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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에서 사용된 무기들이 바로 동학혁명군을 특히 공주 우금치에서 사용된 무기들이라 더 관심이 가는군요.
아산의 청군 제독 엽지초와 총군(오늘날의 연대장) 섭사성은 일본군의 남하 소식을 접하자 한성에서 남진하는 길목인 성환에서 이를 맞아 요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해로를 이용해서 평양으로 철수하라는 이홍장의 지령을 거부하고 아산부근에서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한 것은 이들이 용감해서이거나 일본군과의 전투에 자신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다만 고승호의 참변을 목도했고 아산만 입구에서 좌초한 광을에서 도망쳐 나온 수병들의 입을 통해 일본해군의 무서움을 전해들은 이상 해군의 호위를 믿고 생사를 바다에 걸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육지에서의 싸움이라면 여차하면 도망갈 수도 있고, 정 안되면 항복을 하더라도 목숨을 건질 방도는 여러 가지 있었다. 엽과 섭은 고승호에 탑승했던 청국병사들을 일본해군이 단 한사람도 건져주지 않아서 모조리 고기밥이 됐다는 말을 듣고도 바다에 나갈 만큼 우둔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싸우되 도망갈 길을 마련한다’는데 합의를 보았다.
그래서 섭사성이 2천명의 병력을 가지고 북상해서 성환의 월봉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전투를 벌이기로 하고 엽지초는 나머지 1천5백 명의 병력으로 공주에 2차진지를 준비한다는 것이었다. 공주의 진영은 말하자면 수용진지였다.
성환에서 철수해 오는 부대를 맞아들여 수용할 장소였다.
이미 진다는 것을 각오하고 세운 포진이었다.
후세에 비판의 대상이 된 계획이었지만 당시 아산의 청국군으로서는 어떤 면에서 유일한 방책이기도 했다. 병력과 화력, 무기의 질, 병사들의 훈련도와 자질 등 모든 면에서 청국군은 열세였다.
성환 전투에서 양군의 대포는 각기 8문으로 동수였다.
만약에 고승호가 무사히 도착했더라면 14문의 대포가 더해진 청국군이 압도적인 화력의 우위를 가졌을 것이고 전투에 임하는 자신감과 사기도 분명 달랐을 것이다.
당시 청국군은 독일 크룹사제 75mm 야포(野砲)를 구입해서 사용했고, 일본군은 이태리식 75mm 야포(野砲)를 국산화한 것을 사용했다.
일본군이 최초로 사용한 서양식 신식 대포는 나폴레옹 3세가 쓰던 전장식 포를 막부에서 구입한 것으로 메이지 유신 후에 신정부에서 이것을 모방하여 제작한 4근(斤) 야포(野砲)와 이것을 더욱 경량화시킨 4근 산포(山砲)였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신식포라고 할 만한 것은 메이지 유신 직전에 일본의 한 지방정부(藩)가 독일에 발주했던 것을 신정부가 그대로 승계하여 메이지 8년(1875년)에 도입한 독일 크룹사제 85mm 야포가 효시였다.
그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구매한 크룹사의 75mm 동(銅)제 후장식 대포가 메이지 정부 신육군의 포병을 구성하였다. ‘무기독립’을 추구하던 일본육군은 이 크룹사제 동제야포를 국산화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당시 일본의 제강기술로는 포신용 강재를 만들 수가 없었고, 포신만을 수입해서 국내 조립을 하는 것도 일본의 재정형편으로 허락되지 않아서 1문에 3,650달러를 지불하고 추가 구매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포를 역시 청일전쟁 당시 청국군도 장비하고 있었다.
고승호가 격침될 때 황해바다에 가라앉은 14문의 대포도 이것이었다.
가격으로 치면 당시 화폐로 5만 불이 넘는 거금의 장비가 수장된 셈이다.
중국으로서는 피 같은 재산의 손실이었다.
크룹사제 화포의 국산화에 실패한 일본은 국산화가 가능한 대포의 모델을 찾은 끝에 이태리의 75mm 야포를 수입한 후 모방생산에 성공하게 된다.
크룹사제 야포보다 구조가 간단하고 제작단가가 싸게 먹힌 이 포는 메이지 19년인 1886년 7월에 오사카 포병공창에서 첫 생산에 성공하게 되어 메이지 21년(1888년)에 제식화되면서 일본군의 전 포병대가 사용하고 있던 4근 야포를 대체하여 장비된다.
이 포도 사정거리가 긴 야포형과 포신장을 줄이고 무게를 경감시킨 산포형의 두 가지로 생산되었는데, 야포형은 포신장이 178cm에 중량이 700kg였으며 포구초속 422m로 최대사정거리가 5,000m였다.
포탄의 위력과 사정거리로 볼 때, 오늘날의 81mm 박격포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산포 타입은 포신장이 100cm, 중량은 256kg였으며, 포구속도는 255m/초에 최대사거리는 3,000미터였다.
대포의 구경이나 사정거리, 위력으로 비교했을 때 청일 양군은 거의 비슷한 수준의 대포를 장비하고 있었지만 크룹사제의 청국군 대포가 이태리제를 원판으로 삼아 국산화한 일본군 대포보다는 약간 고급스러운 정도였다.
당시의 포술은 아직 간접사격술이 발명되기 전이어서 대포는 직사화기로서 사용되었다. 수압식이나 용수철을 이용한 주퇴기는 아직 실용화되기 전이어서 한 발 쏠 때마다 대포는 몇 미터씩 펄쩍 뛰었다.
이때까지도 대포는 적군에게만큼 아군 포수들에게도 위험한 물건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