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시마(鹿兒島)는 오키나와 등 남쪽의 여러 섬들을 제외한다면 일본 국토의 최남단이다
태평양을 넓게 면한 지정학적 장점으로 오래 전부터 중국, 동남아와 교역하였고 15세기 일본 최초로 서양문물을 접했으며 17세기에는 막부의 쇄국정책 하에서도 끊임없이 외국과 교류하며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예전부터 사쓰마번(薩摩藩)으로 불려온 이 지방 사람들은 일본 내에서도 영주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바닷사람다운 진취성과 용맹심이 남달라 역대 중앙정부에서도 이 지역은 건드릴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막부(幕府)말기에 남규슈의 터줏대감, 시마즈(島津)가문이 양성한 수많은 인재들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주도하여 일본의 근대화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시마즈가문은 12세기말 시조인 시마즈 타다히사(島津忠久)가 남규슈의 영주로 임명된 이래 29대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義)가 대정봉환(大政奉還-명치유신)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때까지 오랫동안 남규슈를 통치해 왔고 특히 개명군주인 28대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는 중국이 아편전쟁으로 영국에게 무참히 패하는 것을 보고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서양식 선박, 군함, 용광로 건설, 유리제조업 등을 일으켜 일본근대화의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시마즈가문에서 양성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濟) 같은 인재들이 명치유신을 성공시켰는데 이들은 유신3걸(維新三傑)로 불리우며 지금까지도 많은 일본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한 나라가 발전할려면 동시대에 많은 영걸들이 동시에 나타나 탁월한 리더십으로 국민을 깨우치고, 비전을 제시하며 불 같은 열정과 투철한 소명감으로 한 몸을 던지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의 경우 명치유신을 전후해서 시마즈가문과 그 외 기라성같은 여러 학자, 지도자, 지사들이 그러하다.
짧은 일정으로 그들의 위대한 발자취를 다 둘러 볼 수는 없었지만 많은 공부가 되었고 또 아쉬움도 컸다. 왜 우리는 조선말 시마즈가 같은 개명군주가 없었을까? 그리고 왜 100년도 훨씬 더 지난 21세기 오늘의 한국 지도자들은 과거에 매몰되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오래전 실패로 끝난, 용도폐기된 이념을 고집하고 있을까?
150년 전 일본의 지방수령 보다도 못한 21세기의 한국 지도자들.. 씁쓸하다 못해 울고 싶은 심정에 사케만 여러병 비우고 온 일본여행이었다. ㅜㅜ
가고시마항
데루쿠니신사
일본의 근대화를 촉발시킨 개명군주, 시마즈 나리아키라(1809~1897)의 동상
시마즈 히사미쓰(1817~19887)
명치유신을 완성시킨 29대 시마즈 타다요시(1840~1897)
서양식 군복과 나폴레옹식 모자를 쓰고 있다
왼쪽에 테루쿠니신사의 이시 도리이가 보인다
시로야마전망대에서 본 사쿠라지마와 가고시마 시내.
사쿠라지마는 활화산이어서 산정은 분화구름에 가리워져 있는 경우가 많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세이난(西南)전쟁에서 패한 후 자결한 곳
사이고 다카모리가 세운 사학교 터
세이난전쟁의 흔적. 쓰루마루성벽의 총흔
가고시마성 유적지. 현재는 보수 중이라 입장이 안된다
가고시마 시립미술관. 입구 중앙에 로댕의 조각품이 있다
'최후의 사무라이'라고 불리우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
명치유신 이후 그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며 중앙정부와 각을 세우다 西南戰爭에 패하여 자결하였다
가고시마 중앙공원
유리공예공장.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최초에 만든 유리공장터에 이젠 현대화된 시설이 들어서 있다
왼쪽에 석제기계공장이었던 상고집성관(尙古集成館)이 보인다.
현재는 800년 역사의 시마즈가문과 그 업적을 소개하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센간엔(仙巖園)
시마즈 가문의 19대 당주 시마즈 마쓰히사가 1628년에 만들기 시작해서 230년에 걸쳐 개축을 거듭해 완성한 정원.
1만5천평에 달하며 사쿠라지마를 앞마당에 품고 있는 멋진 정원이다
매년 이맘 때면 국화축제(전시회)가 열린다
시마즈가문의 저택 : 야쿠시마의 삼나무로 지어졌다고 한다
시마즈가문은 가고시마 남쪽바다에 있는 야쿠시마, 그리고 류큐열도로 진출해서 그들을 복속시키고 조공을 받았다
저택에서 바로 보이는 사쿠라지마
사쿠라지마섬의 노천 족욕탕. 바다 건너 가고시마항이 보인다
가고시마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미산(美山)마을의 심수관(沈守官) 도예전시관
정유재란 시 남원에서 끌려간 조선도공으로 사쓰마야키의 시조인 심당길(沈當吉)의 14대손.
심수관도예촌 입구
심수관 도예전시관
전시관 외부모습
가마터
치란무사마을(知覧武家屋敷庭園) : 이브스키 근교에 있는 무사마을의 7개의 무사저택정원
역시 치란에 있는 가미가제특공대 기념관. 1941년 육군비행학교의 분교가 치란에 세워졌고 1945년 2차대전 말기엔 특공기지로 변모되었음. 대부분의 자살특공대(가미가제)가 이 곳에서 출격하여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되었음
희생자들의 위령비
총 1,036명의 20대 특공조종사들이 오키나와전투에서 산화하였다
전근대적인 軍國主義의 희생자들.. 그러나 젊은이들이 대의를 위해 생명을 던지는 희생정신과 사무라이다운 결기가 오늘의 일본을 만들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쥬와 거리가 먼 한국의 지도층들이 본 받아야 할 희생정신이다
회관 앞마당에 가미가제 조종사와 당시 항공기 모델을 전시해 놓았다
치란특공평화회관
'독고다이(특공대)'들의 유품과 가미가제의 여러 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전시관
희생된 젊은 조종사들의 사진과 유서, 유품등이 전시되어 있다
출격 전야, 부모형제에게 보낸 특공대의 유서
이 유서는 23세의 교토약학전문대 출신의 특공대 히로히코 이코마대위의 유서인데 천황의 나라에 태어난 것과 좋은 부모를 모시게 된 것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형제들에겐 자기 대신 부모를 잘 돌봐 달라는 당부를 적고 있다. 젊은 나이인데도 글씨가 달필이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 가족에 대한 사랑이 절절한 것이 인상적이다. 독일의 나치와 마찬가지로 일본 지도층의 빗나간 애국심이 군국주의를 만들었고 수많은 젊은 청년들이 개죽음을 당했다.
명치유신의 영웅, 오쿠보 도시미치의 동상
다카미바시 다리
가고시마 중앙역 부근의 야타이촌(포장마차촌)
가고시마의 명동, 텐몬간(天文館)의 아케이드 쇼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