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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덕숭산 수덕사
2026년 05월 25일(월요일)
수덕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입니다.
예산 수덕사는 창건과 관련된 기록이 없어, 백제 위덕왕 재위 시기인 554년부터 597년 사이에 지명법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백제 무왕 때인 601년 혜현법사가 수덕사에 처음 주석하며 법화경과 삼론을 강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남아있습니다.
백제시대 혜현 법사 이후 관련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은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의 양식을 모방한 삼층 석탑을 비롯해 수덕사에서 출토된 고려자기와 와당 등 여러 형태의 유물을 통해 융성했던 고려시대의 수덕사를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16세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덕산현 불우조에 '재덕숭산 사유취적불운이루(在德崇山 寺有翠積拂雲二樓)'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수덕사는 대웅전 이외에 취적루와 불운루 등 2개의 누각을 지닌 대가람의 면모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대웅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된 채 겨우 명맥만 이어온 수덕사는 일제강점기 때 충남 대본산인 마곡사의 말사로 남게 되었다.
이후 근대에 이르러 경허 선사의 제자 만공 스님에 의해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본찰로 평가받은 수덕사는 1962년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승격되었고, 또한 근대 선풍(禪風)을 진작한 선지종찰(禪之宗刹)임이 인정되어 1984년 총림으로 승격된 뒤 이름을 덕숭총림(德崇叢林)이라 하고 만공에게서 전법을 받은 혜암 스님을 초대 방장으로 추대하였으며, 계속해서 벽초, 원담에 이어 설정과 달하에 이르기까지 경허에서 비롯된 덕숭문중의 선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덕숭산수덕사 산문(山門)
덕숭산수덕사(德崇山修德寺) 편액
편액 좌측에 덕숭산인설정(德崇山人雪靖)’이라 적혀 있어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송원 설정(松原 雪靖 1941~ ) 스님의 글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설정 스님은 1942년 예산에서 태어나 주역의 대가인 부친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3세 때 만공 스님에게서 계를 받았던 부친과 수덕사에 찾아와 출가하기로 결심하고 7년간 속가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1980년에 수덕사 주지, 2009년에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2017년에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셨습니다.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 덕숭선문(德崇禪門)
덕숭선문은 수덕사 대웅전 건립 700주년을 기념하고, 선지종찰을 상징하여 2010년에 건립하였습니다.
4개의 배흘림기둥으로 세워진 선문입니다.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라는 한글 편액이 좌에서 우로 가로쓰기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조계종에는 8개의 총림이 있습니다. '총림(叢林)'이란 불전 법당뿐 아니라, 참선 수행을 위한 선원(禪院), 경전 교육을 위한 강원(講院), 계율 교육을 위한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합니다.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 한글 편액
선문 뒤편
원담 진성(圓譚 眞性 1926~2008)스님 부도탑
우측에 부도밭이 조성되어 있으며 입구에 원담 스님의 부도를 크게 모조하여 표지석으로 세워 놓았습니다.
만공 선사로부터 전법게를 받은 후, 1971년부터 수덕사의 교구본사로서 사격을 유지하기 위해 대내외적인 노력을 기울인 원담 스님은 근대 선맥의 상징인 경허 스님의 사상을 고취하고자 경허 스님의 부도를 조성하여 밖으로 큰 스님들의 선풍을 널리 알리고 안으로 그 선지를 면면히 계승하는 발판을 만들었으며, 수덕사를 현재의 덕숭총림으로 지정하여 가람수호와 산중의 화합에 매진하는 한편, 납자의 탁마(琢磨)에는 시처를 가리지 않았으니 근대 불조의 맥을 잇는 선지식입니다.
부도전
좌측부터 덕숭총림 초대 방장 혜암 현문(1884~1985), 2대 방장 벽초 경선(1899~1986), 3대 방장 원담 진성(1926~2008)입니다.
그 외 몇 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수덕사 일주문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서 있는 문'이란 뜻으로 세속의 잡다한 번뇌와 망상을 모두 버리고 한 마음으로 진리의 부처님 세계로 들어가는 상징적인 문입니다.
덕숭산수덕사(德崇山修德寺) 편액은
'임인청추 소전 손재형(壬寅淸秋 素筌 孫在馨)'이란 관지가 있습니다.
손재형(孫在馨.1903∼1981)은 전남 진도 출생으로 이 글씨는 1962년에 쓴 것으로 보입니다.
안쪽의 예서체로 쓴 '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 편액은 진도 출신의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3~1981) 선생의 전서 글씨입니다. 손재형 선생은 중국 금석학자인 나진옥에게 서법을 배워 예서와 전서에 탁월한 기교를 보였고, '서예'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었으며, 수집가로 해방되기 직전 일본으로 건너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온 인물로 유명합니다. 추사의 ‘不二禪蘭’이란 작품도 이때 돌아왔습니다.
편액에는‘임인장월 소전산인(壬寅長月 素筌散人)’이라는 관지와 2과의 도서가 있습니다. 이것은 소전이 1962년 9월(長月) 절에 들려 일주문 앞에 걸려 있는 산문사액과 함께 쓴 것으로 보입니다
세로 9개의 쪽판을 연결한 이 편액은 변죽을 청색으로 액판을 흰색으로 칠했는데 조선 시대의 편액 형태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편액의 글씨는 그가 즐겨 썼던 회화성이 강한 전서로 금문(金文)의 결구를 차용하여 쓴 것입니다.
일주문을 지탱하는 화강암 기둥 상부에는 지붕을 떠받치는 보(창방)가 걸쳐있고, 보를 장식하기 위해 앞, 뒤 중앙에 용두를 조각해 넣었습니다.
수덕사 일주문 기둥 위의 좌측 용은 화염이 이는 여의주를 물었지만 마주 보는 우측 용은 여의주가 없습니다. 이 상황은 조각하는 장인이 실수로 빠뜨린 것이 아니라 상징성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여의주를 문 용은 직접 여의주와 접속하고, 없는 다른 한 마리는 그 힘을 호위하거나 보좌함으로써 주체와 호응자, 즉 발현과 수호의 관계이며, 여의주를 문 용은 양(陽), 없는 용은 음(陰)으로 보아 음양의 의미를 두기도 하는데, 대체로 여의주를 문 용은 법(法)을 얻은 존재이자 진리를 체득한 주체이고 여의주가 없는 용은 아직 법을 추구하며 지키고 호위하는 진행 중인 상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일주문 뒤면
덕숭산수덕사사적비
용머리를 한 거북받침 위에 덕숭산 수덕사 사적비라고 새겨진 비신을 세우고 위에 용을 조각한 머릿돌을 올려놓았습니다.
금강문
금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한 주심포집으로 이익공 양식의 공포를 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지나는 금강문은 초서체 한자로 현판이 적혀 있었고 안에는 사찰 내부를 청정도량이 되도록 악귀를 막아주는 금강역사가 있는 문으로, 안에는 소조 금강역사상이 있습니다.
금강문 편액
금강문(金剛門)편액은 수덕사 주지를 지내신 송원 설정(松原 雪靖 1941~ ) 스님의 초서체 글씨로, 강건하면서 요동치는 필획으로 금강역사의 우락부락한 모습을 형상화 하였습니다.
수덕사 금강문 나라연금강
금강문 안 나라연금강은 천상계의 역사로서, 그 힘이 코끼리 100만배가 되고 항상 입을 열고 "아"소리를 낸다고 하여 '아금강역사'라고 합니다 '아'는 범어(고대 인도어)의 첫 글자입니다.
나라연금강은 통상 보현동자와 함께 봉안합니다. 밀적금강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야차신으로 부처님의 비밀스런 사적을 들으며, 항상 입을 다물고 "훔"소리를 낸다고 하여 '훔금강역사'라고 합니다. '훔'은 범어의 마지막 글자입니다. 밀적금강은 통상 문수동자와 함께 봉안합니다.
금강문 밀적금강
밀적금강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모습으로 음~하는 소리를 내는 듯 하여 금강역사라고도 부릅니다. 불법을 온몸으로 수호하는 비밀스러운 괴력을 상징합니다.
세 번째로 지나는 사천왕문, 문 안쪽에는 좌우로 사천왕들이 눈을 부라리고 서있습니다.
정면3칸이며 중앙은 통로로 이용하고 있으며 양측칸은 사천왕상을 모시고 외벽은 판벽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사천왕문(四天王門) 편액
1999년 건립되었다고 하며 편액은 이곳 수덕사에서 수행하신 법현(法顯 ~2010) 스님의 글씨입니다.
2010년 12월 법랍 58년, 세수 71세로 열반한 법현스님은 지난 1954년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은사로 혜욱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57년 수덕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습니다. 이후 망월사 천중선원을 시작으로 정혜사 등에서 수행정진을 했으며, 홍성 영봉암 주지를 역임했으며, 수덕사 장학기금 마련을 위한 서화전을 서울 법련사 불일미술관에서 개최하는 등 수차례 수묵화 개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서방광목천왕(좌), 북방다문천왕(우)
서방광목천왕은 수미산의 서방(서구야니주)을 수호하고 위엄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고 넓고 큰 눈으로 국토를 바르게 지키고 중생을 이익되게 해주는 천왕으로, 인간의 선악을 살피고, 손에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으며, 잘한 사람에게는 여의주로 상을 주고, 잘못한 사람에게는 용을 보내 비를 뿌리는 등 벌을 줍니다.
북방다문천왕은 수미산의 북방(북구로주)를 수호하고 재복부귀를 맡고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고 설법을 많이 들으며 불법을 옹호하는 천왕으로, 사천왕 중 우두머리로 손에는 보탑과 보당을 들고 부처님의 도량을 수호하고 불법을 불자들에게 전하는 신입니다.
동방지국천왕(좌), 남방증장천왕(우)
동방지국천왕은 수미산의 동방(동승신주)을 수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 나라를 잘 다스리고 지키는 천왕으로, 손에는 비파를 들고 음악을 연주하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신입니다.
남방증장천왕은 수미산의 남방(남섬부주)을 수호하고, 항상 염부제 중생을 관찰하고 더욱 길고 넓게 중생의 이익을 증장시켜 주는 천왕으로, 불자들에게 지혜와 복덕을 늘려주고, 이익을 증장시켜 주며, 금강검으로 불자에게 남아있는 번뇌를 끊어 지혜가 생기게 합니다.
황하정루
예산 수덕사 황하정루는 정면 7칸, 측면 3칸의 엄청난 규모의 2층 누각으로 1992년에 법장 스님이 개축하였습니다. 특이한 것은 사찰 건물인데, 목조가 아닌 콘크리트 건물입니다.
건물의 정면 2층 위에는 '선지종찰수덕사', 1층 중앙 통로 위에는 '덕숭총림'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황하정루 정면 계단 중앙에 대해탈장(大解脫場)
大觧脫場(대해탈장)의 뜻은 크게 해탈하는 도량입니다.
포대화상
사천왕문을 지나면 코끼리 석등이 있고 맞은편에는 포대화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포대화상은 본명은 '계차'로 항상 포대자루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포대화상이라 불렸고, 배가 나오고 대머리인 것이 특징입니다.
포대 화상과 함께 다섯 동자승이 어우러져 활짝 웃고 있습니다
코끼리 석등
칠층 석탑 위 황하정루 아래에 세 마리의 코끼리가 떠받치는 석등이 자리하였는데, 얼핏 부도와 흡사한 모습을 하였습니다.
한편, 코끼리 머리와 등에 걸친 장식이 무척 이색적이고, 코끼리 등 위에 올려 놓은 하대에는 발이 달린 독특한 모습을 하였으며, 원형으로 제작한 석등의 화사석에 네 개가 아닌 세 개의 구멍을 뚫어 놓은 것도 기발한 형태입니다.
황하정루 선지종찰수덕사( (禪之宗刹 修德寺) 편액
덕숭총림(德崇叢林) 편액
황하정루 뒤면
황하정루(黃河精樓) 편액
'선지종찰수덕사', '덕숭총림', '황하정루' 편액은 원담 진성(1926~2008) 스님의 글씨입니다.
글씨쓴 이의 서명, 관지에 동그라미가 있어서 금방 알아봤습니다.
법호 원담(圓潭)에서 둥글 원(圓)자를 동그라미 하나로 대신했습니다
원담 진성(圓譚 眞性 1926~2008)스님은 수덕사(修德寺) 경내에 ‘명부전(冥府殿)’, ‘원통보전(圓通寶殿)’, ‘범종각(梵鐘閣)’, ‘普光堂(보광당)’, ‘蘭若(예서)’. ‘黃河精樓’, ‘德崇叢林’ 등 많은 행초(行草 행서와 초서) 편액 및 주련 글씨를 난만(爛漫)하게 남기고 있습니다.
전북 옥구 출신으로 7세에 벽초스님을 은사로 만공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선필로 큰 글씨를 잘 썼습니다.
수덕사 대웅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는 "앞마당 아래쪽에서 정면으로 올려다보면 지붕골이 아주 길고 높아 지붕의 하중이 대단히 위압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 그러나 저 팽팽한 팽창감의 배흘림기둥이 탄력 있게, 어찌 보면 상큼하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어서 우리에게 하등의 시각적 불편이나 무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라며 극찬하였습니다.
범종각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다포집이며 기둥과 보(창방) 밑에 낙양각을 돌려 붙여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
범종각(梵鐘閣) 편액
편액은 만공 선사로부터 전법게를 받고 덕숭총림 3대 방장을 역임한 원담 진성(1926~2008) 스님이 범종각(梵鐘閣)을 신축하고 편액을 써서 걸었습니다.
덕숭산수덕사범종
수덕사 범종은 무게 6500근(3.9톤), 높이 8척 5촌(2.58m), 둘레 14척 1촌 3분(4.28m)이며 계축년(1973)에 조성되었는데 이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최초의 범종으로 경내에 주조 공장을 설립하고 원담 진성 스님이 조성하였습니다.
종을 치는 나무(당목)가 물고기 형상을 하였는데 벌린 입으로 나무를 물고 있습니다.
조인정사
조인정사는 선사가 머물며 법을 펴는 공간이자 조실의 법석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1934년 만공 선사가 세웠으며, 이후 정면 5칸, 측면 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주심포집으로 다시 지었습니다.
조인(祖印)이란 선종에서 조사의 법맥을 인가하는 법의 인을 뜻하는 말이며, 정사(精舍)란 승려들이 머물며 수행하고 공부하는 집으로 조인정사는 의례 중심의 법당과 성격이 다릅니다.
祖印精舍(조인정사) 편액
우측의 검은 바탕에 흰 글씨 조인정사(祖印精舍)편액은 성당 김돈희(1871~1936) 선생의 글씨입니다.
祖印禪院(조인선원) 편액
좌측의 흰 바탕에 검은 글씨 조인정사는 덕숭총림 3대 방장 원담 진성(1926~2008) 스님의 글씨입니다.
법고각
원담 진성 스님이 범종각을 신축할 때 법고각도 함께 지으면서 사물을 조성 봉안하였습니다.
예산 수덕사 법고각에는 불전 사물 중 법고(法鼓)와 운판, 목어(木魚) 만 비치되어 있고, 범종은 맞은편 범종각에 있습니다. 건물의 단청이 예사롭지 않게 화려하고 불전 사물도 미술품 수준으로 조성하였습니다.
법고와 운판, 목어를 두드려 축생, 조류, 어류를 제도합니다.
법고각(法鼓閣) 편액
편액은 예술, 문화, 특히 서화에 능했다는 덕숭총림 수덕사 3대 방장 원담 진성(圓潭 眞性 1926~2008) 스님의 글씨입니다.
법고받침
법고각에는 용머리에 거북이 등껍질, 사자다리, 불꼬리를 한 독특한 동물형태의 받침이 법고를 받치고 있습니다.
청련당
청련당 옆면에는 세계일화( 世界一花 ) 편액
만공 월면(滿空 月面·1871~1946) 스님이 간월암에서 천일기도 후, 조국이 광복되자 길 가의 무궁화 꽃잎을 따다가 '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나는 둘이 아니고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다)' 라는 네 글자를 쓰고, 좌측에 낙관 대신 '근화필(槿花筆)'이라고 이라고 적혀 있는데, ‘무궁화 꽃으로 쓴 글씨’라는 뜻입니다.
종무소
법고각 뒤로 정면 7칸, 측면 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지은 종무소가 자리하였고, 정면에 조인정사에 걸려있던 수덕사 편액을 옮겨 걸어 놓았습니다
수덕사(修德寺) 편액
佛紀二千九百七十二春(불기이천구백칠십이춘) 七十二叟(칠십이수) 성재 김태석(惺齋 金台錫)이 1945년 봄 72세에 쓴 예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재(惺齋)는 일찍이 중국과 일본을 왕래 하여 안목을 넓혔으며, 전예(篆隸)는 전각(篆刻)에 뛰어났습니다.
청 원세개(淸 袁世凱)의 서예 고문 등을 지냈고, 안성 청룡사(靑龍寺)의 명부전(冥府殿) 전서 편액 등을 썼습니다.
대웅전과 삼층석탑
예산 수덕사 삼층석탑(충남 유형문화재 제103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수덕사에 있는 통일신라의 석탑으로 높이가 4m.
상륜부는 2개의 보륜과 함께 보개(寶蓋)·앙련(仰蓮)·노반(露盤)이 찰주(擦柱) 없이 포개져 있는데,
노반은 방형(方形)으로 탑신부의 최상층 옥개석과 1매의 석재로 만들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기단과 탑신 및 상륜 일부가 잘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잘 갖춘 탑입니다.
1, 2층 옥개석 귀퉁이 일부가 파손되었습니다.
대웅전(국보 제49호)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1308년) 때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겹처마에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정면 3칸에는 모두 3짝의 빗살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는 널문을 두었습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건물들 중에서 특이하게 백제 양식의 곡선을 보여주는 목조건축물로 전체적인 가구의 축조 기법은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세부적인 양식은 여러가지의 차이점이 있다고 합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수덕사 대웅전은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국내 현존 건축물 중 건축시기가 명확한 기록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1928년 단청 작업 시 묵서명 발견 至大元年武甲四月十七日立柱(지대원년무갑사월십칠일 입주)
안동 봉정사 극락전(鳳停寺 極樂殿) (국보 제15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殿)(국보 18호)이 수덕사 대웅전보다 앞선 시기로 건립이 추측이 되는데 건립 시기는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대웅전(大雄殿) 편액
조선 선조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 이광(1589~1645)이 쓴 것으로 알려진 이 편액은 1970년 말까지 법당에 걸었다가 덕숭총림 3대 방장을 역임한 원담 진성(1926~2008) 스님이 쓴 대웅전 편액으로 바꿔 달았던 것을 최근에 다시 이광의 편액으로 고쳐 달았습니다.
대웅전 옆면
처마와 문에는 단청이 없고, 공포 외에 장식을 하지 않아 절제 속의 화려함을 구현하고 있고 맨 가장자리 기둥에 도리를 길게 빼어 넓은 지붕과 처마를 받치고 있습니다.
측면에는 맞배지붕의 특징인 풍판(비바람을 막아주는 나무판)을 설치하지 않은 대신 지붕을 길게 빼내었는데, 이 때문에 서까래와 목부재의 아름다운 구도가 볼 수 있으며, 특히 지붕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어 은은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웅전 내부 고주(높은 기둥) 사이에 불단을 조성하였는데, 하나의 수미단이 아니라 불상마다 개별로 육각 형태의 대좌형 수미단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며, 저대석 위에 탁자를 얹어 놓은 형태로 보아 조성 시기는 대웅전 건립연대(1308)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목조 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381호)
대웅전에는 중앙에 석가모니불, 우측(좌협시)에 약사불, 좌측(우협시)에 아미타불 등 삼세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 삼세불(보물 제1381호)은 인조 17년(1639년)에 남원의 풍국사에서 조성하였는데, 후에 남원의 귀정사(歸淨寺) 로 이운되었고, 1938년 수덕사 대웅전의 해체수리 작업이 끝나면서 만공 (滿空 : 1871~1946) 스님이 수덕사로 다시 이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존불 뒤에 걸려있는 후불탱화는 석가모니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배치된 삼여래탱화입니다.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석가모니불과 하품중생의 수인을 한 약사불과 아미타불이 화면 중앙에 표현되었고, 주변에 10대 제자, 8대 보살, 사천왕, 타방불 4위를 비롯해 천인 4구와 시자 4구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은 주존으로서 굽어보는 듯한 자세에 당당한 어깨와 넓은 무릅을 하여 안정되어 보입니다.
유계의 구분이 불분명한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표현되어 있으며, 네모꼴의 각진 얼굴에는 근엄한 듯 부드러운 미소가 엿보입니다. 귀는 길어서 어깨까지 늘어졌고, 가늘어진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렸합니다. 옷은 양어깨를 다 덮는 통견(通肩) 형식으로 오른팔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17세기 불상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 모양은 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 항마촉진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습니다.
주불인 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였고, 좌우의 약사불과 아미타불은 손의 위치를 달리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의 수인을 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은 양어깨를 다 덮는 통견 차림이지만 오른팔을 드러냄으로써 17세기 불상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불상 안에서 발견된 조성기에 조선 인조 17년(1639)에 수연 비구를 비롯한 7명의 화원들이 참여하여 제작한 것으로 확인되어 2003년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약사불과 아미타불 또한 머리 모양, 얼굴 형태와 귀, 눈, 입, 코의 표현, 양 손과 옷주름선의 사실적 묘사 등이 본존불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약사불이 왼손을 위로 하고 오른손을 아래로 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오른손 바닥에 약그릇을 들고 있습니다.
아미타불은 약사불과 손의 좌우가 바뀌고 약그릇이 보이지 않는 것만이 다를 뿐입니다.
불단 좌측 벽에 신중단을 조성하고 신중탱화
탱화는 상, 중, 하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상단에는 위태천 동진부살을 가운데로 좌우에 범천과 제석천을 배치하였고, 하단 중앙에는 삼면 팔비의 모습을 한 예적금강이 자리하였으며, 중단에는 천부중과 함께 무장한 여러 신중을 배열한 39위 신중탱화입니다.
우미량(牛尾樑)
고려 이전 주심포 건물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단차가 있는 도리를 계단 형식으로 상호 연결하는 부재를 말합니다.
우미량(牛尾樑) 직선 부재가 아니고 소꼬리처럼 곡선으로 만들어져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크기가 작으며 다른 보처럼 기둥을 연결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 보라고 할 수 없는데 현재는 우미량(牛尾樑)이라고 하여 보의 범주 속에 넣고 있습니다.
수덕사 대웅전 종단면을 보면 종도리를 기준으로 양쪽에 각각 세개씩 여섯 개의 우미량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포형식이나 익공 형식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미량은 주심포 건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대웅전 내벽은 회벽에 황토칠로 마감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원래 대웅전 내벽에는 고려시대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조선 중종 23년(1528) 그 위에 단청을 덧칠하여 벽화 속에 벽화가 있는 상태입니다.
벽화는 모두 40점이 모사되었으며 건물의 결구 사이에 생긴 작은 공간에 그린 장엄용 벽화들로, 소불(小佛), 주악비천, 공양화, 나한, 극락조 등이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면의 각 칸마다 빗살 3분합문을 달았고, 좌우 측면에는 앞쪽 한 칸에 홑문을 설치하여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건물 후면에는 각 칸마다 문을 장식하였지만 가운데 칸에만 문을 설치하였습니다
노천관음전
관음보살
보관을 쓴 머리에 백의를 걸친 관음보살이 구름 위에 서서 왼손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감로병을 기울인 모습을 하였습니다.
특히 관음보살을 떠받치는 대좌는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두 마리 용이 구름을 뚫고 관음보살을 올려다보는 장면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원래 운경 법정(1944~) 스님이 19대 주지(2003~2007)로 취임한 뒤 복원한 관음전이었으나 2022년에 삼성각으로 교체하였습니다.
삼성각(三聖閣) 편액
편액은 덕숭총림 수덕사 4대 방장을 지내신 송원 설정 (松原 雪靖 1942~) 스님의 글씨입니다.
설정 스님은 1942년 예산에서 태어나 주역의 대가인 부친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3세 때 만공 스님에게서 계를 받았던 부친과 수덕사에 찾아와 출가하기로 결심하고 7년간 속가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1980년에 수덕사 주지, 2009년에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2017년에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셨습니다.
삼성각 내부
삼성각에는 2022년에 조성한 중앙에 치성광여래(북극성)와 일광·월광보살, 칠월성군(북두칠성)을 그린 칠성탱이 있고, 좌우에 산왕대신을 그린 산신탱과 나반존자를 그린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칠성탱
화면 중앙에 금륜을 받쳐 든 치성광여래를 두고 앞쪽 좌우에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여 삼존을 구성하였으며, 주위에는 칠여래와 칠원성군을 비롯해 7명의 시자가 배치되었습니다.
치성광여래(북극성)와 일광·월광보살, 칠월성군(북두칠성)을 그린 칠성탱
치성광여래(북극성)
독성탱
계곡물이 흐르는 산속에 소나무를 등진 독성이 한 손으로 불로초를 들고 앉아 있고 물 위에는 영기를 내뿜는 거북이를 머리를 돌려 독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화면 뒤편에는 향을 태우는 향로가 놓여있고 그 위에 파랑새 두 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는 풍경이 한가롭게 보입니다.
산신탱
산신탱화의 배경과 주변 환경은 독성탱화와 동일하지만 등장 인물의 묘사가 다릅니다.
투명한 망건을 쓴 산신이 기다란 지팡이를 어깨에 걸치고 순하게 생긴 호랑이 등 위에 앉아 시냇물 건너에 서 있는 보살과 무언가 말을 하는 장면을 그렸고, 그 옆에는 커다란 도토리 같은 공양물을 든 동자가 미소를 띤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백련당
대웅전 우측에 백련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건물의 규모는 도리 방향(동, 남, 서)은 각각 7칸으로 구성하고 보 방향은 2칸으로 된 'ㄷ'자 형태이며, 공포가 없는 민도리집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전통 목조 건축물입니다.
만공 선사는 승방을 목적으로 청련당을 지으면서 맞은편에는 제자 또는 스님들과 다담(茶談) 내지 환담(歡談)을 하면서 선문답이 오가는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백련당을 지었습니다.
이후 인곡 법장(1941~2005) 스님이 1992년 주지에 취임한 뒤 덕숭총림 성역화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불사를 전개하는 일환 중 하나로 백련당을 개축하였습니다.
백련당(白蓮堂) 편액
건물 정면에 滿空 月面(만공 월면 1871~1946) 선사가 쓴 백련당(白蓮堂) 편액이 걸려있으며, 좌측에 청련당과 동일한 二九六一 (이구육일)관지와 宋月面印(송월면인) 滿空(만공) 낙관이 있습니다.
청련당
대웅전 좌측에 스님들의 승방인 청련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벽초 경선 스님이 1965년 견성암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이후 원담 진성 스님이 1974년 원래 자리에 남아있던 견성암 건물을 이곳으로 옮겨 만공 선사가 지은 청련당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ㄱ'자 형태로 건립하였으며, 양쪽 모두 정면 7칸에 측면 3칸의 규모이고 공포를 두지 않고 민도리 양식에 팔작지붕을 올렸습니다.
청련당은 원래 만공 스님을 비롯해 수행하는 스님들의 생활 공간이자 승방으로 사용했던 건물로, 지금도 같은 용도로 사용하며 공양간이 건물 끝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청련당(靑蓮堂) 편액
만공 선사가 청련당을 지은 뒤 청련당 글씨를 써서 걸어 놓은 것으로, 편액 좌측에 2961(2961-1027=1934)을 써서 청련당이 1934년에 지어졌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명부전
대웅전 좌측에 배치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만공 선사로부터 전법게를 받은 원담 진성 스님이 신축하였습니다.
예산 수덕사 명부전은 지옥 중생의 구제하겠다고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과 명부의 시왕들을 모신 전각으로 1968년 원담 스님 주석 당시 세웠습니다.
명부전(冥府殿) 편액
편액은 원담 진성(圓潭 眞性 1926~2008)스님의 글씨입니다.
원담(圓潭)의 원(圓)을 원(○)으로 표현한 게 재미있습니다.
지장보살님과 10시왕들을 모신전각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재판받는 모습을 목조 부조로 표현하였습니다.
명부전 지장보살
명부전 중앙에는 지장보살이 협시 없이 모셔져 있고, 뒤에 걸려있는 후불탱화는 지장시왕도를 조각한 지장시왕 목각탱으로, 화면 상단 중앙에 지장보살을 두고 앞쪽 좌우에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주변에는 열 분의 시왕을 비롯해 판관, 녹사, 사자, 옥졸 및 여러 권속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였습니다.
지장보살
지장보살이 팔각 대좌 위에 통견 차림으로 결가부좌하고 왼손을 다리 위에 올려 보주를 받쳐 들고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을 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이 10시왕에게 재판받는 모습을 목조 부조로 표현해 전각 내부가 많이 엄숙한 느낌이 듭니다.
좌우 벽면에는 각각 다섯 분씩 모두 열 분의 시왕이 망자를 판결하는 장면을 조각한 시왕 목각탱으로 장엄되어 있습니다.
관음바위
산하동천(山下洞天) 편액
심우당
승가대학의 강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심우당(尋牛堂) 편액
편액 좌측에 신사고선(辛巳姑洗) 법장(法長)이라고 쓰여있습니다.
고선은 십이율(十二律)의 다섯째 음. 양률(陽律)의 하나로 방위로는 진(辰), 절후로는 음력 삼월에 해당합니다.
조계종 총무원장과 수덕사 주지 등을 거친 법장(法長 1941-2005)스님이 2001년 음력3월 글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