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부분을 읽을 때는 화자가 누구인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되지 않아 어리둥절하며 지나게 된다. 그래도 꾹 참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점차 책 속 등장인물의 가계도를 파악하게 되고 각자의 사연을 정리하게 된다. 미처 정리되지 못하고 맥락이 잡히지 않는 부분들도 있지만 이쯤되면 이미 '귀기어린' 작가의 서술에 빨려들어가 마치 귀신에 홀린 듯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된다. 미스터리한 전개, 안갯속 같은 희미함이 완전히 걷힌 건 아니지만 작가가 하고픈 이야기가 무언지 점점 이해하게 되고, 공감하게 되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중반 이후를 지나면서는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밝혀지는 사연들로 책의 내용들이 정리되기 시작한다. 등장인물들의 숨겨진 이야기, 가슴아픈 내면의 고백에 감정이입되면서 읽는 독자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고 책을 마무리할 즈음엔 점차 가슴이 먹먹함으로 가득하고 울컥함이 올라온다. 작가 후기까지를 모두 읽고 책을 덮고 나면 나도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버린다.
정말 '소설다운' 최고의 이야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이완(대만)은 우리와 정서적으로 상당히 공감되는 나라다.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권이 비슷한 정서를 공유한다고 하지만 대만은 중화 문화권이면서도 중국과는 다른 결을 갖고 있는데 그 지점이 한국인들과 정서의 교집합 부분이 된다. 아마도 분단으로 인한 약소국가라는 점, 1987년 장제스와 국민당 독재가 끝나기까지 우리와 비슷한 70-80년대 독재 사회를 살며 반민주 폭력의 지배를 받았던 점, 가부장 사회로 여성 차별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다는 점 등이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1980년대 개발독재가 한창이던 시절, 타이완 중부의 외딴 시골마을 용징.
다섯 딸을 낳고 끝내 아래로 두 아들 낳기에 성공한 천씨 집안. 부부와 자식들의 이야기가 주요 골격을 이루고 있는데 동성연애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고 있지만 핵심은 독재와 폭력, 성차별과 소수자 학대, 극우 차별주의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보편적 공감대를 갖는다. '귀신들의 땅'은 이렇게 고통과 상처만 존재했던 기이하고 불길한 땅이며 그로 인해 집에 머물지 못하고, 집을 떠나고,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슬픈 영혼들의 한이 서린 곳이다.
누구나 아픈 기억과 상처가 있으면 이를 덮어 버리거나 묻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그림자 같고, 지나간 일들은 다시 반복된다.
과거가 있는 한, 귀신은 존재한다. 인간 세계 곳곳에 귀신들이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귀신인지도 모른다.
-작가 후기 중에서
작가는 줄곧 '울음'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후기에 적고 있다.
"나는 울기를 좋아하는 울보 귀신이었다. 집안의 아홉째로 태어난 아이였던 나는 배가 고파도 울고 배가 불러도 울었다. 잠자기 전에도 울고 잠에서 깨서도 울었다. 일곱 누나들이 돌아가면서 설탕 과자 같은 것으로 나를 달래야 했지만, 누구도 내 입을 다물게 하진 못했다. 글을 배운 뒤로는 책을 읽다가 울고 신문을 읽다가도 울고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울었다. 방송을 듣다가도 울고 꿈을 꾸다가도 울었다.
성인이 된 후에는 영화를 보고 울고 소란 때문에 울고 적막 때문에 울었다. 소설을 읽다가 울고 산문을 읽다가 울고 시를 읽다가 울었다."
이 소설은 작가가 우는 울음이다. 그리고 책을 덮으니 나도 이제껏 많이 울며 살았다는 걸 알았다. 울음을 참으며 살아왔다는 걸 알았다. 책의 마지막에서 왜 울고 싶었는지 알았다. 집에 갈 수 없어서, 집에 가지 못해서 떠돌고 있는 우리 사회의 귀신들을 위로하며 큰 울음으로 진혼하고 싶어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