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의 이중적 사역(1)/ 내적인 생명의 은사와 외적인 능력의 은사(고전 12:3-7, 12-13)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 대한 구원을 계획하시고 계시하시고 성취하시는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초대교회 이후 각 시대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구원사적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성취 및 완성은 이를 하나님의 백성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고 체험하게 하시고 신앙을 고백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만일 성령의 온전하시고 충만하신 사역이 없다면, 성부와 성자께서 이루신 구원계획과 성취는 각 개인의 영에까지 충분히 미칠 수 없을 것이며, 성자께서 머리이신 교회는 그 온전한 모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성령의 사역에 대한 필요하고 충분한 연구와 그 합당한 결론과 가르침이 교회 내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날 가톨릭이나 개신교회 내에서 나타나는 은사 중심의 성령 사역은 성도들을 온전히 성장케 하고 바른 교회의 모습을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물량주의와 기복주의로 흐르게 하는 경향이 있음도 사실이다.
기도회나 성령 세미나 등에 참석했던 때를 돌이켜보면, 근원인 성경은 연구하지 않고, 성령의 은사에 대한 몰이해와 심지어 잘못된 가르침이 참으로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지난날 그런 성령 운동 뒤에 오는 신앙적 허탈감을 부인할 수 없었다.
<내적인 은사 - 거듭남>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성령의 사역은 그 사역의 관점에서 볼 때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우리 속, 곧 영 안에 내주하셔서 구원을 이루고 성장케 함으로써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하는 내적인 생명의 사역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의 외부, 곧 위로부터 우리의 육체에 충만히 임하심으로써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고전 12:8-11)를 통하여 갖가지 능력으로 승리하게 하시는 외적인 능력의 사역이 그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8절-11절은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병 고치는 선물들을,
10 다른 사람에게는 기적들 행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예언(대언)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타언어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타언어들 통역함을 주셨으나 11 이 모든 것은 같은 그 한 성령께서 행하사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 말한다.
완전한 구원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의한 구속과 성령의 유기적인 구원으로 이루어진다. 구속은 우리가 거듭날 때 즉시적인 것이지만, 구원은 십자가와 성령의 사역으로 우리가 죽을 때까지 경험하게 되는 우리의 기질이나 인격이나 성질의 변화와 관련된다.
우리의 구속은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구속 사역을 믿을 때 그분의 보혈에 힘입어 즉시적으로 얻게 되는 거듭남(중생)이지만, 우리의 인격이나 기질적인 변화는 성령의 징계와 연단을 통하여 오는 일생에 관련된 문제인 것을 아는 믿는 이들은 참으로 드물다.
대부분의 믿는 이들은 거듭남(중생)에 의한 구속은 알고 있지만, 이 유기적인 구원, 곧 성령의 사역에 의한 기질의 변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그러나 완전한 구원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인격과 기질의 변화를 위한 성령의 기본적 사역에는 본질적인 내적 은사와 외적 은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도를 거듭나게 하는 내적 은사의 역사와 능력을 입히는 위로부터의 외적 은사인 능력의 역사를 성령의 이중적 사역이라고도 말한다.
성령의 내적 은사란 우리 영에 나타나는 형상이다. 곧 거듭남이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던 우리 속사람, 곧 사람의 영이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가 회복됨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요한복음 17장 3절은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고 말한다.
우리 영이 성장하여 깊은 단계에 들어가면, 마치 우리가 우리 육신의 가족을 친밀히 잘 아는 것처럼 우리 영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구주로 알게 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
또한 육신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서 살지만, 거듭난 우리의 영은 아직은 제한적이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하여 성경의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되고, 영적인 내세까지도 이르게 될 수 있다.
이것이 신령한 통찰력인데, 이는 육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장성케 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이와 같이 믿음이나 생명적인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으로 결코 막연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말한다(고전 12:3). 왜냐하면 이는 성령의 내적인 역사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를 로마서 8장 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 부모를 알고 믿는 것과 같이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의 목적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하고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을 믿고 은총을 받으면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를 들면 권투 세계 챔피언이 되려면 체급별로 세계에서 제일 강한 사람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는 그 자체가 축복이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통하여 신앙의 깊은 훈련을 쌓고 장성한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특히 성령께서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통하여 신앙을 시험하며 연단시키신다.
다윗의 경우를 보면 다윗을 오랫동안 괴롭히며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은 외부의 적이 아닌 바로 가장 가까운 사이인 장인과 아내와 자식들이었다. 주님께서도 “누가 내 어머니며 내 가족이냐?” 곧 가족과 친지가 원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으로 장성케 하기 위하여 바로 우리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이것을 성령의 징계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앙의 훈련과 성장을 위한 것이다. 내적 중생은 우리의 구속과 더불어 우리의 영속에 역사하시는 생명적 역사이다. 이는 거듭나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신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님의 보혈에 의한 우리 죄의 대속에 관련된 말씀이다.
왜냐하면 우리 죄의 대속을 믿음으로써 구속의 역사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내적 거듭남(중생)의 또 하나의 일은 인격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 생명에 의한 인격의 변화는 갈 5:22-23절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나무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는 진액”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적 거듭남은 영원한 것이므로 한번 거듭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내부(영)에 성령이 충만한 현상이므로 물로 비유하여 마신다고 표현한다. 내적 거듭남의 역사는 이미 구약성경에서 여러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셨다. 이에 대하여는 겔36:24-27절과 예레31:31-34절과 신명30:1-6절에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3장 5-8절에 주님께서도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한다.
요한14:16-17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20장 22절은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내적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내적인 은사의 약속은 죽으시기 전에 약속하여 부활하신 그날에 성취되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사역의 면, 곧 능력의 성령을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주님이 승천하신지 열흘 후에 성취되었다. 외적인 은사의 약속은 부활하신 후에 약속하여 승천하신 후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을 깊이 묵상하면, 성령의 두 방면과 주님의 부활 승천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성령의 두 방면이 주님의 부활 승천과 관계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활이 생명의 문제임을 계시한다(요한11:25).
참 생명은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죽음을 통과할 수 없는 것은 생명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생명이라 말하는 것이다(요한일서5:12).
또한 요한복음 12장에서 주님은 자신이 생명을 공급(또는 분배)하기 위한 한 알의 밀알로 계시하셨다. 생명의 줌, 곧 생명의 공급의 원칙은 죽음과 부활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전15:45에서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the last Adam, a life-giving Spirit)이 되셨다”고 말한다.
주님의 부활로 성취된 내적인 은사의 성령이 우리의 생명과 생활과 존재를 위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승천이 능력과 권위의 문제임을 계시하고 있다.
내적 은사는 자각이나 증거가 없는 반면에 외적 은사는 스스로가 느끼고 체험할 수 있고 증거가 있다. 그러므로 이기는 이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적 은사인 성령세례를 사모하고 체험해야만 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