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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김씨(義城金氏) 안동시 임하면(臨河面) 천전리(川前里, 내앞) 마을 기타
◎안동시 임동면 지례리(芝澧里)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金溪里), 금제(琴堤)
◎안동시 임하면 신덕리(新德里), 신당마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龜尾里)
안동시내에서 청송방면의 국도를 따라 11km 정도 가면 임하보조댐이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안동시 임하면(臨河面) 천전리(川前里)이다. 천전리는 1리와 2리로 나뉘는데, 1리는 임하보조댐에서 1km 정도 국도를 따라 가면 왼편에 있고, 2리는 임하보조댐에서 도로 건너에 있는 작은 도로를 따라 2km 정도 들어가야 나타난다. 천전리는 내앞이라고도 한다. 마을 앞에 반변천(半邊川)이 흘러서 유래된 것으로 주로 1리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내앞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를 지닌 마을인데 의성김씨(義城金氏) 청계공파(靑溪公派)의 동성마을로서도 많이 알려졌다.
의성김씨(義城金氏) 시조 김석(金錫)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고 후손들이 의성을 본관으로 하고 김석을 시조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의성김씨는 문소김씨(聞詔金氏) 또는 내앞김씨로도 일컬어지는데 안동 입향조 김거두(金居斗)의 현손 김만근(金萬謹)이 14세기 말 임하면(臨河面) 천전리(川前里, 내앞)에 정착한 후 지역의 대표적인 명문 사족으로 발전한 가문이다.
의성김씨의 안동 임하 내앞 입향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12년 흥왕사(興王寺) 변란 때 화를 당한 문예부좌사윤(文睿府左司尹) 김태권(金台權)의 아들 공조전서(工曹典書) 김거두가 화를 피하여 외향의 연고가 있는 안동으로 낙향하여 풍산현(豊山縣)에 거주하였는데 김거두의 아들 김천(金洊)이 다시 부내 방적동(邦適洞)으로 이거하였다. 김천의 아들 신령현감(新寧縣監) 김영명(金永命)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김한계(金漢啓)의 장자 김만근은 임하현에 살던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사위가 되어 내앞으로 이거하였고, 김만근의 동생 김만흠(金萬欽)의 후손은 일직면 귀미리(龜尾里)에 정착하였다.
김예범(金禮範)의 아들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은 의성김씨 내앞시대의 개창조(開創祖)로서 곳곳에 서당을 세우고 후진양성에 힘써서 아들 5형제가 모두 입신하였다. 장자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1522∼1585)은 문과(文科)를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고, 사자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내고 임진왜란시 진주성을 수호하여 국란 극복에 앞장섰고 시호가 문충(文忠)이다. 오자(五子)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1541∼1591)도 문과에 올라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지냈다. 차자(次子)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과 삼자(三子) 운암(雲岩) 김명일(金明一, 1534∼1570)은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숭정처사(崇禎處士)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 1598∼1669),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1623∼1695), 학행으로 추중을 받는 적암(適庵) 김태중(金台重, 1649∼1711), 영남 유학의 거장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1684∼1747)은 김극일의 후손이다.
김수일의 아들 운천(雲川) 김용(金涌, 1557∼1620)은 1590년 문과에 올라 임진왜란 때 안동수성장을 지내고 의주 행재소로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면서 일상을 기록한 『호종일기(扈從日記)』를 남겼다. 우리나라 서지학의 효시라 할 만한 『해동문헌(海東文獻)』을 저술한 경와(敬窩) 김휴(金烋, 1597∼1628), 가학전수와 후진양성에 힘써 손자 셋을 문과에 급제시킨 김임(金㶵, 1604∼1667)은 김용의 손자이다.
김임의 손자들 중 칠탄(七灘) 김세흠(金世欽, 1649∼1720)이 1687년, 월탄(月灘) 김창석(金昌錫, 1652∼1720)과 귀주(龜洲) 김세호(金世鎬, 1652∼1722)가 1670년 문과에 올라 의성김씨 3학사로 일컬어지며 각각 홍문관교리, 사간원정언, 예문관검열 등을 지냈다. 166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학문으로 이름이 있는 금옹(錦翁) 김학배(金學培, 1628∼1673)는 김명일의 현손이다.
운암 김명일의 후손은 임하면 신덕리와 임하리에 살고 있다. 병조좌랑을 지낸 김시권(金是權, 1583∼1643), 이조정랑을 지낸 김기찬(金驥燦, 1748∼1812), 귀양살이를 기록한 「북천가(北遷歌)」를 남겨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귀중한 자료 하나를 보탠 겸와(謙窩) 김진형(金鎭衡, 1801∼1865)은 김성일의 후손이고, 조선 말기의 대학자로 퇴계학맥의 마지막 거봉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35∼1899)은 김성일의 종손이다. 1657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 도승지, 한성부윤등을 역임한 김빈(金賓, 1621∼1694)은 김복일의 증손이다.
내앞의 의성김씨는 입향 이후 대대로 학문과 과한이 끊이지 않아 문과 급제자 24명, 생원 진사 66명, 문집을 출간하거나 유고를 남긴 이가 215명이다. 특히 한일합방 이후에는 영남 최초의 근대 중등 교육 기관인 협동학교를 세워 청소년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힘쓰면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66세의 노령임에도 마을 청장년들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이주 한인들의 정착을 위해 일생을 바친 백하(白下) 김대락(大洛, 1845∼1914), 한족회,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대한통의부 등에서 활약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1937), 협동학교 교장으로 활동하고 파리장서의거에 참여했다 체포된 종손 김병식(金秉植, 1856∼1936)을 비롯하여 서훈된 독립유공자만 37명이나 된다.
일직면 귀미리에는 김만흠의 증손 김안계(金安繼, 1556∼1599)가 구계(龜溪) 이중립(李中立)의 사위가 되어 정착하였다. 김안계의 7세손 귀와(龜窩) 김굉(金㙆, 1739∼1816)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지냈고, 김굉의 증손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는 퇴계학맥을 이은 대학자로 을미사변 이후 의병진을 결성하고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김만근의 장자 김인범(金仁範)의 후손은 현재의 송천, 임하, 저전 등지에 흩어져 살았으며, 차자 김예범(禮範)은 임하면 천전리에 정착하여 그 후손이 500여 년 세거하면서 크게 번성하게 된다. 김극일의 후손은 임하면 천전리, 임동면 지례리, 길안면 오대리 등지에, 귀봉 김수일의 후손은 현재 임하면 천전리, 추월리, 서후면 태장리 등지에, 김성일의 후손은 현재 서후면 금계리, 봉화군 소천면 등지에, 김복일의 후손은 김복일이 처가인 예천군 용문면 구계리로 이거한 이래로 세거하고 있다. 한편 김도화의 후손들은 일직면 귀미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현재까지 살고 있다.
천전리에는 명문세가 동성마을의 명성에 걸맞게 그윽한 고가옥이 즐비하며 많은 문화재가 있다. 특히 학문을 좋아하고 권장하는 분위기에 따라 안동 최초의 근대학교인 협동학교(協同學校)를 건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1907년 안동 일대의 청년 혁신유림들이 설립한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으로 전국적인 계몽단체인 신민회(新民會)와 연결돼 숱한 항일 애국투사를 배출한 곳이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았고, 광복 후 협동학교가 있던 내앞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이 문중이 땅을 국가에 기증해 천전초등학교가 되었다. 이처럼 국가에 대한 애국심도 충만하여 일제강점기 때에는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우선 내앞에 살던 66세의 백하(白河) 김대락(金大洛, 1845∼1914)은 경술국치(1910년)로 조국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자 엄동설한인 12월24일 만주 서간도로 망명한다. 이 노선비는 서간도에 갈 때 혼자 간 것이 아니라 만삭 임신부인 손부와 손녀를 데리고 간다. 일본 식민지에서 증손자들이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일본신민이 되는데 이를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앞 출신의 독립투사 중 대표적인 두 사람을 꼽는다면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과 월송(月松) 김형식(金衡植)이다. 일송은 1923년 상해에서 독립운동자 총회인 국민대표회가 열릴 때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표로 참가하여 의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월송(1877∼1950)은 김대락의 아들이다. 사람 천석, 글 천석, 밥 천석을 하던 도사택(都事宅)에서 태어나 협동학교(協東學校) 교사를 하다가 아버지와 대소가 안팎 식솔 수십 명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8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나는 남북연석회의 당시 개회식에서 사회를 보았다. 노년에 금강산에서 휴양 중(1950년 가을) 전화가 미치자 미군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생을 마치겠다며 구룡폭포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이 마을에서 배출한 독립운동가로 국가가 포상한 분만 30여 명이라 현재 마을 앞에다 독립운동기념관(獨立運動記念館)이 세워져 있다.
마을 앞으로 반변천이 흘러 천전(川前, 일명 내앞)이라고 하였다.
마을 뒷산이 거북의 꼬리 모양 같다고 해서 귀미(龜尾)라고 하였다. 미천(眉川)이 굽이쳐 흐른다고 하여 구비라고도 하였는데, 발음이 변하여 귀미가 되었다고도 한다.
조선 중기에 오우당(五友堂) 김근(金近)이 외가가 있는 귀미리로 옮겨 오면서 귀미리 의성김씨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김근의 부친 김안계는 당시 귀미리 일대에서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진 이중립의 사위였는데, 이를 계기로 김근은 임진왜란이 끝난 1600년경 원래 살고 있던 청송 진보에서 김안계와 모친 월성이씨 그리고 아우인 손암(遜巖) 김원(金原)과 함께 귀미리로 이주하였다. 김근의 6세손 구와(龜窩) 김굉(金㙆)이 크게 학문을 떨쳐 의성김씨 집성촌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고, 조선 말기 영남의병을 일으킨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도 가문을 크게 빛냈다.
입향조 김명일(金明一)은 청계 김진(金璡)의 3남으로 천전리에서 살다가 당시 신당마을에 살고 있던 영양남씨 남두공(南斗公)의 사위가 됨으로써 신덕리에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후손들이 운암파(雲巖派)를 형성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어 약 450년 동안 세거해 오고 있다.
신덕리는 신덕1리의 신당·구이덕·신이덕, 신덕2리의 옹기점·장승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의성김씨가 모여 살고 있는 신당마을에는 총 128가구가 살고 있으며 그중 의성김씨는 31가구이다. 그 밖에 안동권씨 32가구, 경주이씨 16가구 등이 살고 있다. 관련 유적으로 김명일을 기리고자 세운 운암정(雲巖亭)이 있다.
옛날 약초로 사용되는 지초(芝草)가 많이 나서 지촌(芝村)이라고 하였다가 물이 맑고 주변 경관이 수려하여 지례(芝澧)라고 하였다.
수몰되기 전 마을 양쪽으로 드넓은 논밭이 펼쳐져 있었고, 동쪽으로는 냇물이 휘감아 돌았다. 마을 남서쪽으로 와룡산, 북쪽으로 영지산 줄기에서 뻗어 내려 산세가 수려하였다.
원래 지례리는 갓골·새밤·밀미·갈바들·논실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으나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대부분 수몰되고 갓골과 새밤만 남아 있다. 모두 5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