한 말씀을 드린 바 있다.
그 다음에 밥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봤고 농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하는지도 말씀드렸다.
자본이 밥을 어떻게 요절내고 있는지를 알아야
생명을 유지하는 원천인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밥을 제 손으로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면 귀농은 한갓 허망한 꿈일 뿐이니까.
귀농은 자본에게는 가장 무서운 도전이다.
그렇기에 귀농자들은 귀농 전에 온갖 방해공작을 온갖 방향으로부터 받는다.
귀농의 가장 무서운 방해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부모형제, 친구, 친인척이다.
아마 귀농을 꿈꾸다가 이 방해공작에 좌절당한 분들은 이 말이 뼈저릴 게다.
똥 싸기도 말씀드렸다.
아무리 고상한 말씀들을 하고 고상한 삶을 사신다고 해도 똥으로 물과 땅을 더럽힌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인간은 지구를 병들게 하는 바이러스일 뿐이므로
제대로 똥 싸기를 하자고 말씀을 드렸다.
똥이 땅을 살리고 밥을 살리고 사람을 살린다고 말씀드렸다.
약간의 귀차니즘만 극복한다면, 똥 싸는 일은 세상을 살리는 일이 된다.
자, 그래서, 이렇게 복잡한 순서를 거쳐 귀농을 해서 뭐하자는 건데?
이제 이 근본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하는 순서다. 대체 귀농해서 뭐하자는 건데?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자.
이경해는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면서 농업 부분 FTA 협상을 막았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농업이 단순한 1차산업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란 것을 새삼 느꼈었다.
먹지 못하면 죽는다. 아무리 고상한 말씀을 줄줄 한다고 해도
그 입으로 음식을 삼켜서 소화하지 않는다면 죽는다.
집이 없어도 살고 옷이 없어도 살고 돈 없어도 살지만 먹을거리가 없으면 죽는다.
그러므로 제 손으로 제 먹을거리를 만들지 못하는 생명은 존재할 가치가 없고
그런 생명이 모인 사회는 필경 죽는다.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자본은 - 이제 권력은 그 뒤에 자본이라는 두목이 버티고 있는
조폭의 행동대장이란 것을 다들 아실게다.
그것이 국가단위이든 그것보다 더 큰 단위건 간에 권력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은 자본의 완성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 식량 생산을 제어하고 지배하려고 그렇게 애쓰고 있는 거다.
먹을거리만 장악하면 세계정복은 완성된다.
무슨 SF영화나 만화에서 나오는 세계정복의 야욕으로 지구를 파괴하는 장면처럼
그렇게 자본은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
이 야욕을 분쇄하기 위해 지구방위대, 독수리5형제, 마징거제트, 로봇태권브이, 에반게리온,
수퍼맨, 배드맨을 총동원해볼까? 아서시라.
자본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지구방위대든 수퍼맨이든 그것을 만들어낸 원천은 결국 자본이다.
세계정복을 노리는 거대한 힘을 물리치는 무기는 로봇태권브이가 아니고
농민의 손에 들린 삽과 곡괭이, 호미와 땀방울이다.
너무나 작아서 볼품없기까지 한 농민의 손이야말로 자본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물리치는
가장 무서운 무기다.
성서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상징하는 바가 바로 이거다.
크고 무거운 것은 작고 초라한 것으로 물리쳐야 한다는 것.
크고 무거운 것을 더 크고 무거운 것으로 물리쳐봤자 상황은 그대로뿐이라는 것.
상대의 룰로 아무리 싸워봤자 그 결과는 내 것이 아니고 상대의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
농사 지어서 그걸 시장에 내다 판다면 자본이 온갖 술책으로 방해를 하겠지만
내 손으로 내 입에 들어갈 먹을거리 만들겠다는데 그걸 누가 방해할 수 있을 것인가.
제아무리 힘센 자본이라 해도 그것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귀농은 내 목숨을 내가 지키기 위해서 선택하는 것이다.
결국, 귀농을 한다는 것은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 농촌의 땅을 지킨다는 뜻이고
이 작고 단순한 행위가 자본의 거대한 야욕인 세계정복의 음모를 무너뜨린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 귀농을 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내 목숨을 내가 지킨다는 말은 내 삶의 결정을 내가 스스로 한다는 뜻이다.
나를 스스로 다스리는 것. 이것을 자치라고 한다.
조금 단위를 키우면 ‘우리’를 ‘우리 스스로’ 다스린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인류가 지구에 자신의 생명을 기댄 이후 지금까지 생존해 온 거의 유일한 방법인
공동체 만들기이다.
간디는 이것을 스와라지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중앙에 앉아있는 스무명의 사람들에 의해 작동될 수 없다.
그것은 마을의 모든 주민들에 의해 아래로부터 작동되어야 한다.’
작은 공동체를 살리면 인간이 자본에의 굴종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열린다.
인간의 자존이 지속가능한 상황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지점이다.
이 작은 공동체의 복원, 혹은 재생은 자체 생산의 동력이 없이는 불가능해진다.
외부로부터 먹이를 공급받으면서 자신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공급을 받으면 공급자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좌우될 수밖에 없다.
지금과 같은 위기의 시대에 대외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그 휘청댐이 심한 이유가 바로 이거다.
돈 벌겠답시고 있는 거 없는 거 몽땅 내다팔고 농사처럼 돈 안 되는 짓은 포기해버리는
아메바성 단견이 불러올 비극은 너무나 처참하다.
- 귀농하기 7의 에피소우드 처럼 -
내 단점은 상대의 장점이 된다.
자본이 이것을 가장 잘 이용한다.
비교우위라는 용어의 속뜻이 바로 이거다.
- 비교우위라는 용어를 만든 데이비드 리카르도는 흔히 고전경제학자로 불리지만
사실 그는 큰 사업을 성공한 사업가이자 대자본을 축적한 자본가였다.
그의 역사, 사회에서의 위치까지 읽어야 그가 말한 비교우위가 목표하는 바가 어디인지 이해할 수 있다.
- 공동체의 강점이자 동시에 약점이 자체 생산하는 먹을거리에 있으므로 이 부분을 집중공격하면
공동체 - 자본의 가장 큰 적 - 를 해체할 수가 있다.
지난 백여년 자본이 집중한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
2009년 현재, 전 세계에 있는 다양한 공동체들은 먹을거리를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공통의 위기에 내몰려있고 그 덕에 공동체는 이미 붕괴하고 있는 중이다.
대한민국 농촌의 피폐함과 몰락은 이 시각으로 보면 그 원인과 앞으로의 진행이 선명하게 보인다.
결국 귀농은, 귀농자 스스로는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본이 파괴한 공동체를 복원하고 재생하려는 노력이다.
이 인식이 없이 귀농하면 자본의 만만한 먹잇감을 새로 만드는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공동체의 복원과 재생이 귀농을 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사람은 무엇인가. 나는 세계 속에서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
대단히 깊은 질문이다. 플라톤과 노자 이래, 아니,
그 이전부터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향해 끊임없이 던진 질문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던져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이 질문의 해답을 내놓았고, 그 해답들을 다 모아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이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간단하기도 하다.
모든 담론의 작동은 한 지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연대다.
연대라는 개념 없이 사회를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대에 이르러 모든 철학자들이 모두 연대의 개념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더라도
연대가 존재의 터전이라는 것은 증명된다.
연대라고 말하니 뭔가 새로운 개념 같기도 하고 소위 좌빨
- 이런 천박한 용어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우리 사회의 처참한 천박성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쓰레기통에서도 꽃은 피겠지만 그 꽃은 시들면서 고스란히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쓰레기통 속에서는 뭐든지 쓰레기가 되는 법이다.
- 들이 즐겨 쓰는 용어 같지만, 사실 우리 삶에 이 연대는 속속들이 배어 있다.
왜 우리네 살림집들이 딸랑 한 채가 아니고 여러 채가 모여서 집을 이루며 낮은 담벼락 너머로
안방의 기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지 곰곰 생각해보시라.
연대를 하자면 주머니에서 손을 빼야 한다.
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옆엣 사람과 손을 맞잡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 모이면 사회가 된다.
사회를 사회로 만드는 것이 바로 연대다.
함께 있는 것. 공통의 목표를 만드는 것.
내 존재와 타인의 존재를 나란히 두는 것.
차별과 구분과 지배를 극복해내는 것.
이것이 연대다.
연대는 자유와 평등을 대립개념으로 두지 않는다.
내 자유를 타인의 자유 옆에 두는 것이지 내 자유를 타인의 자유 위에 얹지 않는다.
연대의 개념으로 보면 자유는 곧 평등이다.
근대국민국가를 만든 이론틀인 사회계약론과는 근본이 다른 개념이다.
사회계약론은 지배와 피지배 간의 관계를 규정한 이론이고 이 이론에 의해
권력의 위임이라는 후속개념이 나왔다.
이전까지 인간을 괴롭히던, 소유와 출신신분에 따라 촘촘히 나뉘어진 계급의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만든
이 개념이 오히려 훨씬 강고한 계급사회를 만들 줄이야 사회계약론을 만든 이들은
짐작조차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한 때, 우리는 우리의 사회가 비로소 계급의 경계가 무너진 평등의 상태가 된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다.
땀 흘려 일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프로파간다에 속아 넘어가서.
그러나 이제는 안다.
땀 흘려 일한 자들은 거리로 내 몰렸고 그 땀의 대가는 다른 이가 받아서 누리고 있다는 것을.
그런 결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계급의 다층구조로 만든
강고한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사회계약론은 사회를 피라미드 구조로 만들기 위한 강력한 이론틀이었다.
재벌의 상속, 목사의 교회세습, 정치권력의 대물림,
학력차별의 강화 등의 현상은 우리가 만든 사회가 얼마나 우리로부터 멀어져있는가를 여실히 증명한다.
도대체, 내가 도장 찍고 사인하지 않는 그런 계약에 발목 잡힐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왜 서울 강남에 태어났고 깡촌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한 인간의 존재가치가 결정되어야만 하는가.
왜 워싱턴에서 태어났고 소말리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한 인간은 비만으로 헉헉대고 한 인간은 기아로 굶어죽어야 하는가.
이 부조리극을 근본에서부터 무너뜨릴 방법은 없는가.
있다. 그것이 연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손을 내밀고 손을 잡고 큰 그물을 만드는 것.
이 그물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흘려보내는 것.
그리하여 모든 이들이 힘으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게 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평화를 일구어내는 것. 이것이 연대의 힘이다.
연대에서 경쟁은 필요없다.
경쟁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하다.
경쟁을 하지 않고 도움을 주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고 의무이다.
그러나 도시에서 온갖 구분되는 자격들의 벽을 뚫고 연대를 하는 건 너무나 어렵다.
어렵사리 만든 연대는 다른 연대의 그물과 엉켜 연대망끼리의 졍쟁체제로 변하기 일쑤다.
- 이래서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나온 거다.
- 그래서 지금은 연대를 하기 용이한 환경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전략적 선택일 뿐 절대기준이 아니다.
다시 말해, 지금 상황에서 귀농은 연대의 그물을 만들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뜻이다.
이 연대의 그물이 완성되기만 한다면 굳이 어려운 귀농까지 하면서 애쓸 일은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지금 농촌이 도시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거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내가 존재하는 지점을 만들기 위해 연대의 그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연대는 긍정이다. 부정의 연대는 없기 때문이다.
부정의 목적으로 만든 조직을 연대라는 용어로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권력을 산개시키면 부정의 힘이 개입할 이유가 없게 된다.
바로, 권력을 산개시키고 인간을 하나하나 중요한 존재로 위치시키는 방식이 연대다.
피라미드 구조를 연대라고 부르지 않는다.
피라미드 구조는 조직으로 부르는 것이 더 적확하다.
연대는 다층구조인 피라미드구조가 아니라 평으로 확장해나가는 네트워크 구조다.
네트워크는 피라미드 구조처럼 중심의 한 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무한으로 펼쳐지는 그물눈들이 있다.
하나의 그물눈이 터지면 그 곳으로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그러므로 그물눈 하나하나가 모두 다 중요하고,
그래서 각 존재들은 평등할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각 존재들은 상대의 존재에 의해 자유를 보장받는다.
공동체는 연대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 생명을 얻은 공동체는 자신을 스스로 다스린다.
자신을 스스로 다스리는 존재는 지속력을 갖는다.
이 지속력이 바로 역사다.
그러므로 귀농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중요한 일을 한다.
이제 귀농을 해서 뭐하자는 건지 답이 나온 셈이다.
연대의 그물을 만들기 위해서 귀농을 한다.
연대의 그물을 만들어서 모든 이들이 평등 속에서 자유롭고
자신의 존재를 생명의 바탕 위에 올려두기 위해서 귀농을 한다.
결국, 귀농하기는 세상 살리기가 된다.
우리 속담에 고효율을 지향하는 말이 여럿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상생하자는 말이다.
잡힌 가재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도랑 치면 덤으로 가재도 잡힌다.
목적한 것을 얻기 위해 한 노력에 뜻하지 않았던 좋은 일까지 생긴다면 이거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귀농이 바로 상생하자는 말, 고효율의 노력을 하자는 말이다.
다시 질문을 한다.
귀농을 왜 하는가.
더 이상 무한경쟁의 숨 막히는 생존경쟁에 삶을 갉아 먹히지 않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귀농을 한다.
귀농을 해서 내 손으로 내 밥 만들면서 소박하게 산다.
이웃과 만나서 나누어먹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힘을 합친다.
비로소 이 소박한 삶에서 평화와 안정을 찾는다. 행복해진다.
이 소박한 움직임이, 작은 몸짓이 자본의 침투로부터 농촌을 막고
무너진 공동체를 복원하고 단단한 연대의 그물을 만드는 힘이 된다.
나도 모르는 새, 세상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상생, 공생의 원리를 회복한다.
이것이 귀농이다.
그래서 귀농은 함부로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래서 귀농은 겁낼 일도 아니다.
한 발짝도 안 떼고 불만만 터뜨리고 두려워만 한다면 세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세상에 잡혀 먹히고 만다.
정말 지금 사는 이 세상이 불만스럽다면, 정말 겁난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한 발짝을 떼서 밖으로 나오시라.
그러면 자본이 드리웠던 안개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쟁 없이 소박하게 살고 싶건, 세상을 뒤집어엎고 싶건,
귀농의 동기와 계기는 많겠지만 귀농으로 어떤 것을 만드느냐는 결과로 들어가면 같은 그림이 나온다.
자유와 평등이 강물처럼 출렁거리는 아름다운 공동체,
세상과 내가 한 몸으로 살 수 있는 평화로운 삶,
그렇게 엮어가는 행복, 바로 이 행복한 삶으로 만든,
자본의 거대한 힘을 물리치는 작은 힘들의 아름다운 연대의 그물,
그리하여 마침내, 내 삶의 주인이 내가 되는 기쁨.
이것이 귀농이라는 도구로 만드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이다.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가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
자, 당신 앞에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탐욕의 도가니 안에서 소멸의 게임을 할 것인가,
아니면 연대의 그물 안에서 생명과 자존을 찾을 것인가.
선택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의 몫이다.
귀농은, 선택을 한 자에게는 당위가 된다.
귀농을 두려워하지 마시라.
출처 : blog.daum.net/imadang
|
첫댓글 좋은글 읽고 많은생각 해봅니다...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내손으로 내밥하고 소박하게 산다에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