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6일 월드컵 예선 시리아와의 축구경기를 보고서
밤 아홉시
말레이시아의 잔디구장에서
시리아와 축구 예선 경기를 치른 국가대표 선수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우선 고르지 못한 잔디구장에
우리 선수들이 기분이 상했을 것 같았다.
엉뚱한 실수가 공을 찰 때 나오는 것을 보고
그들이 겪은 언짢음과 불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시리아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비수가 땅으로 굴러오는 빠른 공을 제대로 걷어내지 못하고
코너킥을 자주 허용하는 상황이 일어난 것에서
그들의 당황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마음을 추스르고 열심히 공을 위험지역에서
멀리 내 보내었다.
축구공은 둥글다고 한다.
이 말은 실력차이가 좀 나도
운이 좋으면 비기거나 이길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운이라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한 인간의 해석일 뿐이지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한 요행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경기의 결과에 작용하는 요인은 매우 많다.
선수 개인의 실력과
조직력 그리고 체력과 정신력이 중요한 요인이다.
물론 지도자들의 지식과 전략 등의 준비하는 지도력도 같이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운이라고 말하는 부분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은
정신력이다.
불굴의 투지를 앞세운 투쟁심과 승리에의 갈망이
그 경기의 운을 지배한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들어간 것이
단적인 예이다.
그 때 보여준 한국 선수들의 정신력은 모든 스포츠맨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다.
그러한 정신력을 이끌어 낸 히딩크 감독의 지도력이
인구에 회자한 것도 당연지사이다.
다시 시리아와의 경기로 돌아가서 보면
골을 서로 넣지 못하고 무승부를 기록한 것의
가장 큰 요인은
나쁜 경기장 사정도 아니고 무더운 날씨 탓도 아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리아 선수들과 감독의 정신력과 지도력이다.
그 경기를 보면서
공부 잘 하는 우등생과 헐벗고 굶주린 빈민가의 아이들과의
시합을 보는듯한 상상에 빠졌다.
사실 시리아 국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는 중이다.
내전으로 인한 정신적 물질적 상처와 아픔은
내전을 경험한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비록 시간이 흘러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지만
내전의 고통은 사람들을 극한 상황에 몰아가기 일쑤다.
특히 그들은 수많은 난민들을 양산하는 내전의 아픔을 겪고 있지 않은가.
국내 리그전을 치루며 축구를 훈련했다고는 하지만
시리아 선수들은 스포츠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병사와 같았다.
온 몸을 던져 수비를 하는 시리아 선수들을 보면서
고통 받는 그들의 국민들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감정의 유희인가를
자문해 보았다.
시리아 선수들은 눈물이 날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시리아 골키퍼의 연기도 준비된 전략의 하나임이 분명했다.
그는 한국 선수들의 사기가 올라가고
분위기가 한국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즈음에는
어김없이 신체의 이상을 호소하며 골키퍼 보호 구역에 드러누워
상승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경기장의 모든 시선은
기회를 잡는 한국 선수가 아니라 시리아 골키퍼로 향했다.
또 언제 드러누울 것인가가 모든 사람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그가 경기를 주도한 시합이었다.
한국 선수들은 경기의 주도권을 잡다가 늘 놓쳐버렸다.
아다 시피
모든 경기는 흐름이다.
흐름을 우리 쪽으로 가져와야 그 경기에서 승리한다.
승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그리고 국가주의와 스포츠를 통한 정치무관심 유발의 폐해를 따지기 전에
인간이 갖고 있는 본연의 심리인
자신이 속한 집단의 승리의 갈망을 인정하고서
이 경기 하나만을 볼 때
이기고 지고를 떠나
이 경기는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시리아 선수들의 정신력과 준비하고 경기에 임하는 태도
그리고 시리아 국민들의 고통에 찬 삶에서 나오는 절실함
부족한 것이 없는 우등생 같은 잘 다듬어진 우리의 축구 엘리트들의
매끈한 모습과 휘둘리는 상황
이러한 것이 경기 이후에도 계속 뇌리에 남는다.
비록 더러운 행동이라고 비난 받고
스포츠맨 정신에 어긋난다고 지적을 받을지라도
자신들 보다 경기력이 뛰어난 팀을 만나 최선을 다해
수비를 하고 역습을 감행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인간이라는 동물의 질긴 생명력을 절감하였다.
열악한 환경에 처한 선수들 보다는
좋은 환경에서 경기를 하는 선수들이 끝에 가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의 한 경기만을 지켜보면서 떠오른 생각은
많은 것이 부족한 사람의 절실함은 풍요로운 처지의 사람보다
분명 생존을 위한 열망은 치열하다는 것이다.
그 날 시리아 축구 선수들은 경기에 이기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생존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경기에 임했다.
어쩌면 우리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이 정신이 무너져
실수로 인한 패배를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것을 우리 감독은 예측하고 수비수에게 누누이 정신을 차리라고
경고를 거듭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공격수 보다 수비수들이 더 열심히 뛰는 모습에서
앞선 중국과의 경기에서 부주의함에서 초래한 실점 때문에
정신력을 가다듬고 경기에 임했으며
이를 지도한 지도자의 준비가 철저했을 것 같은 짐작이 들었다.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은 인간이 좌우한다.
아무리 기계가 뛰어나고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모든 일의 결과는 인간에게 달려있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러기 때문에 정신력이 중요하다.
정확성과 합리성이 부족한 생명체인 인간은
꼭 필요한 것에만 집중하는 에너지 절약의 전략을
진화를 하면서 체득하였다.
특히 남자는 여자에 비해서
여러 가지를 동시에 집중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대체로 남자는 단순하게 하나에만 집중하고
여자는 멀티형의 집중력을 갖고 있다.
먹이추적과 둥지수호의 역할이 나뉘어 정착된
진화의 결과이다.
시리아의 경기에서
우리 선수들은 집중력의 혼선을 가져다 준
시리아 선수들에게 흔들려서 경기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지 못했다.
반면에 시리아 선수들은 모두 다 경기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집중력에서 우리 선수들이 밀렸기 때문에
기술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비긴 경기가 된 것이다.
볼 점유율은 우리가 높았으나
경기를 지배한 것은 오히려 그들이었다.
시리아 선수들의 집중력은 생존을 위한 투쟁심에서 나온 것이므로
생존이 아닌 생활을 하는 우리 선수들이 감당하기엔
그 에너지가 너무 강하여 그들의 의도에 말려버린 것이다.
이렇듯 생존을 위한 생명력은 매우 강하다.
하여 이순신 장군은 생즉사 사즉생(死卽生)이라고 말하였다.
죽기 살기로 싸우는 자를 이기기는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한 경기였다.
우리는
그 경기를 통해서
목적을 위해 비열한 수단을 동원하는 부당한 태도가 아니라
그 불굴의 정신력을 배워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반대로
불굴의 정신력은 실종되고
부당한 태도만 넘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이 경기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축구 경기 하나가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할 줄은 몰랐지만
반드시 책을 통해서만
삶의 이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 것이
많은 시간을 축구 경기 시청에 보낸 밤의 소득이라면 소득일 것 같다.
정신력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임을 확인한 밤이었다.