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치 :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내원사계곡의 풍경은 실경산수(實景山水) 그 자체다. 봄에는 골짜기를 타고 오르는 봄기운이 절에서 나는 향 내음과 함께 사바세계를 맑게 정화하는 듯하고, 여름에는 짙푸른 녹음과 골짜기를 울리는 계류소리로 더운 기운을 멀리 떨치는 듯하고, 가을이면 저녁 노을이 없어도 온갖 단풍들로 하늘과 계류가 붉게 물들고, 겨울이면 순백의 산등성이 위로 풍경소리와 목탁소리가 삼라만상의 본성을 깨우려는 듯 소리의 멈춤이 없다. 지리산의 비극과 고적함, 광대함, 깊이를 동시에 갖고 있는 계곡이 내원사 계곡이다.
지리산의 마지막 빨치산이 내원사계곡에서 붙잡혔으며, 계곡에 위치한 암자가 10여개에 달하고, 구곡산에서 국사봉을 거쳐 써리봉, 중봉으로 해서 천왕봉에 이르는 산정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면서 계곡의 양 축인 내원골과 장당골의 길이만도 100여 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산청군 삼장면 소재지인 대포리에서 시작하는 내원사계곡은 내원사 앞에서 내원골과 장당골로 나눠진다. 양쪽 골짜기에서 흘러온 계류가 대포리 어귀에서 대원사쪽 계류와 합쳐지면서 대포(大浦)란 이름 그대로 큰 물바다를 이룬다. 대포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노송 숲과 음양석이 반긴다.
대포 마을에서 내원사에 이르는 3km는 계곡을 따라 오른다. 집집마다 감나무가 토담 너머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어 가을에 가면 손만 벌리면 잘 익은 홍시를 따 먹을 수 있으며 마을 인심도 길 가는 과객의 홍시 하나쯤엔 눈길도 주지 않을 정도로 후하다. 또한 여름이면 야영객들로 붐빈다. 그러나 내원사계곡의 압권은 내원사 주변이다. 내원사는 갈림길에서 내원골과 장당골 중 어느쪽으로 가도 되지만 첫 맛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장당골쪽으로 곧장 앞으로 가는 길이 좋다. 들머리의 숲도 그렇지만 장당골에서 흘러내려오는 계류 위를 걸치고 있는 반야교(般若橋) 주변의 경치가 어느곳 보다 빼어나기 때문이다. 반야교에 서면 한 여름에도 소름을 돋게하는 계곡의 찬 기운을 느낄 수 있고, 기암괴석 사이로 미끄러지듯 유연한 계류를 볼 수 있다.
내원사는 지리산의 웅장함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그 자태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가람답게 당당해 보인다. 먼저 오랜 풍상 속에서도 제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삼층석탑의 단아한 자태는 용맹정진 중인 스님의 모습처럼 결기가 있어 보이고, 비로전에 안치돼 있는 비로자나석불은 자비가 가득한 표정으로 중생제도의 넉넉함을 보여준다. 이 나라에 불교문화가 꽃을 활짝 피우는 시기인 8세기의 석탑과 불상의 양식을 볼 수 있다.
절을 한 바퀴 돌아 대나무 밭쪽으로 나가면 내원마을 가는 길이다. 장당골에는 마을이 없는 반면 내원골에는 바깥 내원과 안 내원 마을이 있다.
내원 마을은 감나무와 복조리가 일년 농사로 시천면과 삼장면 일대의 특산물로 손꼽는 곶감과 복조리가 이곳에서 시작됐다. 곶감은 내원마을이 워낙 고산지대에 있는데다가 공기도 맑아 당분이 많고 무공해라 인기가 높다. 복조리 역시 지리산에 지천으로 있는 조릿대로 만들어 품만 있으면 얼마든지 수입을 올릴 수 있어 이곳 사람들은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곶감 깎고 복조리 만드는 것이 일이다. 그러나 내원마을에는 이런 평화스러움만 있지는 않았다. 지리산 마지막 빨치산이자 2인 부대로 알려졌던 이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이 한쪽 발에 총을 맞고 생포된 곳이 내원마을이기 때문이다.
1948년 10월 전라도 여수와 순천에서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던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와 순천을 장악했다가 토벌대에 쫓겨 지리산에 숨어들면서 시작된 빨치산은 6·25를 거치면서 경남지역까지 확대돼 1955년 5월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빨치산이 모두 섬멸되었다는 발표가 있기까지 7여년 동안 일체의 접근이 금지된 반역의 땅이었다.
내원 마을은 지리산 깊숙이 있는 만큼 지리산이 겪은 아픔을 어느 지역보다 많이 앓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원골에는 절이 많다. 골이 깊어 아픔이 컸던 내원골의 한을 달래주려는 듯이 작은 암자들이 계곡을 끼고 10여 개나 된다. 내원골에는 예전에도 절이 많았다. 안 내원 마을 위쪽 골짜기를 큰 절골, 작은 절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내원사에 있는 비로자나불좌상도 내원골 상단에 있는 국사봉 부근에서 옮겨왔다. 내원골은 절골인 셈이다.
내원사 계곡의 한 축을 이루는 장당골은 산을 즐겨 찾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리산의 마지막 비경이라고 꼽는다. 중산리와 대원사쪽 등산로가 잘 개발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 지리산의 원시성이 보존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장당골은 행락객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내원사 앞에서 경상대학교 연습림까지 널찍한 길이 있고 대원사쪽에서도 무제치기폭포까지 쉽게 갈 수 있다.
장당골의 이름에 대해 여러 가지 유래가 있다. 지금의 장당(長堂)은 글자 그대로 골짜기가 길고 깊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또 다른 글자인 장당(將堂)은 이 곳 삼장면(三將面)의 지명과 더불어 장군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 예로부터 절이 많아 부처 앞에 불을 밝히는 장등(長燈)이 언제나 골짜기를 환히 비쳐‘장등이 많은 골짜기’라는 말이 음운변화하여 장당골로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도 있다.
장당 계곡은 써리봉에서 발원하여 치밭목 산장 아래에는 해발 1,000m상에 위치한 무제치기폭포를 품고 있다. 스스로 무지개를 만드는 폭포라 하여‘무지개치기’의 준말인‘무제치기’로 불리는 폭포는 40여m의 거대한 암벽 위에 3단을 이루고 있다. 위쪽 1단에서는 세 가닥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2단에서는 여덟 갈래로 흩어졌다가 3단에서는 다시 양갈래로 모아져 쏟아진다. 폭포수가 여러 갈래로 떨어지다 보니 소리 또한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듯, 여러 악기들이 합주를 하는 듯, 수량에 따라 달리 들릴 정도로 앙상블을 연출한다. 일설에는 우륵이 이 곳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무에 실을 매달아 튕겨가며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무제치기 폭포를 내려서면 2천2백여 그루나 된다는 잣나무 숲이다. 잡목 더미 일색인 다른 계곡과 달리 하늘을 가릴 정도로 치솟아 있는 나무들하며 계곡을 울리면서 힘차게 흐르는 계류는 선경이 따로 없을 정도다. 장당골을 감춰진 지리산 비경이라 하는 이유도 이 곳을 다녀가면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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