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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강해 (8)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
왕하 10:28~29
I. 서론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사람이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음에도 버림받을 수 있을까요? 열왕기하 9장과 10장은 북 이스라엘 십대 왕 예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9장 1절을 보시면, 엘리사가 그의 종을 예후에게 보내어 그에게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이미 예언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이유는 아합 집안을 심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대하 22:7, “그는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시고 아합의 집을 멸하게 하신 자이더라” 그렇다면, 예후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아합의 집을 잘 심판했을까요? 열왕기하 9장과 10장은 예후가 어떻게 사역을 했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의 사역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II. 본론
1. 예후의 네 가지 사역
1) 첫째, 아합의 아들이자 북이스라엘 왕 요람을 처형했습니다.
왕하 9:21~24, “요람이 이르되 메우라 하매 그의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의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요람이 예후를 보고 이르되 예후야 평안하냐 하니 대답하되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더라 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아하시야에게 이르되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하니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겨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화살이 그의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그가 병거 가운데에 엎드러진지라”
요람은 아합의 아들로서 그의 형 아하시야가 아들이 없이 죽자, 아하시야를 계승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요람이 아람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후, 치료하기 위해 이스르엘에 있는 왕궁으로 돌아왔을 때, 예후가 이스르엘로 와서 화살을 쏘아 요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단연 요람이 죽은 장소입니다. 예후가 요람이 만나 죽인 장소가 바로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였다는 것입니다. 요람의 아버지 아합의 죄악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빼앗고 나봇을 억울하게 죽인 것이었습니다. 아합이 나봇에서 포도원을 팔라고 말했지만, 나봇은 조상에게 물러 받은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므로 그 땅을 파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팔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이 불량배를 동원해서 나봇을 죽인 다음, 그의 포도원을 강제로 빼앗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보시기에 심히 악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로 하여금 아합의 집안을 심판하시겠다고 예언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심판이 오늘 본문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람이 예후에게 처형당한 곳이 바로 나봇의 포도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예후의 사역이 아합 집안을 심판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2) 둘째, 남 유다왕 아하시야를 처형했습니다.
왕하 9:27,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정원의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그 뒤를 쫓아가며 이르되 그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비탈에서 치니 그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
예후는 아합 집안을 심판하려고 세움을 받았는데, 유다 왕 아하시야는 왜 죽였을까요? 그 이유는 아하시야 역시 아합의 집안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하시야는 아달랴의 아들이었는데, 이 아달랴가 바로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하시야는 아합의 손자였고, 아합은 아하시야의 할아버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후가 아하시야를 처형한 것 역시 아합 집안을 심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이세벨을 처형했습니다.
왕하 9:30-33,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이르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하니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이르되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이르되 그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라”
예후는 유다 왕 아하시야를 이스르엘과 므깃도 사이에 있는 이블르암에서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이스르엘로 돌아와서 이세벨을 처형했습니다. 이세벨은 우리가 잘 알듯이 북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였습니다. 이세벨은 시돈왕 엣바알의 딸로서, 북이스라엘에 바알 우상이 만연하게 한 장본인이었습니다. 또한 이세벨은 이스라엘 전체에 바알 우상을 퍼트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는데 앞장 선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아합은 이미 죽었고, 이세벨은 그의 아들 요람이 왕이 되자, 그의 뒤에서 이스라엘 나라를 섭정하고 있었습니다. 예후가 이세벨을 처형한 것도 명백히 아합 집안을 심판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4) 넷째, 바알 선지자들을 처형했습니다.
왕하 10:18-19, “예후가 뭇 백성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아오게 하라 모든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려 두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 하여 계책을 씀이라”
예후는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죽이기 위해서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겠다고 공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오지 아니하면, 모두 죽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바알에게 예배하러 온 사람들을 모두 바알 신전 안으로 넣은 후에 그들에게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알에게 제사를 다 드리게 한 후에, 그 곳에서 제사를 드린 모든 바알 선지자들와 제사장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바알의 신당을 헐어서 변소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왕하 10:27, “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신당을 헐어서 변소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이렇게 한 이유는 바알의 신당을 완전히 멸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배경주석> 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신전은 전통적으로 원래 있던 자리에 재건축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신이 그 장소를 계시해 주었으며, 그 곳은 거룩한 땅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후는 그것을 변소로 만듦으로써, 그곳이 다시는 신전 부지가 되지 못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마리아에서 공식적으로 바알 제의가 소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줄인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예후가 한 사역들을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예후를 아합 집을 심판하는 도구로 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예언은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 때에 와서 실현되었습니다. 엘리사가 종을 통하여 예후에게 기름을 부었고,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 이후, 예후는 아합의 집안을 심판하기 위해서 아합의 아들인 요람을 처형했고, 아합의 손자인 아하시야를 처형했으며,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도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아합의 추종자인 바알 선지자들와 제사장들을 모두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바알의 신전을 변소로 만듦으로 북이스라엘에 더 이상 바알 숭배가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지금까지 예후의 사역에 관한 말씀을 드렸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후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잘 감당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만일 예후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했다면, 예후는 분명히 북이스라엘의 선왕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에는 선왕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2. 예후의 문제점
예후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후는 바알을 섬겼던 모든 아합 집안의 사람들과 바알을 섬겼던 종교지도자들을 모두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후의 삶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람의 정체가 조금씩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왕하 10: 28-29,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가? 예후가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초대 왕이었습니다. 그가 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남 유다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을 알리스터 맥스래스(Alister McGrath)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배하러 남쪽으로 가야 한다면, 그들은 남 유다 왕 르호보암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이런 일을 막고자, 북쪽에 자기 나름의 제사 제도를 창설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후가 아합 집안 사람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제거했던 목적은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후가 아합 집안 사람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제거했던 이유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예후는 아합의 아들 요람과 이세벨만 죽인 것이 아니라 반란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아합의 아들 70명도 함께 죽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후는 자신이 죽인 남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형제 42명도 모두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 역시 향후 있을지 모를 자신에 대한 복수의 씨앗을 사전에 제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지금 “명성교회”의 세습 문제로 기독교가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명성교회는 1980년 7월 6일, 서울 강서구 명일동 상가건물 2층에서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명일동의 소리가 되자”라는 생각으로 “명성교회”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20명으로 시작된 교회는 급성장하여, 개척 5개월만에 성인 220명, 어린이 130명, 총 350명이 등록을 하게 되었고, 개척 3년 만에 첫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명성교회는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이며, 현재, 약 10만명의 성도님들이 이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교회를 개척해서 지금까지 사역한 김삼환 담임목사님이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겠습니까? 보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퇴를 하면서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줌으로 교회 안팎에서 수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김목사님이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가정을 위해 명성교회를 설립하고 사역을 했다고 절대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역 말년에 와서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줌으로 그 동안 수고한 김목사님의 사역에 대한 진의가 의심받고 있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 종류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것은 우리 모든 사역자들이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유혹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많은 대안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3. GIGO (Garbage In, Garbage Out)
래리 오스본(Larry Osborne)목사님이 쓴 책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을 보면, GIGO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GIGO는 “Garbage In, Garbage Out”의 약자입니다.
“오스본 목사님의 친구가 한 번은 목사님에게 항상 활기찬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래리 오스본이 GIGO라고 대답해 준 것입니다. 아무리 최신 컴퓨터라도 잘못된 숫자를 입력하면, 잘못된 답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걱정을 많이 하는 이유는 나쁜 소식과 걱정스러운 정보를 많이 입력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현재 읽거나 듣거나 보는 모든 뉴스와 사건, 문화 소식을 4주만 끊어보라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나쁜 정보나 잘못된 정보다 들어왔으면, 빨리 내 보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영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하다 보면,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쓰레기와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온 쓰레기를 빨리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계속 쌓이게 되면, 나중에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 안에 쓰레기만 가득하게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살더라도 이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사역하면서 쓰레기와 같은 마음이 그의 내면에 종종 들어왔을 것입니다. 자신의 수고와 공로를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때때로 있었을 것입니다. 수고를 많이 하면 할수록 이런 생각이 더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럴 때마다 바울이 취한 방법은 그 쓰레기들을 버리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킨 것이었습니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역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아무리 시작이 좋아도 끝까지 잘 완주하지 못하면 그 동안의 모든 고생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현재 비판을 받고 있는 몇몇 사역자들이 처음부터 돈과 명예를 좇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여 좋지 않게 끝나는 것을 주위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예후는 처음부터 자신의 왕권을 세우기 위해서 아합의 집안을 심판하고 바알 우상을 제거했을까요? 아니면 사역을 하다보니 욕심이 생겼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사역이 아름답게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많은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스라엘의 선왕으로 기록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우리의 모든 신앙 생활과 사역이 마라톤과 같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은혜와 감격을 끝까지 가지고,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끝까지 우리의 사역을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